126화. 오빠라고 할 때까지 키스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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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오빠라고 할 때까지 키스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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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오빠라고 할 때까지 키스할 거야
2023.08.15.
“전 그런 줄도 모르고……. 왜 진작 말씀 안 하셨어요?”
재인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도혁은 지난 일을 떠올리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서재인 씨는 어떻게든 내게서 벗어나려고만 했잖아. 나 때문에 제 명에 못 살 것 같아서 회사를 관둔다는 사람한테 그런 얘길 어떻게 해?”
“그래도 절 도와주신 건데 얘기를 하셨어야죠.”
“그랬으면 아마 멋대로 자기 삶을 휘두르려 한다고 반발했을걸? 당연히 나와 계약할 일도 없었을 테고.”
“그거야…….”
재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도혁의 말 그대로였다.
모든 사실을 알았다면 절대 그의 도움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차도혁은 그저 껄끄러워서 피하고 싶은 상사였을 뿐이니까.
설령 도혁이 진심을 고백했더라도 기겁하며 도망쳤으리라.
“그때는 서재인 씨를 잃게 될까 봐 두려워서 숨길 수밖에 없었어. 얘기했잖아, 서재인 씨가 사표를 던졌을 때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 같았다고.”
도혁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서재인 씨를 붙잡을 수만 있다면 난 무슨 일이든 할 거야.”
“팀장님…….”
혼자서 속앓이했을 도혁을 생각하니 재인은 가슴이 저릿했다.
“……고마워요, 전부 다.”
“고맙긴. 다 날 위해 한 건데. 하마터면 평생 혼자 늙을 뻔했는데 얼마나 다행이야?”
짓궂게 웃는 도혁의 눈빛에서 진심이 전해져 왔다.
“팀장님, 그렇게 해야 할 정도로 절 좋아하셨던 거예요?”
“응. 그렇게까지 날 뒤흔든 여자는 서재인 씨밖에 없었어.”
아아!
재인은 감정이 복받쳐 도혁의 손을 감싸 쥐었다.
“우리 팀장님, 내가 그 맘 몰라줘서 많이 속상하셨겠다.”
“그걸 말이라고? 그러니까 서재인 씨가 평생 책임져.”
도혁의 눈이 촉촉이 젖어 들었다.
재인이 눈물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싫다고 하셔도 팀장님 옆에 꼭 붙어 있을 거니까 각오하세요.”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온 우주를 다 뒤진대도 이보다 더 사랑스러운 여자는 찾을 수 없을 테니까.”
“저도 마찬가지예요. 팀장님같이 멋진 남자를 또 어디서 찾겠어요.”
“서재인 씨…….”
“팀장님…….”
서로를 향한 눈에서 달콤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자력에 이끌리듯 두 사람의 얼굴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모든 진실이 밝혀진 지금, 재인과 도혁은 서로에게 더욱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고 있었다.
이 세상에 오로지 둘만 남겨진 것처럼.
실제로는 좁은 방 안에 넷이 있다는 게 문제였지만.
“저기, 무척 감동적인 장면이긴 합니다만…….”
응?
재인과 도혁은 동시에 같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맞은편에서 성준과 유라가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저희가 있다는 걸 까맣게 잊으신 것 같아서요. 잠시 자리를 비켜드릴까요?”
성준의 말에 화들짝 놀란 재인이 도혁의 손을 뿌리쳤다.
“아, 아니에요!”
흠흠.
뒤이어 도혁의 헛기침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려 퍼졌다.
잠시 뻘쭘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갑자기 유라가 몸을 부르르 떨며 팔뚝을 문질렀다.
“아우, 오글거려! 내가 알던 서재인 맞아?”
“내, 내가 뭘…….”
재인이 시선을 피하자, 유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만 해도 모솔의 향기가 풀풀 풍겼었는데, 뭔가 분위기가 달라졌단 말이야. 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 일은 무슨 일! 최유라, 너 자꾸 이상한 소리 할래?”
“난 그저 순수한 궁금증이 일어서 물어본 것뿐인데, 뭐 찔리는 거 있나 봐?”
“……!”
최유라, 눈치는 빨라가지고.
그때와 달리, 이제는 도혁과 아주 바람직한 연인 모드에 들어간 재인이었기에 속이 몹시도 뜨끔했다.
재인의 얼굴이 벌게지자 유라가 킥킥 웃어댔다.
“아, 머리 스타일을 바꿔서 그런가 보다. 아님, 뭔가 더 있나?”
이게 진짜!
재인은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 없어 역공에 나섰다.
“최유라, 너야말로 독감인 것 같다고 피 토하듯 기침을 하더니 여기서 뭘 한 거야? 김 실장님은 독감이 옮아도 되나 봐?”
“아, 맞다! 재인이 너 전에 통화할 때, 다음에 만나면 할 말 있다고 했었지?”
유라가 언제 그랬냐는 듯 천연덕스럽게 말을 돌렸다.
하여튼 못 말려.
재인은 유라에게 살짝 눈을 흘기고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직 중대 발표가 남아 있었다.
“유라야, 나 3월 초에…….”
“너 출국 날짜 확정됐어?”
“그게 아니라, 나…… 팀장님이랑 결혼하기로 했어.”
“뭐?”
유라의 입이 딱 벌어졌다.
성준도 놀란 눈으로 도혁을 쳐다봤다.
“갑자기 웬 결혼이야? 일본 가는 건 어쩌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유학 가기 전에 식만 먼저 올리려고. 축하해줄 거지?”
“재인아…….”
다음 순간, 유라가 환호성을 지르며 재인을 꼭 끌어안았다.
“당연하지! 축하해, 재인아!”
“고마워, 유라야.”
재인과 유라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함께 울고 웃었던 10여 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유라가 눈시울을 훔치며 도혁에게 말했다.
“차 팀장님, 제 친구 재인이 잘 부탁드려요. 진짜 진짜 행복하게 해주셔야 해요!”
“그럼요. 제 평생을 걸고 약속하겠습니다.”
도혁의 표정에서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성준도 뿌듯한 얼굴로 축하 인사를 건넸다.
“도련님, 결혼 정말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김 실장님 도움이 컸습니다.”
도혁의 진심이었다.
성준의 아낌없는 조언과 물밑 도움이 없었다면, 자꾸만 멀어지는 재인을 손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성준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감사하죠. 두 분 덕분에 유라 씨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그럼 서로 빚진 게 없는 건가요?”
“그런 거죠.”
도혁과 성준은 마주 보며 시원스레 웃어 젖혔다.
브로맨스가 넘치는 훈훈한 장면에 재인의 입가에도 미소가 그려졌다.
“근데 그렇게 치면, 택배를 보내신 재인이네 어머니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유라가 고개를 갸웃하자 성준이 무릎을 탁, 쳤다.
“맞네요! 다음에 뵙게 되면 제가 큰절이라도 올려야겠습니다.”
“오늘도 재인이 어머니가 반찬을 보내주신 덕분에 다 같이 만나게 됐잖아요. 그나저나 재인이 어머니 반찬 진짜 맛있는데…….”
유라의 말에 다들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뱃속에서 꼬르륵꼬르륵 신호가 울렸다.
그때, 재인이 짝, 하고 손뼉을 쳤다.
“아, 엄마가 갈비 재운 거 보냈다고 하셨는데!”
갈비!
모두의 눈동자가 일제히 초롱초롱 빛났다.
그날 저녁, 네 사람은 재인의 엄마가 만든 맛깔스러운 반찬과 소갈비구이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진정한 숨은 공로자, 재인의 엄마에게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감사를 보내며.
* * *
다음 날 아침, 재인은 출근하자마자 팀장실로 달려갔다.
“팀장님, 저랑 잠깐 얘기 좀 하시죠.”
“뭔데, 그래?”
한창 일에 빠져 있던 도혁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재인은 도혁의 책상을 두 손으로 탁 짚으며 말했다.
“이제 그만 제 사표 수리해주세요.”
“아, 그 얘기였어?”
도혁이 느긋하게 턱을 괴며 씩 웃었다.
그랬다.
재인이 당차게 사표를 던진 지 벌써 일주일째.
아직도 그녀의 퇴사를 향한 부푼 꿈은 도혁에게 꽉 막혀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장난 그만 치고 어서 수리해주세요.”
“장난 아닌데?”
“정말 이러실 거예요? 인사과에 얘기해서 후임도 빨리 뽑아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오빠’라고 한마디만 하면 되잖아? 어차피 그만두면 부를 거 조금 먼저 하는 게 뭐 대수라고.”
“그,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요.”
한 번 그렇게 부르면 앞으로 계속 그래야 하니까.
아직은 도혁을 ‘오빠’라고 부를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닭살이 돋는 재인이었다.
도혁이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보니 유라 씨는 김 실장님한테 잘만 하던데? ‘성준 오빠’라고.”
그 얘기가 왜 안 나오나 했다.
어제저녁.
재인은 성준에게 찰싹 달라붙어 ‘오빠’ 소리를 연발하는 유라 때문에 식은땀을 흘렸었다.
쑥스러워하는 성준을 몹시도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도혁 때문에.
어느새 성준과 유라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성준 오빠’와 ‘유라’로 부르고 있었다.
유라야 원래 애교가 많다지만, 늘 점잖았던 성준이 사랑에 푹 빠진 목소리로 ‘유라야’라고 부르는 건 지금 생각해도 놀라웠다.
재인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도혁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재인 씨, 나 아직 이사로 발령받은 것도 아니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팀장님이라고 불러도 돼. 근데 둘이 있을 때까지 팀장님은 좀 너무하지 않나? 이러다 결혼해서도 팀장님이라고 부르는 거 아니야?”
“다른 호칭은 불러본 적이 없어서 입 밖으로 안 나온단 말이에요.”
허.
기가 막힌 지 도혁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재인은 그저 뻘쭘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제가 말해놓고도 이건 좀 아니다 싶어서.
“안 되겠다. 말 나온 김에 호칭 정리 좀 하고 넘어가야겠어.”
도혁은 재인의 손을 끌어당겨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그러고는 재인의 두 볼을 감싸며 말했다.
“지금부터 셋을 센 뒤에 키스할 거야. 오빠라고 할 때까지.”
“자, 장난하지 마세요.”
재인이 기겁하자 도혁이 한쪽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장난인지 아닌지는 직접 확인해보면 되잖아? 하나, 둘, 셋!”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혁이 스윽 고개를 숙였다.
“잠깐만요!”
재인이 황급히 손을 뻗어 도혁을 막았다.
살짝 기울어진 그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서 멈춰 섰다.
재인은 화악 붉어진 얼굴로 도혁을 바라봤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그의 눈동자가 조금 전에 한 말이 진심임을 말하고 있었다.
쿵쾅쿵쾅.
터질 듯한 가슴을 진정시키며 재인이 말했다.
“……좋아요. 할게요!”
“정말?”
도혁이 눈을 반짝이며 뒤로 물러섰다.
재인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말대로 조금 앞당겨진 것뿐, 어차피 언젠가는 불러야 할 ‘오빠’였다.
눈앞에는 도혁이 들뜬 얼굴로 재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인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힘겹게 입술을 뗐다.
“도혁…… 오……빠.”
그토록 기다렸던 오빠 소리에 도혁은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활짝 웃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의 입에서 반가운 말이 흘러나왔다.
“축하해, 서재인 씨. 방금 사표 수리됐어.”
드디어!
높게만 보였던 ‘오빠’의 장벽을 넘어 자유를 쟁취한 재인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생각보다 별것 아니었어.
이제 곧 회사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몸이 붕붕 떠오르는 것 같았다.
“아, 그리고 오늘 후임이 올 거야. 지난주에 2차 면접 보고 확정했거든.”
“네?”
재인은 화들짝 놀라 도혁을 쳐다봤다.
도혁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설마 정말 ‘오빠’라고 불러야 사표 수리해줄 거라고 생각했어? 날 뭘로 보고?”
제대로 당했네.
“그럼 원래부터 이럴 생각이셨어요?”
“응. 난 공사 구분이 철저한 사람이거든.”
퍽이나!
진짜 할 말은 많지만, 재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오빠’라는 말 한 마디에 행복해하는 도혁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워서.
재인은 도혁에게 살짝 눈을 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찌 됐든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인수인계 준비하러 나가볼게요.”
“서재인 씨, 잠깐만.”
도혁이 밖으로 나가려는 재인을 붙잡았다.
“왜요?”
“나도 이제부터 서재인 씨 호칭 바꿔 부르려고.”
“네?”
굳이 안 그러셔도 되는데.
왠지 모를 불안이 재인을 엄습하던 그때, 도혁이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야 서로 공평하지. 안 그래, 재인아?”
아우, 왜 그러세요!
도혁의 입에서 제 이름이 흘러나오자 재인은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재인’이라는 이름이 이렇게 낯간지러운 줄은 미처 몰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