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화. 난 지금 이게 필요해 (122/129)


121화. 난 지금 이게 필요해
2023.07.29.



 
갑작스러운 질문에 진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도혁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물었다.


“혹시 작은아버지도 오셨어? 그럼 인사드리러 가야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진혁이 황급히 도혁의 팔을 치우며 말했다.


“아니야. 오늘은 친구들이랑 왔어.”

“아, 그래?”

도혁은 무심히 거울 속 진혁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모든 것을 간파한 듯한 눈빛.

진혁은 도혁의 여유 넘치는 얼굴 표정에 바짝 긴장했다.


‘설마 윤 회장님과 세정이를 본 건 아니겠지?’

혹시라도 모를 상황을 대비해 진혁은 윤 회장과 세정을 만날 때는 꼭 예약자 명단에 도혁이 없는 걸 확인했다.

만났다는 사실도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게 직원들 입단속까지 철저하게 시켜뒀다.

들어올 때 매니저로부터 아무런 얘기도 듣지 못했으니 적어도 도혁은 그 이후에 왔다는 얘기였다.

고로 도혁이 윤 회장과 세정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냉정을 되찾은 진혁은 태연한 척 물었다.


“그러는 형은 누구랑 왔어?”

“나야, 물론 서재인 씨지.”

도혁의 입꼬리가 하늘 높이 치켜 올라갔다.

그 모습에 진혁은 단단히 배알이 꼴렸다.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 한 자신의 방해 공작이 보기 좋게 실패한 걸 비웃는 것 같아서.

갑자기 도혁이 무언가를 떠올린 듯 환하게 웃었다.


“아, 그러고 보니 진혁이 너한테 고맙다고 인사한다는 걸 깜박했네.”

“고맙다니?”

“너 서재인 씨한테 아주 큰 선물을 줬더라?”

‘서재인 부모를 건드린 게 나란 걸 알아챈 건가?’

진혁은 딱 잡아뗐다.


“난 할아버지 뜻에 따랐을 뿐이야.”

“할아버지 뜻이라…….”

나직이 읊조리던 도혁이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서재인 씨가 사라져서 왜 그런가 했는데, 뒤에 네가 있었을 줄이야. 암튼 덕분에 나와 서재인 씨 사이가 더욱 굳건해졌어. 고맙다.”

그거야 아주 잘 알고 있지.

강나희가 매일 짜증 나는 문자를 보내고 있으니까.

진혁은 짜증이 솟구쳐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형, 할아버지가 아직도 누워 계시는데 버젓이 그 여자랑 붙어 다니다니,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 형이 그 알량한 사랑 지키겠다고 자꾸 엇나가니까 할아버지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쓰러지신 거잖아!”

“진혁이 네가 그렇게 할아버지를 끔찍하게 생각하는지 미처 몰랐네?”

도혁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진혁은 제풀에 찔려 도혁을 노려봤다.

순간 도혁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서재인 씨 말로는 할아버지가 나와 작성한 계약서를 너한테 맡겼다고 하던데, 사실이야?”

‘약점이 될 수 있는 계약서가 내 손에 있으니 신경이 쓰이겠지.’

진혁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맞아. 할아버지가 본인 건강에 이상이 있을 걸 예감하셨는지, 나한테 계약서까지 맡기면서 그 여자를 떼어내 달라고 부탁하시더라. 형이 오죽 걱정되면 그러셨겠어?”

“그래서, 다 할아버지가 꾸민 일이니 넌 책임이 없다?”

“어.”

도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진혁은 더욱 뻔뻔스럽게 비아냥거렸다.


“할아버지랑 약속한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그 여자랑 만나고 있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정말 그 여자 때문에 대산그룹 후계자를 포기할 셈이야?”

“왜? 내가 포기했으면 좋겠어?”

“여자 하나 때문에 정신 못 차리는 게 한심해서 그렇지. 할아버지가 의식이 온전치 못하다고 막 나가려나 본데, 계약서가 내 손에 있다는 거 잊지 마.”

“협박인가?”

“멋대로 생각해.”

그 말을 끝으로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도혁과 진혁은 입을 굳게 다문 채 거울 속에 비친 서로의 눈을 집어삼킬 듯 노려봤다.

이윽고 도혁이 나직이 말했다.


“진혁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무슨 소리야?”

“뭘 할 생각이든, 이쯤에서 멈춰.”

“……!”

진혁은 흠칫 놀라 도혁을 쳐다봤다.

도혁도 고개를 돌려 진혁을 마주 봤다.

파바바박!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붙으며 시퍼런 불꽃이 튀었다.

진혁은 심중을 알 수 없는 도혁의 말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차도혁, 어디까지 눈치챈 거야?’

주주총회가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진혁이 서진물산과 손잡은 걸 도혁이 알았다고 해도 상황을 역전시키는 건 무리일 터.

이미 대주주들은 차정환과 윤문식이 포섭해뒀다.

도혁을 지지하는 차 회장도 힘을 못 쓰고, 그의 오른팔인 성준도 떠났다.

게다가 차 회장과 도혁이 쓴 계약서까지 진혁의 손에 있지 않은가.

누가 봐도 절대적으로 도혁에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냥 넘겨짚는 걸 거야. 알았다고 해도 이제 와서 혼자서 뭘 어쩌겠어?’

계산을 끝낸 진혁의 얼굴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떠올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모르겠는데? 좀 알아듣게 얘기해!”

“진혁아, 우리가 그렇게 살가운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사촌이니까 네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어이가 없네. 형이 언제부터 날 생각했다고?”

도혁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도 우리가 합심해서 대산을 잘 이끌어나가길 바라실 거야.”

“합심? 말은 듣기 좋네. 형이야말로 그렇게 할아버지 뜻에 따르고 싶으면, 그 여자랑 먼저 헤어지는 게 순서 아닌가?”

진혁이 비아냥거리는데도 도혁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만하자, 진혁아. 너 후회하게 될 거야.”

진혁은 제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도혁의 눈빛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밑도 끝도 없이 사람 겁주지 말고, 할 말 있으면 똑바로 해!”

“난 분명히 경고했다.”

“그딴 거 사양이야. 어떻게 살든 내 맘이니까 내 일에 신경 끄고 형이나 잘 살아.”

“이렇게 나올 줄 알았어. 그래도 말이야, 잘 생각해봐.”

한숨을 내쉰 도혁은 진혁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진혁을 엄습해왔다.

두려움을 떨쳐버리려는 듯 진혁이 신경질적으로 어깨를 털어내던 그때였다.

도혁이 문 앞에서 나가려다 말고 갑자기 뒤로 돌아섰다.


“참, 한 가지 더.”

“……?”

“다시는 서재인 씨를 ‘그 여자’라고 부르지 마. 다음번에도 미래의 형수님한테 버릇없이 굴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도혁은 싸늘한 경고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형수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끝까지 사람을 무시한다, 이거지? 차도혁, 어디 주주총회 때도 그럴 수 있나 두고 보자!’

진혁은 도혁이 사라진 문을 쳐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 * *

이른 아침, 재인과 도혁은 여느 때처럼 식탁에 마주 앉아 있었다.


“팀장님, 괜찮으세요?”

재인이 도혁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응.”

“정말…… 괜찮으신 거 맞죠?”

“응. 왜?”

“근데 표정이 왜 그러세요?”

아.

도혁은 그제야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있음을 자각했다.

재인이 다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많이 긴장되시죠? 날이 날이니만큼…….”

그랬다.

오늘은 바로, 도혁의 후계자 승계 여부를 결정짓는 주주총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결전을 앞두고 마음을 단단히 다잡은 그였지만, 무의식중에 신경이 곤두서는 것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

새벽에도 지난밤 늦게 잠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번쩍 눈이 뜨였다.

도혁은 걱정스레 쳐다보는 재인에게 의연한 척 활짝 웃어 보였다.


“긴장은 무슨. 괜찮아.”

“아닌 것 같은데요? 젓가락질도 영 시원찮고…….”

“아, 그건…….”

도혁은 복잡한 심경으로 식탁을 쳐다봤다.

식탁에는 평소 간단히 먹던 아침 식사가 아닌, 푸짐한 9첩 반상이 차려져 있었다.

중요한 날을 맞이한 도혁을 응원하기 위해 재인이 작정하고 준비한 아침상이었다.


“팀장님, 이런 날일수록 잘 드셔야 힘이 나는 법이에요. 어서 많이 드세요.”

“흐음.”

무척 감동적이긴 한데.

도혁은 선뜻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원래도 속이 불편해 먹지 않았던 아침 식사였다.

아침 식사를 거르면 큰일 나는 줄 아는 재인과 맞추느라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지만, 이건 좀 너무했다.

가뜩이나 긴장돼서 식욕이 사라진 마당에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아침상이라니.

도혁은 먹기도 전에 속이 더부룩해졌다.

그렇다고 그만 먹겠다고 하면?

정성껏 준비해 준 재인이 실망할 걸 생각하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안 되겠어요.”

갑자기 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도혁의 등 뒤에 섰다.

그러고는 다부진 그의 어깨를 있는 힘껏 주물렀다.


“팀장님, 주주총회가 그렇게 걱정되세요? 다 잘될 거니까 힘내세요!”

도혁의 표정이 심각한 원인이 아침상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재인이었다.

간지럽기만 한 손길에 도혁은 쿡쿡 웃음이 터졌다.

다음 순간, 그의 머릿속에 기막힌 아이디어가 번쩍 떠올랐다.


“서재인 씨, 마음은 고맙지만…….”

갑자기 도혁이 몸을 돌려 재인의 팔을 잡아당겼다.

어어!

재인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찰나, 도혁이 부드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 바람에 재인은 무방비 상태로 도혁에게 폭 안기고 말았다.


 


“……팀장님?”

재인이 얼떨떨한 눈으로 도혁을 쳐다봤다.


“힘을 내는 데는 어깨를 주무르는 것보다 이게 더 효과적일 것 같은데?”

도혁은 입꼬리를 올리며 스윽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닿기 1초 전.

재인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더듬더듬 말했다.


“이, 이미 추, 충분히 힘이 나신 것 같은데요?”

역시 재밌어.

도혁은 키스를 하려다 말고 피식 웃었다.


“아니야. 충전 다 하려면 아직 한참 남았어.”

“이, 이러다 지각하겠어요. 아직 식사도 못 하셨으면서. 아침을 든든히 드셔야…….”

“서재인 씨.”

“네?”

재인의 눈동자를 지그시 들여다보며 도혁이 속삭였다.


“난 지금 이게 필요해. 밥이 아니라.”

그 순간 재인은 제 심장이 쿵, 내려앉는 소리를 들었다.


“팀장님…….”

재인은 설렘을 주체할 수 없어 도혁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그러고는 정말 그에게 기운을 불어넣기라도 하려는 듯 뜨겁게 입술을 부딪쳤다.

입안 가득 밀려드는 보드라운 감촉에 도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순간적으로 주춤했던 도혁은 곧 황홀경에 빠져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바쁜 아침,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을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허둥지둥 출근하느라 아침 먹을 새가 없어질 때까지.

* * *

주주총회장은 평소보다 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북적거렸다.

대산의 후계자를 결정짓는 중요한 날인 까닭일까.

주주들의 참석률이 유난히 높았다.

일찌감치 주주총회장에 도착한 진혁은 맨 앞줄에 아버지 차정환 대표와 2대 주주인 윤문식 회장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윤문식의 옆에는 우아하게 차려입은 세정이 앉아 있었다.

진혁의 얼굴이 굳어 있자, 윤문식이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긴장할 것 없네. 자네가 후계자가 되는 건 따 놓은 당상이니까.”

“감사합니다. 다 회장님이 밀어주신 덕분입니다.”

진혁은 윤 회장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이를 갈며 오늘만을 기다려온 진혁이었다.

차도혁을 밟고 올라서서 그 잘난 얼굴이 일그러지는 꼴을 보기 위해.

오늘의 주요 안건은 도혁과 진혁의 사내이사 선임에 관한 것이었다.

대표이사는 반드시 이사 중에서 선출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고로 후계자 수순을 밟기 위해서는 오늘 과반수 이상의 득표율을 획득해 사내이사로 선임되어야만 했다.

이를 대비해 윤 회장을 등에 업고 다른 대주주들까지 포섭해온 진혁이었다.

차 회장이 쓰러져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에 다른 주주들까지 등을 돌렸으니, 이대로라면 도혁의 이사 선임은 부결될 게 뻔했다.


‘차도혁, 넌 오늘로서 끝장이야.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개망신 당하면 꼴좋겠군!’

진혁이 회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둘러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던 그때였다.

멀리 있는 출입구 밖에 하얀 코트를 입은 낯익은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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