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2화. 결전의 주주총회 (123/129)


122화. 결전의 주주총회
2023.08.01.



‘안혜경?’

진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네, 갑자기 왜 그러나?”

윤문식이 깜짝 놀라 물었다.

세정도 의아한 눈빛으로 진혁을 쳐다봤다.


“아, 업무를 놓친 게 생각나서요. 잠시 통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진혁아, 곧 주주총회가 시작될 텐데, 아주 급한 일이 아니면 나중에 해라.”

차정환이 못마땅한 얼굴로 만류했다.

하지만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자니, 영 찜찜함이 가시지 않는 진혁이었다.

지난번 만났을 때 혜경이 했던 말이 자꾸만 마음에 걸려서.


「유감이네요.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면 끝났을 일인데…….」

‘안 되겠다. 확인해봐야겠어.’

진혁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라서요. 금방 끝내고 돌아오겠습니다.”

말을 마친 진혁은 서둘러 밖으로 나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로비에 있는 카페에 조금 전 봤던 하얀 코트를 입은 혜경의 옆모습이 보였다.

다급히 카페로 달려간 진혁은 그녀의 팔을 잡아끌며 다그쳤다.


“안혜경,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네?”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이 주먹만 해진 여자는, 혜경이 아니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여자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아는 사람이랑 닮아서 잠시 착각했네요.”

“됐어요!”

때마침 커피가 나오자 여자는 불쾌한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허. 허허.

진혁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정신 차려, 차진혁! 괜한 망상 집어치우고 후계자가 되는 것에만 신경 써. 이제 곧 대산그룹이 이 손안에 들어온다 이거야.’

주먹을 불끈 쥔 진혁은 힘찬 걸음걸이로 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그 뒷모습을 지켜보는 싸늘한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

* * *

그 시각, 한발 늦게 주주총회장에 도착한 도혁은 반대편에 앉아 있는 차정환과 윤문식을 주시하고 있었다.

조금 전 도혁이 예의상 그들에게 인사를 하자, 예상했던 대로 냉담한 반응이 돌아왔다.

세정은 아예 도혁을 무시하며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렸다.

예상했던 반응이라 놀랍지도 않았다.

그때, 진혁이 자리로 돌아오자 윤문식과 세정이 보란 듯이 정답게 이야기를 건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막판이라고 아예 대놓고 손잡은 티를 내시는군.’

도혁의 머리가 더욱 차가워졌다.

공격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춰둔 그였지만, 결과는 실제로 열어 봐야 알 수 있기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도혁이 머릿속을 차분하게 정리하고 있는데, 뒤쪽에서 힘찬 응원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다 잘될 거야! 힘내!”

도혁이 고개를 돌리자 뒷줄에 앉아 있는 연지가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 옆에 앉은 재인도 기도하듯 손을 모아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스러운 둘의 모습에 도혁은 긴장이 탁 풀어졌다.


“걱정 마. 힘은 서재인 씨 덕분에 가득 충전했거든.”

“충전?”

연지가 눈알을 굴리다 다 간파했다는 눈빛으로 재인을 쳐다봤다.

재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저기, 그게…… 내가 팀장님 힘내시라고 아침상을 거하게 차려드렸거든.”

몇 입 안 먹었지만.

재인은 짓궂게 웃고 있는 도혁에게 찌릿 눈을 흘겼다.

꼭 그렇게 티를 내셔야겠어요?

그마저도 너무 사랑스러워서 도혁은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확실히. 굉장한 아침상이긴 했지.”

 

.
.
.



‘정말 못 봐주겠네.’

도혁과 재인의 화기애애한 광경을 건너편에서 지켜보던 세정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오늘 세정은 아침부터 가슴이 마구 설렜다.

그녀에게 있어 오늘은 대산의 안주인이 되겠다는 꿈이 코앞까지 다가오는 중요한 날이었다.

그리고 감히 자신을 무시하며 거절한 차도혁에게 그동안 당한 수모를 되갚아 주는 날이기도 했다.

세정은 환하게 웃고 있는 도혁과 재인에게 조소를 보냈다.


‘그래, 많이 웃어둬. 곧 울고 싶어질 테니까.’

 

* * *

주주총회가 중반을 넘기고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다음으로 사내이사 후보 선임과 관련해 투표를 진행하겠습니다.”

사회자가 사인을 보내자 대형 스크린에 사내이사 후보인 도혁과 진혁의 사진이 나란히 나타났다.


“이번 사내이사 후보는 총 두 명으로 차도혁 후보와 차진혁 후보가 올라왔습니다. 후보에 대한 소개가 끝나면 간단한 질의응답을 거친 후 투표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사전 전자투표와 현장 전자투표의 결과를 합산해 과반수 이상의 찬성을 획득한 경우, 사내이사로 등재됩니다. 우선 차도혁 후보에 대한 투표를 먼저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차기 후계자를 결정짓는 엄숙한 분위기에 재인은 주먹 쥔 손에 땀이 났다.


“차인환 대표님의 장남이자 현재 대산F&G의 상품기획1팀 팀장을 맡아 경영 능력 검증을 마친 차도혁 후보는…….”

도혁의 약력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마친 사회자가 청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차도혁 사내이사 후보에 대한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질문 있으신 분은 손을 들어주시면 진행요원이 마이크를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진혁 측에서 미리 포섭해둔 대주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들었다.


“차도혁 후보가 대산F&G에서 뚜렷한 성과를 낸 게 없는 것 같은데 경영 능력을 검증받았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가장 큰 성과로 거론된 다이어트 간편식 신제품만 해도 발표회가 끝난 지 며칠이 지나도록 아직 마케팅조차 진행되지 않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신제품에 뭔가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날카로운 질문에 회장이 술렁였다.

도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질문 감사드립니다. 우선 신제품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점 명확히 말씀드립니다. 마케팅 관련해서는 회사 내부적인 문제로 예산 집행이 늦어져 계획했던 대로 진행될 수 없었습니다.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지난주에 열린 다이어트 간편식 프로젝트 발표회는 임원들과 소비자 평가단의 호평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사전에 마케팅팀과 협의도 끝난 상태여서 곧장 각종 매체를 통해 대대적인 광고가 나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차정환의 방해 공작으로 마케팅 예산 집행이 주주총회 뒤로 미뤄지면서 올스톱 된 상태였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도혁을 흠집 내려고 트집을 잡은 것이었다.

질문자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받아쳤다.


“그거야말로 기획 단계에서 준비가 미흡했다는 증거 아닙니까? 그리고 설사 제품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해도, 반응이 어떻게 나올지는 나중에 열어봐야 아는 거니 프로젝트가 성공했다고 단언할 수도 없지 않나요?”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제가 준비해온 자료가 있습니다. 잠깐 여기를 봐주시죠.”

도혁이 빙긋 웃으며 앞쪽을 가리켰다.

그의 사진과 약력이 걸려 있던 대형 스크린에 화면이 바뀌더니 영상이 흘러나왔다.

영상 속 매력적인 두 여성이 반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우리 다이어터들을 위해 특별히 다이어트 먹방을 준비해봤습니다! 이번에 대산F&G에서 다이어트 간편식 라인이 새롭게 출시되었는데요…….]

SNS 라이브 신제품을 소개하고 있었다. 화면이 바뀌면서 다른 SNS 방송 영상들이 잇따라 나왔다.

재인과 연지가 유명 인플루언서들을 일일이 접촉해 끈질기게 설득한 결과였다.


“어제저녁 각종 SNS 라이브 방송으로 신제품 홍보를 진행했습니다. 사전 예약도 함께 진행했는데,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 예상했던 수량보다 세 배 이상 주문이 쇄도했습니다.”

도혁의 말에 진혁이 발끈해서 끼어들었다.


“회사 마케팅팀이 버젓이 있는데 독단적으로 마케팅을 진행하다니 도가 지나친 거 아닙니까? 그리고 방송 비용은 대체 어디에서 나온 겁니까?”

“애초에 마케팅 예산에 SNS 홍보 비용이 잡혀 있습니다. 저희는 때마침 인플루언서들과 친분이 있어 나중에 지불하기로 협의를 한 것뿐입니다. 홍보는 빠를수록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젠장!

진혁은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때, 진혁 측과 손잡은 다른 대주주가 물었다.


“얼마 전에 차도혁 후보가 여직원과 불미스러운 관계라는 스캔들이 터진 걸로 알고 있는데, 도덕성이 걸린 문제이니 명확한 해명을 듣고 싶습니다.”

그 문제를 물고 늘어지리라 예상했던 바였다.

도혁은 청중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먼저 물의를 일으킨 점에 사과드립니다. 저를 모함하기 위한 악의적인 스캔들에 대해서는 이미 해명 글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서 다시 한번 명확히 말씀드리지만, 저와 여기 계신 서재인 씨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곧 결혼할 예정입니다.”

“팀장님!”

스캔들 얘기에 푹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재인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주주들의 시선이 일제히 재인에게 꽂혔다.

재인은 황급히 새빨개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차도혁, 공개적으로 서재인과의 관계를 밝히다니. 아주 제 무덤을 파는구나?’

진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이크를 잡았다.


“주주 여러분, 제가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잠깐 화면을 봐주시죠.”

진혁의 말이 끝나자 그의 비서가 준비해온 파일을 띄웠다.

차 회장과 도혁이 작성한 계약서를 스캔한 사진이 대형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도혁이 싸늘한 눈빛으로 진혁을 쳐다봤다.


‘나보고 후회할 거라고 협박하더니 꼴좋네.’

진혁이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보시는 화면은 지금 병상에 누워 계신 차대산 회장님과 저기 서 있는 차도혁 후보가 작성한 계약서입니다. 계약 조항으로 분명히 한 달 뒤에도 차 회장이 허락하지 않으면 서재인과 헤어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 위반할 시에는 후계자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다들 기가 막힌 표정으로 도혁을 쳐다봤다.

진혁이 말을 이었다.


“차대산 회장님은 분명 쓰러지시기 직전까지 서재인과 차도혁 후보의 교제를 반대했습니다. 공증까지 받은 계약서가 버젓이 있는데도 차도혁 후보는 차대산 회장님이 명확히 의사 표현을 할 수 없다는 점을 악용해 계약서를 무시하고 후계자를 내려놓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진혁의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술렁이기 시작했다.


“둘이 결혼할 거라고 하지 않았나? 그럼 대산그룹이 아니라 여자를 선택했다는 거야?”

“말도 안 돼! 그런데도 뻔뻔스럽게 후계자를 노리는 거야?”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정신이 나갔군.”

도혁이 궁지에 몰린 것을 보자 차정환과 윤문식, 세정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이걸로 진혁이 후계자가 되는 것은 확실시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디, 차도혁 표정이 얼마나 일그러졌을지 구경 한번 해볼까?’

진혁은 코웃음을 치며 도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진혁은 그대로 돌처럼 굳어버렸다.

도혁이 그를 쳐다보며 씩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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