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오빠라고 불러도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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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오빠라고 불러도 되는데
2023.08.05.
‘뭐야? 어떻게 이 상황에서 웃을 수가 있지?’
진혁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발바닥에서부터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오던 그때, 주주총회장 단상 옆쪽에 난 문이 벌컥 열렸다.
활짝 열린 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바로, 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차대산 회장이었다.
그의 뒤를 따라 차주영과 성준이 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할아버지가 어떻게……?”
차 회장이 건강한 모습으로 걸어 들어오자, 진혁은 귀신이라도 본 듯 넋이 나갔다.
차정환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세요?”
“그렇게 됐다.”
차 회장은 진혁에게서 마이크를 낚아채고는 주주들을 향해 말했다.
“주주 여러분, 저의 사적인 일로 혼란을 드려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제가 손자인 차도혁 후보와 서재인 씨의 교제를 반대했던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서재인 씨를 알면 알수록 손자에게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짝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이미 결혼까지 허락했습니다.”
“아버지, 대체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차정환이 발끈하며 마이크를 뺏으려 하자 성준이 막아섰다.
그 틈을 타 차 회장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차도혁 후보는 계약을 위반한 게 아닙니다. 차도혁 후보는 그저 순수하게 사랑을 지키고 싶어서 저와 계약까지 하게 된 것이니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차 회장의 등장으로 장내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다.
“프로젝트도 성공했겠다, 사적인 문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나?”
“사랑에 눈이 멀면 잠깐 실수할 수도 있지. 결론적으로 아무 문제도 없는 거잖아.”
곳곳에서 도혁을 옹호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혁은 뒤통수를 제대로 후려 맞은 기분이었다.
‘미치겠네! 그럼 그동안 할아버지가 일부러 아픈 척했다는 거야?’
차 회장이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진혁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진혁아, 이제 그만하자. 욕심이 과하면 화를 입는 법이야.”
진혁은 울컥 화가 치밀어 차 회장의 손을 뿌리쳤다.
“역시 끝까지 도혁이 형 편만 드시는군요. 할아버지가 이러셔도 제 마음은 바뀌지 않아요!”
“진혁아!”
차 회장의 안타까운 외침을 뒤로하고 진혁이 목소리를 높였다.
“주주 여러분, 냉정하게 판단하셔야 합니다. 장차 대산 그룹을 이끌어야 할 후계자입니다. 그 자리에 한낱 여자 때문에 대산그룹을 저버리려 했던 사람을 앉힌다는 게 말이 됩니까? 제가 후계자가 되면 대산 그룹을 위해 훌륭하게 이끌어온 아버지의 뒤를 이어 최선을 다해 일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차정환이 기다렸다는 듯이 주주들에게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저 차정환, 평생을 대산그룹만을 위해 이 한 몸 다 바쳐 헌신해왔습니다. 저를 믿어 주신다면, 제 아들 차진혁 후보가 후계자가 될 수 있도록 아낌없는 지지를 부탁드립니다.”
진혁도 차정환의 옆에 나란히 서서 허리를 숙였다.
휴-.
돌연 낮은 한숨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뒤이어 도혁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지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군요.”
도혁은 성준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성준이 노트북에 USB를 꽂았다.
곧장 대형 스크린에 문서 자료가 떠올랐다.
장내가 일순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여기저기서 장대비처럼 비난이 쏟아졌다.
그제야 문서를 확인한 차정환과 진혁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문서에는 그동안 차정환이 MF파트너스와 결탁해 대산F&G를 헐값에 넘기려 한 정황이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차정환의 비서였던 혜경이 만일에 대비해 몰래 숨겨두었던 자료였다.
“안혜경, 네년이 감히 내 뒤통수를 쳐?”
차정환이 뒷목을 잡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순간 진혁의 머릿속에 혜경이 했던 말이 또다시 떠올랐다.
「유감이네요.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면 끝났을 일인데…….」
‘그게 이걸 말하는 거였어?’
진혁은 눈을 부릅뜨며 이를 갈았다.
뒤늦게 뼈아픈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윤문식이 화가 단단히 난 표정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차 대표님, 대체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말문이 막힌 차정환 대신 진혁이 황급히 수습에 나섰다.
“윤 회장님, 죄송합니다. 이건 차도혁이 꾸민 모함입니다. 제가 다 밝혀낼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세정이와 저를 봐서라도 한 번만 믿어 주세요. 제가 다 수습하겠습니다.”
‘세정’의 이름이 나오자 윤문식은 잠시 주춤했다.
진혁이 다시 한번 윤문식을 붙잡으려던 그때였다.
윤문식과 세정의 휴대전화에 메시지 알림음이 동시에 울렸다.
메시지를 확인한 세정이 사시나무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진혁이 놀라 세정의 어깨를 붙들었다.
“세정아, 왜 그래?”
“차진혁, 너……!”
세정이 있는 힘껏 진혁의 뺨을 때렸다.
영문을 모른 채 얻어맞은 진혁이 벌게진 뺨을 감싸며 물었다.
“갑자기 왜 이래?”
“너, 내가 걸리면 뼈도 못 추리게 만든다고 했지!”
세정은 진혁의 눈앞에 휴대전화를 들이밀었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아이를 안고 있는 혜경의 사진과 친자소송에 관련된 문구가 적혀 있었다.
말도 안 돼.
믿기지 않은 사실에 충격을 받은 진혁은 다리에 힘이 풀렸다.
“두고 봐. 내가 평생 저주할 테니까!”
미친 듯이 분노를 쏟아낸 세정은 진혁을 거칠게 밀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진혁의 몸이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윤문식이 그 옆을 스쳐 지나가며 싸늘하게 말했다.
“이 수모, 언젠가 기필코 갚아줄 테니 기대해. 내가 빚지고는 못 사는 사람이거든.”
진혁은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무심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도혁과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폐부를 찢기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빌어먹을, 또 졌네.
* * *
주주총회 다음 날 아침.
대산그룹 전체 인트라넷에 공지사항 두 개가 업데이트되었다.
하나는 차정환 대표가 회사를 팔아넘기려 한 대역죄인이라는 오명을 쓴 채 대표이사직을 사임했다는 내용이었다.
다른 하나는 신규 사내이사로 차도혁이 선임되었다는 공고였다.
진혁의 사내이사 선임은 예상대로 형편없는 득표율을 얻어 부결되었다.
벌써부터 진혁이 해외 지사로 발령이 떨어질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한 마디로 좌천이었다.
어찌 됐든 이로써 도혁이 대산그룹을 이끌 후계자임이 그룹 전체에 공식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대산F&G, 특히 상품기획1팀이 발칵 뒤집힌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세상에! 팀장님이 대산그룹 후계자였다니…….”
박 과장이 입을 딱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규민은 의외로 담담하게 반응했다.
“혹시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했었어요. 차정환 대표님이랑 성도 같고 이목구비도 비슷하니까요.”
“맞네! 난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한 과장, 엄청 예리한데!”
감탄하던 박 과장의 눈에 고개를 푹 숙인 채 손톱만 매만지고 있는 나희가 들어왔다.
“어우, 강 대리는 표정이 왜 그래? 강 대리도 많이 놀랐나 봐?”
“네?”
“하얗게 질린 게 누가 보면 죄 지은 사람인 줄 알겠어.”
“제, 제가 뭘요!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제풀에 찔린 나희가 빽 소리를 질렀다.
재인이 깜짝 놀라 쳐다보자, 나희가 사색이 된 얼굴로 눈길을 피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뭘 그렇게 흥분해?”
“…….”
박 과장의 핀잔에도 나희는 입을 딱 다문 채 바닥에 붙은 껌처럼 납작해져 있었다.
‘지은 죄가 있으니 가슴이 조마조마하겠지.’
재인은 어제 성준으로부터 이미 인사과에 나희에 대한 지시가 내려갔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이다음 인사이동 때 먼 지방으로 발령이 날 예정이라고.
뚜렷한 증거는 없지만 나희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니까.
이제는 그저 나희가 안타깝기만 한 재인이었다.
“근데 서 주임은 팀장님이 후계자라는 거 알고 있었어?”
박 과장이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네.”
“하긴. 같이 사니 모르는 게 이상하지. 가만, 서 주임이 팀장님이랑 결혼하면…… 대표님 사모님이 되는 거네?”
“아, 뭐…….”
결혼이라는 말에 재인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그러자 박 과장이 심히 부담스러운 미소를 날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서 주임, 내가 예전부터 많이 아껴왔던 거 알지?”
“그럼요.”
재인은 활짝 웃어 보였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난 곧 그만둘 건데.
지난밤, 재인은 경건한 마음으로 사표를 썼다.
프로젝트도 잘 마무리됐고 주주총회도 무사히 끝이 났으니, 본격적으로 유학 준비에 매진할 차례였다.
‘드디어 내가 진짜 사표를 던지는구나!’
재인은 두 달 전, 도혁에게 사표를 던지려다 스파이로 몰렸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럼 스파이가 아니란 걸 증명해봐. 몸으로.」
「몸, 몸이라니요?」
「직접 몸 바쳐 다이어트 라인 프로젝트를 성공시켜보라고. 그러면 결백을 믿어주지.」
「팀장님, 저 좀 전에 사직서 냈거든요?」
「기한은 두 달 뒤, 주주총회가 끝날 때까지. 주주총회에서 프로젝트 성과를 발표해야 해. 일이 아주 바빠질 테니 각오해야 할 거야. 출퇴근 시간도 아까우니 우리 집에서 사는 걸로 하지.」
「저 그만두겠다니까요! 그리고, 제가 왜 팀장님 집에서 살아요?」
늘 도혁에게 주눅 들어 있었던 재인이었지만, 그때만큼은 너무 억울해서 이판사판으로 따지고 들었었다.
도혁이 어떻게든 재인을 붙잡으려고 억지를 쓴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평소에 두려운 존재였던 도혁에게 어떻게 그렇게 대들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했다.
사표는 정말 마법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게 확실하다.
“좋은 아침입니다!”
때마침 도혁이 사무실에 들어섰다.
근심 걱정이 단번에 해결된 까닭인지 오늘따라 도혁의 미모가 태양처럼 환하게 빛을 발했다.
박 과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이사님, 오셨습니까!”
도혁이 팀원들을 둘러보며 빙긋 웃었다.
“그동안 본의 아니게 숨겨서 죄송합니다. 여러분 덕분에 무사히 경영 수업을 끝마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이사가 되신 것 정말 축하드립니다.”
박 과장을 시작으로 축하 인사가 이어졌다.
도혁이 감사 인사를 건네며 덧붙였다.
“곧 새 팀장을 뽑을 겁니다. 전 인수인계가 끝나는 대로 본사로 출근할 예정이고요. 그때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도혁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팀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때가 왔다.
재인은 서랍 속에 넣어둔 사표를 들고 팀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팀장님, 아니 이사님, 지금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응. 뭔데?”
그새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던 도혁이 손을 멈췄다.
그의 눈에는 이미 하트가 한가득 떠 있었다.
재인은 도혁의 책상 위에 살며시 사표를 올려놓았다.
“이게 뭐야?”
“사표요.”
도혁의 눈이 커졌다.
“벌써 관두려고? 유학 갈 때까지 아직 시간 좀 있지 않아?”
“사람 뽑고 이래저래 인수인계하면 금세 2월 중순 넘어가잖아요. 그래서 미리 말씀드리는 거예요.”
“흐음. 그래도 서재인 씨가 대산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뭔가 허전한데…….”
도혁이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 참, 누가 보면 다신 못 보는 사이인 줄 알겠네.
“유학 가기 전까지 매일 집에서 보잖아요. 팀장님, 아니 이사님도 곧 본사로 출근하시니까 어차피 일할 때 못 보는 건 마찬가지고요.”
“서재인 씨, 편하게 불러.”
도혁이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그냥 ‘팀장님’으로 부르라고. 그게 입에 밴 것 같은데.”
“그래도 이사님인데 어떻게 그래요. 다른 사람들 눈도 있고…….”
“그럼 둘만 있을 때라도 팀장님이라고 해. 아니면…….”
“아니면?”
어느새 재인의 옆에 바짝 다가온 도혁이 그윽한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오빠’라고 불러도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