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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결혼을 허락해주십시오! (125/129)


124화. 결혼을 허락해주십시오!
2023.08.08.



 
꺄악!

재인은 온몸에 오소소 닭살이 돋았다.

어쩜 그 오빠 타령은 몇 번을 들어도 몸 둘 바를 모르겠는지.

재인이 눈만 동그랗게 뜬 채 말이 없자 도혁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오빠라고 부르는 게 그렇게 힘들어?”

“아, 아직은 무리예요! 그것도 아주 많이.”

“흐음.”

잠시 고심하던 도혁은 이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말했다.


“좋아. 서재인 씨가 앞으로 날 ‘오빠’라고 부르면 바로 사표 수리해줄게.”

재인은 기가 막혀 입이 딱 벌어졌다.


“팀장님,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여기 있어.”

“그럼 사표는 부장님께 드릴 거예요.”

재인이 책상 위에 놓인 사표를 다시 가져가려 하자 도혁이 재빨리 그 위에 서류를 덮으며 말했다.


“이사인 내가 수리 거부하면 그만이야.”

“네? 그거야말로 월권행위예요!”

“그래서, 인사과에 신고라도 할 셈이야? ‘팀장님이 사표 수리하고 싶으면 오빠라고 부르라고 했다’라고?”

순간 재인의 머릿속에 인사과 사람들이 배를 잡고 깔깔깔 웃는 광경이 떠올랐다.

내가 못 살아.


“자꾸 이러시면 일 정리되는 대로 확 안 나와버릴 거예요. 전 이미 사표를 냈으니까요.”

“내가 아는 서재인 씨는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이 아닌데?”

“팀장님, 저랑 계약할 때 약속했던 거 잊으셨어요?”

“뭘?”

“프로젝트만 성공시키면 두 달 뒤에 바로 사표 수리해주시기로 했잖아요.”

그제야 떠올랐는지 도혁이 눈동자를 굴렸다.


“아, 그랬었지.”

“정말 잊고 계셨던 거예요?”

재인이 기막혀하자 도혁이 되물었다.


“그러는 서재인 씨야말로, 나랑 한 약속 잊은 거 아니야?”

“제가 뭘요?”

“회사 그만두면 ‘오빠’라고 부르기로 했잖아.”

“아…… 그랬었죠.”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던 데다, 사표를 던질 생각에만 들떠 ‘오빠’라고 부르기로 약속했던 걸 까맣게 잊고 있었던 재인이었다.

얼떨결에 그러겠다고 약속해놓고 무책임하게 뒷일은 그때의 서재인에게 맡기기로 했었는데.

드디어 ‘그때’가 코앞에 닥치고 만 것이었다.


“어차피 곧 관둘 건데 며칠 앞당겨 얘기하는 게 뭐가 힘들다고 그래?”

도혁이 짓궂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재인의 눈을 들여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자, 따라해 봐. 도, 혁, 오, 빠!”

꺄아아아아악!

재인은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섰다.

뒤이어 견디기 힘든 민망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러다 또 팀장님한테 말리겠어. 안 되겠다, 일단 후퇴!’

재인은 잽싸게 문으로 도망가며 말했다.


“암튼 전 분명히 사표 냈습니다!”

“서재인 씨, 잠깐만!”

도혁의 목소리에 미련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리로 돌아온 재인은 팀장실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순순히 포기할 도혁이 아님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아니, 회사를 그만두는 게 이렇게 힘든 거였어?’

‘오빠’ 라는 장벽이 아직은 태산처럼 높아 보이기만 한 재인이었다.

* * *

며칠 뒤, 토요일.

재인의 엄마와 아빠는 거실 소파에 앉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여보, 다른 부동산에도 연락해봤어요?”

“응. 우리 자금으로는 마땅한 곳이 없대요.”

아빠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재인의 부모님은 진혁의 농간으로 가게 이전이 무산된 이후 벌써 2주 넘게 옮길 곳을 찾지 못했다.

급한 대로 짐들은 창고를 빌려 넣어두고 백방으로 마땅한 가게를 알아보고 다니는 중이었다.

엄마가 아빠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잘될 거예요. 가게가 천지인데 우리 들어갈 데 한 곳 없겠어요?”

“그래요. 좀 더 알아봅시다.”

“참, 재인이한테는 절대 티 내지 말고요, 알았죠?”

“알았어요. 그나저나 우리 재인이 도착할 때 되지 않았나?”

아빠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현관 벨이 울렸다.


“어머, 왔나 봐요!”

엄마가 부리나케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얘는, 그냥 열고 들어오면 되지 새삼스럽게 벨은…….”

현관문을 연 엄마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멋쩍게 웃고 있는 재인의 뒤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 서 있었다.

다시 봐도 자체 발광하는 멋진 자태로.


“차 서방?”

무심코 내뱉은 자신의 말에 흠칫 놀란 엄마가 황급히 말을 고쳤다.


“아니, 차도혁 씨가 여긴 웬일이에요?”

“어머님, 그간 안녕하셨어요?”

도혁이 활짝 웃으며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거 참, 뉘 집 아들인지 진짜 잘생기긴 했다.’

엄마의 입꼬리가 절로 따라 올라갔다.

아,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뒤늦게 이성을 차린 엄마가 일부러 냉랭하게 받아쳤다.


“차도혁 씨, 내가 재인이랑 그만 헤어져달라고 했잖아요. 근데 집까지 찾아오고,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엄마, 자꾸 왜 그러세요. 그만 화 푸세요.”

재인이 엄마의 팔짱을 끼며 배시시 웃었다.

그런데도 엄마의 표정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너야말로 자꾸 이럴래? 내가 차도혁 씨는 안 된다고 했지? 널 함부로 대하는 집안은 절대 안 돼!”

“아, 엄마아아. 저 이제 괜찮다니까요? 할아버님과도 아주 잘 지내요.”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도혁과 헤어지라는 말을 한 뒤로 엄마는 재인이 도혁의 ‘도’ 자만 꺼내도 딱 말을 끊어버렸다.

차 회장이 허락했다고 했는데도 엄마는 헤어지기 싫어서 둘러대는 말이라며 무시해버렸다.

그 바람에 여태까지 제대로 된 해명 한 번 하지 못한 재인이었다.

도혁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어머님, 죄송합니다. 그동안 많이 힘드셨죠.”

“내가 사과받으려고 이러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만 돌아가 줘요.”

엄마가 도혁을 밖에 남겨 둔 채 문을 닫으려던 찰나였다.

돌연 차 회장이 엄마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십니까. 제가 인사가 늦었습니다.”

“차대산 회장님?”

인터넷과 텔레비전에서나 봤던 유명 인사가 현관 앞에 서 있다니.

보고도 믿기지 않는 상황에 엄마는 멍하니 눈만 깜박였다.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잠시 이야기를 나눠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차 회장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잠자코 뒤에서 지켜만 보던 아빠가 불쑥 앞으로 나섰다.


“어서 들어오시죠.”

문이 활짝 열리고 따스한 오후 햇살이 현관을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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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차 회장님이 저희 가게 이전을 일부러 방해한 게 아니라니 정말 다행입니다.”

차 회장의 설명을 들은 아빠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엄마도 굳어 있던 얼굴에 비로소 화색이 돌았다.


“그동안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회장님. 그런 줄도 모르고 제가 괜히 차 서방한테 심한 말을 했네요.”

도혁의 호칭이 그새 ‘차도혁 씨’에서 ‘차 서방’으로 바뀌었다.

엄마가 나긋나긋한 말투로 도혁을 불렀다.


“차 서방, 내가 미안했네.”

“아닙니다. 충분히 그러실 만했죠.”

차 회장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늦었지만 원래 계획했던 대로 가게를 이전하시죠. 준비부터 마무리까지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정말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별말씀을요. 원래대로 되돌려놓는 것뿐인데요. 저야말로 힘드셨을 텐데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여기까지 직접 찾아와 주시고…… 제가 감사하죠.”

그간의 막막했던 시간이 떠올랐는지 엄마가 눈물을 글썽였다.

재인도 덩달아 눈시울을 닦았다.

이제야 비로소 오해가 풀리고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혁과 헤어질 생각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었는데.

재인은 지금, 믿기지 않는 행복한 순간을 가슴 속에 고이 담았다.


“실은, 제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잠시 말이 없던 차 회장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아빠가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제 손자라서가 아니라, 도혁이 참 괜찮은 녀석입니다. 서재인 씨를 누구보다 아끼고 있고요.”

“그럼요. 잘 알죠.”

“그래서 말인데,”

차 회장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괜찮으시면 서재인 씨가 일본에 가기 전에 두 사람 식을 올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네? 그렇게 빨리요?”

차 회장의 핵폭탄급 선언에 엄마와 아빠의 눈이 동시에 주먹만 해졌다.

깜짝 놀라기는 당사자인 재인도 마찬가지였다.


“할아버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식을 올리다니요?”

“왜? 설마 서재인 씨, 우리 도혁이 책임질 생각도 없이 만나는 건가?”

“아니요! 그럴 리가요.”

“그럼 결혼할 거지?”

“네. 하긴 할 건데…….”

“그래야지. 식은 역시 3월이 좋겠지? 날도 따뜻하고.”

맙소사!

어쩜 밀어붙이는 것까지 차도혁 씨랑 똑같으신지.

재인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단호하게 의사를 밝혔다.


“할아버님, 죄송하지만 우선은 학업에 전념하고 싶어요. 식을 올리더라도 2년 뒤에 유학 다녀와서 하겠습니다.”

“그건 곤란한데…….”

차 회장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팀장님, 어떻게 좀 해보세요!

재인은 도혁에게 절박한 구조요청을 보냈다.

그러자 도혁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갑자기 허리를 세워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고는 기합이 바짝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님, 아버님! 저 차도혁, 재인 씨를 반드시 행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 결혼을 허락해주십시오!”

 

 
꺄아아아아악!

재인은 소리 없는 괴성을 질렀다.

말리라고 했더니 한술 더 뜰 줄이야.

결혼이 무슨 소꿉놀이도 아니고.

제발 차도혁 씨가 사전 협의라는 걸 해주면 좋겠네.


“팀장님까지 왜 이러세요? 이러지 마시고 나중에 저랑 따로 얘기해요.”

재인이 뜯어말리는데도 도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얼굴에는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엄마 아빠는 도혁의 기세에 눌렸는지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내가 못 살아!


‘설마, 내려오기 전부터 할아버님과 이러기로 계획했던 건 아니겠지?’

그러고 보니 주말에 부모님의 오해를 풀어드리러 다녀오자고 먼저 말을 꺼낸 것도 도혁이었다.

차 회장도 그동안 병실에만 있기 답답했다며 바람도 쐴 겸 같이 가자고 나섰고.

의심 가득한 재인의 눈빛을 튕겨내며 도혁이 말을 이었다.


“가게 이전 때문에 바쁘실 테니 준비는 저희 쪽에서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차 서방,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빠른 것 같은데…….”

엄마의 말에 아빠도 거들고 나섰다.


“내 생각도 그러하네. 아직 사귄 지 두 달밖에 안 됐는데 결혼이라니. 재인이 말대로 유학을 끝내고 하는 게 좋을 것 같네.”

“그래, 차 서방. 급히 서두를 이유가 뭐가 있어.”

나이스, 엄마 아빠!

재인도 이때다 싶어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설 도혁이 아니었다.


“아버님, 어머님…….”

도혁이 다시 한번 설득에 나서려던 그때였다.

쿨럭쿨럭.

갑자기 차 회장이 밭은기침을 내뱉기 시작했다.


“할아버님, 괜찮으세요?”

재인이 화들짝 놀라 차 회장의 안색을 살폈다.

쓰러졌다 의식을 되찾은 지 20여 일.

예전의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온 차 회장이지만, 아직 100퍼센트 안심하기는 일렀다.


“흠흠. 잠시 사레가 들렀나 보네. 이제 괜찮으니 걱정 말게.”

“정말요? 그러시다니 다행이에요.

“서재인 씨, 내가 이번에 쓰러졌을 때 가장 아쉬웠던 게 뭐였는지 아나?”

“글쎄요…….”

재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차 회장이 씁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도혁이 결혼식을 못 보고 가는 게 한이었어.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인데 내가 2년 뒤에 결혼식을 볼 수 있을지 어찌 알겠나?”

“그런 말씀 마세요.”

“아니야, 왠지 이번에 때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아.”

“할아버님…….”

“내가 너무 밀어붙여서 미안하네. 괜히 마음이 조급해져서 그만…….”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차 회장이 입을 열었다.


“서재인 씨, 다녀와서도 어차피 도혁이와 결혼할 거라면 가기 전에 해주면 안 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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