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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역시 사랑의 힘인가? (121/129)


120화. 역시 사랑의 힘인가?
2023.07.25.



 
역시 재벌가 인간들은 다 똑같아.

혜경은 울컥 화가 치밀었다.


「네까짓 게 감히 진혁이를 넘봐?」

진혁과 만난 것을 눈치챈 진혁의 엄마 김혜선이 돈 봉투를 던지며 고상한 말투로 막말을 퍼붓던 게 생각났다.

그때 받은 모멸감이 아직도 수시로 튀어나와 혜경을 괴롭히고 있었다.


“회장님은 좀 다르실 줄 알았는데 마찬가지네요. 제가 소송을 안 하면 얼마를 주실 생각인데요?”

“안혜경 씨, 오해하지 말아요. 난 안혜경 씨와 유준이를 돈으로 덮으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그게 아니면 뭔데요?”

차 회장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화가 난 마음은 잘 알겠어요. 내가 진혁이 대신 진심으로 사과하리다. 하지만, 설사 소송을 해서 이긴다고 해도 이미 벌어진 일은 어찌할 수 없는 법이오.”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거예요?”

혜경의 말투에 날이 서 있었다.

차 회장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현실을 받아들인 뒤에 안혜경 씨의 삶을 새롭게 시작했으면 해서 하는 말이오. 내 힘닿는 대로 도울 테니 걱정 말아요. 그리고 뻔한 얘기지만, 자신의 존재는 법으로 인정받고 말고 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이미 온전한 것 아니겠소?”

“…….”

고개 숙인 혜경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툭. 툭.

결국 떨어지고 만 눈물방울이 그녀의 손등을 축축하게 적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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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전 솔직히 좀 놀랐어요.”

성준과 혜경을 배웅하고 돌아온 차주영이 차 회장에게 말했다.


“뭘 말이냐?”

“전 아버지가 노발대발하실 줄 알았거든요. 서재인 씨 떼어놓으려고 했을 때도 일부러 심하게 구셨다면서요.”

진혁의 발목을 잡을 게 뻔한 혜경에게 자상하게 대해 주는 차 회장의 모습이 낯설었다.

차주영의 말에 차 회장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한 번 죽었다 살아났더니 뭐가 진짜 중요한지 알겠더구나.”

“하긴, 그러실 만도 하죠.”

“이게 다 서재인 씨 덕분이야.”

차주영의 얼굴에 물음표가 떴다.


“서재인 씨가 뭘 어떻게 했길래요?”

“뭐니 뭐니 해도 사람 됨됨이가 가장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해줬거든. 딱 보니 안혜경 씨도 본디 심성이 바르고 고운 사람 같더구나.”

“저도 그래 보이긴 했어요. 그나저나 아기가 진혁이랑 정말 많이 닮았더라고요.”

‘아기’라는 말에 차 회장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아이도 우리 핏줄이니 안혜경 씨한테 약속한 대로 성인이 될 때까지 잘 클 수 있게 돌봐줘야지.”

“당연히 그러는 게 도리죠. 잘 생각하신 거예요. 근데 그런다고 안혜경 씨가 정말 소송을 포기할까요?”

“글쎄다.”

“꼭 소송이 아니더라도 진혁이 앞길을 위협할 수 있을 텐데요?”

“그렇게 돼도 과보를 지은 거니 어쩔 수 없지. 내 할 얘기는 잘 전했으니 나머지는 안혜경 씨의 선택에 맞기자꾸나.”

“네, 아버지.”

차주영은 의식을 되찾은 차 회장이 전보다 더 큰 존재로 느껴졌다.

* * *



“서 주임님, 이것 좀 드세요.”

연지가 슬쩍 책상 위에 무언가 올려놨다.

피로회복제와 마카롱 세 개가 든 작은 상자였다.


“아, 고마워. 역시 연지 씨밖에 없네.”

“피곤할 땐 약발과 단 게 최고예요! 요새 계속 야근에 주말 근무에, 힘드시잖아요.”

그렇긴 하지.

재인이 다시 도혁의 집에 들어온 날로부터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주주총회 전 있을 프로젝트 발표회가 얼마 남지 않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낸 재인이었다.

프로젝트 팀원인 규민과 연지는 물론, 다른 프로젝트를 맡은 팀원들까지 합심해서 고생하고 있었다.

건너편에서 서류에 코를 박고 있는 규민의 훈훈한 얼굴에도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프로젝트 마무리가 코앞이라 어쩔 수 없잖아. 나 혼자 일하는 것도 아니고 힘든 건 다들 똑같지, 뭐.”

“딱 한 사람만 빼고요.”

“응?”

연지가 눈짓으로 맞은편에서 손톱을 다듬고 있는 나희를 가리켰다.

재인은 연지의 귓가에 속삭였다.


“방해 공작 안 하는 게 어디야. 일부러 자기만 별일 안 시키고 있는 거,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겠지?”

“인터넷 쇼핑하느라 바쁘신 분이 그럴 정신이 어디 있겠어요.”

“그렇겠지? 다행이야.”

“그래도 끝까지 경계를 늦추면 안 돼요. 지난번에도 뒤통수 맞았잖아요.”

“그건 그래.”

재인은 나희가 자신을 질투해서 진혁에게 협조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따져 물을 수도 없는 상황, 일단 프로젝트 마무리에만 집중하기로 한 재인이었다.


“아휴, 미운 놈한테도 떡은 줘야겠죠?”

연지가 쇼핑백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팀원들 책상 위에 피로회복제와 마카롱 세트를 하나씩 돌리기 시작했다.

박 과장이 휘둥그런 눈으로 물었다.


“연지 씨가 웬일이야? 로또라도 된 거야?”

“로또가 됐으면 사표를 드렸죠. 아침에 팀장님이 카드 주셨어요. 이따 점심까지 맛있는 거 먹으라면서요.”

“팀장님이 그러셨단 말이야?”

놀랍게도 박 과장의 얼굴에서 피곤한 기색이 싹 사라졌다.


“요즘 팀장님, 정말 예전이랑 완전 딴판으로 바뀌셨단 말이야. 이거, 이거 아무래도…….”

“불치병은 절대 아닙니다!”

재인이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뒷북이라도 확실하게 정정해두고 싶은 재인이었다.

지난 과오가 생각났는지 박 과장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사랑의 힘’인 것 같다고.”

“네?”

박 과장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낯 뜨거운 단어가 나오자 재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서 주임 만나서 바뀌신 거잖아. 생각할수록 불가사의하긴 하지만. 암튼 서 주임, 다시 봤어.”

박 과장은 피로회복제를 시원하게 원샷 했다.

미묘하게 칭찬과 엿먹임의 경계에 걸쳐 있는 말을 남긴 채.

그냥 칭찬인 걸로.

쓸데없는 데 낭비할 에너지가 없었다.

재인은 아직도 화끈거리는 볼을 감싸며 팀장실을 곁눈질했다.

도혁도 줄곧 일에 치이는 상황이었다.

그 덕분에 같은 집에 살아도 아침과 밤에 스치듯 얼굴을 보는 게 전부인 요즘.

도혁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재인에게 ‘몰입’이란 게 뭔지 증명해 보이고 있었다.

그래도 12시가 되면 신데렐라처럼 불만 가득한 얼굴로 순순히 제 방으로 돌아가는 도혁이었다.

고분고분한 그 뒷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재인은 한 마리의 맹수 같은 도혁이 제 말 한 마디에 온순해지는 게 자신이 생각해도 신기했다.


‘역시, 사랑의 힘인가?’

자꾸만 히죽히죽 웃음이 나왔다.


“서 주임님, 지금 팀장님 생각하고 계시죠?”

“어? 뭐라고?”

언제 왔는지 연지가 옆자리에 앉아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너무 좋아하시는 건 같아서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재인은 벌렁거리는 심장을 달래며 제 볼을 툭툭 쳤다.

이럴 때가 아니야.

집중! 집중!


‘귀여워 죽겠네.’

팀장실 블라인드 사이로 재인을 바라보던 도혁의 입가에는 헤벌쭉 미소가 걸려 있었다.

서재인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깜짝 놀라는 것도, 당황해하는 것도, 발끈하는 것도…… 암튼 죄다 귀엽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재인을 일주일째 안지 못한 도혁은 정말 귓가에 목탁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조금만 참자. 프로젝트 발표도, 주주총회도 반드시 잘 끝낼 거야. 그러고 나서는……?’

 

 
순간 도혁은 기적처럼 피로가 싹 가시고 불끈 힘이 솟았다.

조금 전 마신 피로회복제 때문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 * *

그날 저녁.

진혁은 아버지 차정환과 윤문식 회장, 세정과 함께 언제나처럼 DS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윤문식이 스테이크를 한입 베어 물며 입을 열었다.


“차 대표님, 이제 주주총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막판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지요?”

“협조해주신 덕분에 순조롭습니다. 다른 대주주들도 협력을 약속했고요. 지금 모인 지분이면 진혁이를 후계자로 올리고도 남을 겁니다.”

차정환의 말에 윤문식이 넌지시 말했다.


“다행입니다. 후계자가 진혁 군으로 결정되면 우리 세정이랑 결혼하는 것도 서둘러야겠네요.”

“아무렴요. 다음날부터 당장 진행 시켜야지요. 식은 3월쯤이 어떻겠습니까? 저희 쪽 호텔 예식장에서 다 맡아서 할 테니 아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이런, 이런. 사돈이 호텔을 가지고 있으니 이점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앞으로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차정환과 윤문식은 마주 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안혜경이 식장에 쳐들어오는 건 아니겠지?’

진혁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소름이 쫙 돋았다.

세정과의 결혼식 얘기를 하는데 갑자기 왜 안혜경이 떠오른 건지.

일주일 전 뜬금없이 나타난 혜경을 매몰차게 쳐낸 진혁이었다.

그 뒤로 아무 일 없이 잠잠하기만 한데도 왠지 모를 찜찜함이 가시지 않았다.


「유감이네요.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면 끝났을 일인데…….」

그럼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건가?

진혁은 혜경이 씁쓸한 표정으로 했던 그 말이 유달리 마음에 걸렸다.


“자네는 세정이랑 결혼하는 게 기쁘지 않나?”

“네?”

윤문식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진혁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진혁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기쁘죠! 제가 세정이를 얼마나 오래 마음에 품어왔는데요. 세정이랑 결혼한다는 게 꿈만 같아서 그런 겁니다.”

“그래? 자네가 봐도 내 딸이 참 괜찮긴 하지? 앞으로 잘 부탁하네.”

“그럼요. 제가 평생 공주님으로 모실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옆에 있던 세정이 진혁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어머님 아버님이 들으면 서운해하시겠어요.”

“괜찮아요, 세정 양. 세정 양 같은 아내라면 평생 떠받들고 살아도 모자라요.”

호탕하게 웃는 차정환의 팔을 붙들며 세정이 말했다.


“어머, 감사합니다. 아버님, 제가 더 잘할게요.”

“그래요, 그래.”

Rrrrrrr. Rrrrrrr.

돌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고 진혁의 전화벨이 울렸다.

일제히 시선이 쏠리자 진혁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잠시 통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안혜경의 일이 신경 쓰인 데다, 윤문식 회장의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 답답하던 차에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으로 나간 진혁은 비서와 통화를 마치고 화장실로 향했다.

손을 씻고 거울을 쳐다보며 호흡을 골랐다.


‘안혜경 따위 별것 아니야. 제깟 게 뭘 할 수 있겠어? 신경 쓰지 말자. 이제 곧 대산의 후계자가 될 건데 이 정도 배포 가지고 되겠어?’

진혁은 일부러 거울을 보며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았다.


“뭐 좋은 일이라도 있나 봐?”

뒤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혁은 흠칫 놀라 거울을 쳐다봤다.

다음 순간, 거울 한가운데에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풍기는 도혁의 얼굴이 나타났다.


“도혁이 형?”

“여기서 보는 건 오랜만이네?”

도혁은 씩 웃으며 진혁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진혁은 저도 모르게 온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도혁이 넌지시 물었다.


“진혁이 넌 누구랑 같이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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