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진실과 거짓말
(126/129)
125화. 진실과 거짓말
(126/129)
125화. 진실과 거짓말
2023.08.12.
재인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차 회장에게 단호하게 죄송하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갑자기 결혼하는 건 무리라고 말해야 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혁에게 있어 할아버지인 차 회장의 존재가 얼마나 큰지 너무나도 잘 알기에 더욱 그랬다.
재인은 도혁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도혁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재인은 미치게 가슴이 설렜다.
지금 눈앞에는 차 회장이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인은 조금 전 차 회장이 했던 말이 뇌리에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인데 내가 2년 뒤에 결혼식을 볼 수 있을지 어찌 알겠나?」
그 한마디가 재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이윽고 결심을 굳힌 재인이 입술을 열었다.
“할아버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차 회장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게 정말인가? 고맙네, 고마워!”
“서재인 씨, 고마워!”
도혁이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재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너무 기뻐서 어찌할 바 모르는 모습이 꼭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 같았다.
반면, 아빠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재인아, 너무 성급한 거 아니냐? 사람은 1년은 만나봐야 하는데, 아얏!”
엄마가 아빠의 허벅지를 꼬집으며 도혁에게 말했다.
“차 서방, 앞으로 우리 재인이 잘 부탁해! 난 자네만 믿겠네.”
“네, 어머님! 하늘이 두 쪽 나도 서재인 씨는 제가 지키겠습니다.”
“그래야지. 듣기만 해도 든든하네.”
엄마가 슬쩍 고개를 돌리며 눈시울을 훔쳤다.
재인은 울컥 눈물이 솟구치려는 걸 간신히 참고 엄마를 끌어안았다.
“엄마, 허락해주셔서 감사해요. 저희 잘 살게요.”
“그래, 그래.”
등을 토닥이는 엄마의 손길에 재인은 결국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도혁은 그런 재인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차 회장의 귓가에 넌지시 속삭였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이 은혜 평생 잊지 않을게요.”
“너 생각해서 한 거 아니다. 조금이라도 증손자를 빨리 보고 싶어서 그런 거지.”
“열심히 노력해보겠습니다.”
“기대하고 있으마.”
차 회장의 입꼬리가 하늘 높이 치켜 올라갔다.
* * *
광주에 다녀오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침.
재인이 휴게실에서 모닝커피를 내리고 있는데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아침부터 어쩐 일이세요?”
―재인아, 출근했니? 아침은 잘 챙겨 먹었고?
“그럼요. 저 아침밥 굶으면 오전 내내 기운 없는 거 아시잖아요.”
―차 서방은 잘 챙겨 먹는다니? 남자 혼자라 아침 거를 때가 많을 것 같은데.
“아, 아마 잘 먹었을 걸요?”
재인은 제풀에 찔려 말을 버벅거렸다.
엄마 아빠에게는 도혁과 같이 사는 것을 철저하게 숨기고 있었다.
그래도 나름 유서 깊은 종가집의 종손 종부인 부모님이다.
딸이 남자와 동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뒷목을 잡고 쓰러지실지도 모른다.
설사 상대가 차도혁일지라도 결혼 전에 동거라니, 엄마 아빠의 사고방식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무심하긴. 곧 결혼할 건데 잘 좀 챙겨.
“그럴게요.”
오늘 아침도 잘 챙겨 먹였습니다.
―참, 어제 택배 부쳤다.
“네?”
재인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그 말인즉슨, 재인이 예전에 살던 옥탑방으로 택배가 갔다는 얘기였다.
또!
―얘는, 처음 보낸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놀래? 오늘 저녁에 도착한대.
“오늘 저녁이요? 엄마, 택배 부칠 거면 미리 말 좀 해주시지 그랬어요.”
―얘기한다는 걸, 가게 이전 준비하느라 바빠서 깜박했어. 암튼 이것저것 밑반찬이랑 갈비 재워둔 것 좀 부쳤으니까 차 서방이랑 나눠 먹어.
“바쁘신데 뭐 하러 그러셨어요.”
―내 사위인데 내가 챙겨야지 누가 챙기니? 암튼 차 서방이랑 맛있게 먹어.
“네, 잘 먹을게요. 감사해요.”
전화를 끊은 재인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택배를 찾기 위해 그 먼 길을, 대중교통으로 다녀와야 하다니.
퇴근길 교통 체증에 시달릴 것까지 생각하니 그저 한숨만 나오던 그때,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 팀장님한테 같이 가달라고 부탁하면 되겠구나.’
주주총회도 잘 끝났겠다, 천하의 워커홀릭 차도혁도 조금은 고삐가 느슨해진 상태였다.
‘근처에 간 김에 유라도 만나고 와야지. 주말에나 팀장님이랑 같이 만나려고 했는데 잘됐네.’
재인은 며칠 전 유라와 통화를 하면서 도혁과 결혼한다고 얘기하고 싶은 걸 참느라 입이 간지러워서 혼났다.
가장 친한 친구인 유라에게만큼은 직접 만나서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재인은 오랜만에 유라와 수다도 떨고 도혁을 예비 신랑으로서 정식으로 소개할 생각에 신이 났다.
“뭐 좋은 일이라도 있어?”
언제 왔는지 도혁이 휴게실 입구에 서 있었다.
“팀장님, 얘기할 게 있었는데 마침 잘 오셨어요.”
“뭔데?”
“혹시 오늘 저녁에 일 끝나고 바쁘세요?”
“오늘 저녁?”
“아, 혹시 김 실장님과 약속 있으세요?”
도혁이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김 실장님이랑 논의할 게 좀 있어서 만나려고 했는데 갑자기 친구 할머님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 가봐야 한다더라고.”
“그러셨구나. 그럼 저랑 어디 좀 같이 가주시면 안 돼요?”
재인이 사랑스럽게 큰 눈을 깜박이자 도혁의 눈에 하트가 가득 찼다.
“서재인 씨가 원한다면 어디든 모시고 가야지. 어딘데?”
“실은 엄마가 예전에 살던 집으로 택배를 보내셨거든요. 오늘 저녁에 도착한다는데 같이 가지러 가주셨으면 해서요.”
“아, 그 옥탑방?”
도혁의 말에 재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옥탑방인 줄 어떻게 아셨어요?”
“아…….”
도혁이 말을 잇지 못했다.
고개를 갸웃하던 재인이 아하, 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번에 유라가 성지훈인가 뭔가 하는 백수한테 차였다고 울고불고할 때 얘기했었죠. 저 대신 유라가 옥탑방에 택배 찾으러 갔었다고.”
“마, 맞아. 그때 알았지.”
도혁은 재인 몰래 이마에 흐른 식은땀을 닦아냈다.
“간 김에 오랜만에 유라랑 같이 저녁 먹을까 하는데, 괜찮으세요?”
“그럼. 나야 좋지.”
“잘됐네요! 지금 전화 걸어볼게요. 잠시만요.”
재인은 아귀가 착착 맞아떨어지는 상황에 신이 났다.
전화벨이 한 번 울리자마자 유라가 나왔다.
―어, 재인아.
“유라야, 너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돼? 그쪽에 갈 일이 생겼는데 같이 저녁 먹을까 하고.”
―오늘 저녁?
“왜? 다른 약속 있어?”
―아아…… 어쩌지? 오늘은 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 집에서 쉬려고 했거든.
“그래? 그럼 집 앞으로 갈 테니까 잠깐 얼굴만 볼까?”
―아, 아니야! 아무래도 독감인 것 같아. 재인아, 그러지 말고 다음에 보자. 너한테 독감 옮기면 큰일이잖아.
갑자기 휴대전화에서 콜록콜록 요란한 기침 소리가 흘러나왔다.
잔뜩 들떠 있었던 재인은 김이 팍 새버렸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건강 잘 챙겨. 이번 독감 진짜 독하다더라.”
―응. 그럴게. 재인아, 미안.
또다시 들려온 콜록콜록 소리를 끝으로 유라와의 통화가 끝이 났다.
“팀장님, 유라가 독감인 것 같다고 다음에 보자고 하네요.”
“그럼 할 수 없지. 유라 씨 다 나으면 다시 시간 맞춰보자고.”
도혁은 아쉬워하는 재인을 살포시 품에 안았다.
* * *
그날 저녁, 도혁의 차가 좁은 주택가 골목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재인과 도혁은 곧장 옥탑으로 이어지는 긴 계단을 올랐다.
옥상에 올라가니 옥탑방에 불이 환하게 들어와 있었다.
인기척이 들리는 게 안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았다.
도혁은 옥탑방을 실제로 본 적은 처음이라 무척 흥미로웠다.
“여기가 서재인 씨가 살았던 곳이군.”
쉿!
재인이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택배 상자를 찾았다.
문 옆에 커다란 스티로폼 상자가 놓여 있었다.
가까이 가서 확인해보니 엄마가 보낸 택배가 맞았다.
“찾았어요!”
“다행이군. 이제 들고 가기만 하면 되는 거지?”
도혁이 택배 상자를 번쩍 들었다.
임무를 완수한 두 사람이 살금살금 등을 돌려 걸어가던 그때였다.
“누구세요?”
난데없는 외침과 함께 옥탑방 문이 벌컥 열렸다.
재인과 도혁은 도둑질을 한 것도 아닌데 간이 철렁 내려앉았다.
재인이 황급히 뒤돌아서며 말했다.
“죄송해요. 전에 여기 살던 사람인데요…….”
변명을 시작하려던 재인은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 쳤다.
“김 실장님?”
“서재인 씨?”
도련님까지!
성준도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도혁이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리며 물었다.
“김 실장님, 오늘 친구 할머님 장례식장에 간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게…….”
성준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마구 흘러내렸다.
“성준 오빠, 무슨 일이에요?”
때마침 옥탑방 안에서 유라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재인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소리쳤다.
“최유라, 네가 왜 여기 있어?”
“……!”
유라의 눈이 툭 튀어나왔다.
딱 걸렸네.
실로 날벼락 같은 만남이었다.
옥상 위의 네 사람은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잠시 후, 네 사람은 옥탑방 안에 마주 보고 앉았다.
재인이 팔짱을 낀 채 유라와 성준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유라 네가 말한 서른다섯 살 백수 성지훈이 김 실장님이었단 말이야? 지금 너랑 김 실장님이랑 사귀고 있고?”
“응.”
유라가 어색하게 웃었다.
재인이 기가 막힌 얼굴로 물었다.
“그걸 왜 이제야 얘기해?”
“너네 회사 주주총회 끝나면 다 얘기하려고 했어.”
“그 얘기랑 주주총회가 무슨 상관인데?”
“그러게…….”
재인은 도무지 의문이 풀리지 않아 성준에게 물었다.
“김 실장님은 이 집에 어떻게 살게 되신 거예요? 성지훈인 척은 왜 하신 거고요?”
“실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성지훈인 척한 건 유라 씨가 서재인 씨 친구라서 제가 여기 사는 걸 들킬까 봐 그런 겁니다.”
“왜 들키면 안 되는데요?”
“……서재인 씨가 알면 괜한 오해를 하실까 봐서요.”
“무슨 오해를요?”
“그게…….”
성준이 난처한 표정으로 도혁을 쳐다봤다.
재인은 물으면 물을수록 의문이 풀리긴커녕 더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때, 잠자코 듣고만 있던 도혁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서재인 씨, 내가 다 얘기해줄게. 실은…….”
.
.
.
도혁의 이야기는 두 달 전, 재인이 대차게 사표를 던진 다음 날인 토요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날 도혁의 주머니 속에는 재인이 좋아하는 밴드 BOC의 콘서트 티켓이 들어 있었다.
연지가 재인이 콘서트에 가지 못해 속상해한다고 해서 부랴부랴 성준의 도움을 받아 구한 티켓이었다.
원래 도혁은 재인과 같이 주말 근무를 하다 은근슬쩍 BOC 콘서트에 같이 가자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전날 재인이 사표를 던져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었다.
도혁은 어떻게든 재인을 붙잡고 싶어서 무작정 재인의 집 앞까지 찾아왔다.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지켜만 보고 있는데 재인이 다급히 부동산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내가 잘 아는 아가씨인데 사정이 참 딱해. 집에 큰돈 들어갈 일이 생겨서 몇 년간 모은 학비에, 그것도 모자라서 보증금까지 보태서 부모님께 드리려고 한다더라고. 빨리 방 좀 빼달라고 어찌나 사정을 하던지…….”
부동산 아주머니의 말에 도혁은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도혁은 재인이 유학을 포기할 리 없으니, 장학금을 받기 위해 다시 자신을 찾아올 거라고 예측했다.
그리고 다행히 그 예측이 딱 맞아떨어졌다.
재인을 돕기 위해 도혁은 성준에게 부탁해 재인의 옥탑방을 바로 계약했다.
그리고 살 곳이 없어진 재인이 열악한 고시원 같은 곳에 살까 봐 집에 들어와 살게 만들었다.
부모님의 사정을 파악해서 가게를 이전할 곳을 찾아주고 매출이 오를 수 있도록 뒤에서 손을 쓴 것도 다 도혁이 한 일이었다.
.
.
.
“여기까지가 내가 그동안 서재인 씨에게 숨겼던 전부야. 그동안 속여서 미안해.”
말을 마친 도혁은 재인을 지그시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