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그래서,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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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그래서,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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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그래서, 싫어?
2023.07.22.
쿵쾅쿵쾅.
재인의 심장이 견디기 힘들 만큼 세차게 뛰었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닌데 이 상황이 왜 이렇게 낯 뜨겁기만 한 건지.
누군가 작정하고 간지럼을 태우기라도 한 듯 온몸이 간질거렸다.
“그, 그거…… 직권남용 아니에요?”
재인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그러자 도혁이 재인의 귓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래서, 싫어?”
솜사탕처럼 달콤한 목소리가 그녀의 온몸에 사르르 녹아들었다.
재인은 떨리는 손으로 귓불을 매만졌다.
도혁이 대답을 기다리는 듯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더 촉촉이 젖어 있는 그의 눈빛과 준수한 이목구비가 재인의 가슴을 미치게 설레게 했다.
일렁이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해, 재인은 도혁의 셔츠 깃을 붙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그럴 줄 알았어.”
말이 끝나자마자 도혁은 재인을 번쩍 들어 제 무릎 위에 앉혔다.
앗, 하는 사이에 도혁과 마주 보게 된 재인은 너무 부끄러워 그의 어깨를 밀쳤다.
“아! 저기, 잠깐만…….”
“서재인, 그대로 얼음!”
“……!”
거부하기 힘든 목소리에 재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지난번 팀장실에서 덤벼들던 기세는 어디 갔지?”
“그건…… 약이 올라서 그런 거죠.”
“잔뜩 열을 올려놓고 날 혼자 두고 가다니, 정말 곤란했단 말이야.”
내가 생각해도 너무하긴 했다.
재인은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튼 앞으로 자주 약을 올려야겠어.”
“네?”
“그때의 서재인 씨, 아주 마음에 들었거든.”
도혁은 씩 웃으며 재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입술이 스치고 지나간 곳에 짙은 여운이 남았다.
재인은 멍하니 도혁을 바라보며 다음을 기다렸다.
하지만, 도혁은 웬일인지 더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지그시 재인의 눈동자를 들여다볼 뿐이었다.
그의 올곧은 시선에 재인의 안이 점점 뜨거워졌다.
고요한 가운데 두 사람의 호흡만이 거칠게 뒤엉켰다.
결국 재인은 더는 견디지 못하고 속을 내비치고 말았다.
“이게…… 다예요?”
“왜? 아쉬워?”
도혁이 컬컬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귀까지 새빨개진 재인은 입술을 감쳐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혁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살갗을 스치는 그의 손끝이 데일 듯 뜨거웠다.
재인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도혁을 쳐다봤다.
도혁은 기다렸다는 듯이 재인을 끌어당겨 선홍빛 입술을 힘껏 머금었다.
입안 가득 뜨거운 열기가 휘몰아친 순간, 재인은 온 세상이 멈춘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 가운데 오로지 도혁의 손길만이 하나하나 생생하게 느껴졌다.
도혁은 넋이 나간 채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피조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아.
가쁜 숨을 내쉬던 도혁은 단숨에 와이셔츠를 벗어 던졌다.
그러고는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재인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강렬한 자극에 그녀의 온몸이 파르르 전율했다.
다음 순간, 민망함을 느낄 새도 없이 재인의 몸이 털썩, 소파 위에 눕혀졌다.
“아, 잠깐만!”
재인의 다급한 외침은 맥없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도혁은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듯 거침없이 영역을 넓혀갔다.
뜨거운 손길이 그녀의 등 뒤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의 다부진 팔에 안기자 재인은 저도 모르게 몸이 활처럼 휘었다.
미처 막지 못한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제 안에 파고든 뜨거운 열기에 재인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맞닿은 살갗의 온기가 너무나도 따뜻해서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았을 뿐.
놓치면 그 온기가 사라질까, 재인은 있는 힘껏 도혁에게 매달렸다.
꼭 감은 그녀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 재인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도혁을 흔들어 깨웠다.
“팀장님, 일어나세요.”
“으음…….”
“출근하셔야죠. 이러다 지각하겠어요!”
“출근?”
그제야 도혁의 눈꺼풀이 간신히 열렸다.
눈앞에는 출근 준비를 마친 재인이 서 있었다.
“지금 몇 시야?”
“7시 반이요.”
도혁은 다시 눈을 감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뭐야, 반차 쓴다고 했잖아. 아직 3시간도 못 잤단 말이야.”
그러게, 누가 그렇게 늦게까지 무리하래요!
덩달아 수면 부족에 시달린 탓에 재인은 오늘도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와 있었다.
“지금 반차 같은 농담할 때가 아니에요.”
재인은 콧방귀를 뀌며 이불을 홱 걷어치웠다.
“아우, 추워! 농담 아니니까 이불 다시 줘.”
“안 돼요!”
도혁이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체 왜?”
“생각해 보세요. 생전 그런 적 없던 두 사람이, 나란히, 그것도 당일 아침에 반차를 내면 팀원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재인이 다그치듯 묻자 도혁이 눈동자를 굴렸다.
“음…… 급한 일이 있나 보다?”
“퍽이나요. 다들 밤새 둘이 어쩌고저쩌고하느라 피곤한가 보다, 할걸요?”
“알았어. 근데 서재인 씨는 안 피곤해?”
그걸 말이라고.
다크서클 감추느라 파운데이션을 두 겹이나 발랐습니다만.
어떻게 시작만 했다 하면 매번 끝장을 보려고 하십니까.
당장 오늘 밤이 두려운 재인이었다.
재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팀장님, 주주총회가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그때까지 프로젝트 무사히 마무리하려면 매일 야근해도 모자라요.”
“그렇겠지. 근데 갑자기 그 얘기는 왜……?”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도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재인은 그에게 즉각 폭탄을 투하했다.
“팀장님, 주주총회 끝날 때까지 밤 12시 이후로는 제 반경 1미터 이내로 접근 금지예요. 당연히 제 방문도 잠겨 있을 거예요.”
“뭐? 그런 게 어디 있어?”
도혁이 기겁하며 침대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사이 재인은 잽싸게 문밖으로 나가 고개만 빼꼼 들이밀며 말했다.
“여기 있어요. 제 숙면은 소중하거든요. 암튼 그런 줄 아세요.”
“안 돼! 서재인 씨, 잠깐만!”
재인은 도혁의 안타까운 외침을 매정하게 튕겨내고 쾅, 문을 닫았다.
* * *
그날 늦은 오후, 차 회장은 차주영과 함께 성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혜경이 협조하는 조건으로 친자확인소송을 하고 싶어 한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차 회장이 성준에게 혜경을 데려오라고 한 것이었다.
똑똑.
병실 밖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경호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진혁 도련님 오셨습니다.”
순간 차 회장과 차주영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차주영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차 회장이 VIP 병실로 옮긴 날 잠깐 들른 뒤로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진혁이 예고도 없이 찾아오다니.
차정환과 진혁을 방심하게 하려고 차 회장은 주주총회 때까지 의식이 완전히 돌아온 것을 비밀로 하고 있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 병원에 입단속을 해두고 문밖에 경호원까지 세워둔 것이었다.
차주영이 눈짓을 하자 차 회장이 황급히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제야 차주영이 문을 열고 진혁을 맞이했다.
“어머, 진혁이 왔구나? 갑자기 어쩐 일이야?”
“할아버지는 어떠신가 걱정이 돼서요. 고모가 고생이 많으세요.”
“아니야. 당연한 건데.”
진혁은 차주영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할아버지 상태는 좀 어떠세요?”
“의식은 돌아왔는데 눈만 겨우 깜박이는 수준이지, 뭐.”
“말씀은…… 할 수 있으세요?”
“아니. 전혀 못 하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찔리는 게 많아서 진혁은 차 회장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말에 간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늘도 차 회장의 동태를 살피러 온 것인데 죽은 듯 누워 있는 차 회장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할아버지, 죄송하지만 주주총회 때까지만 그렇게 누워 계세요. 괜히 할아버지가 도혁이 형을 편들고 나서면 곤란하니까요.’
아직 차 회장이 작성했다는 유언장을 찾지 못한 게 줄곧 마음에 걸린 진혁이었다.
어떤 내용인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차 회장의 유언장으로 판이 뒤집힐 위험이 남아 있었다.
재인과 도혁을 헤어지게 만들어 도혁을 흔들려고 한 계획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그렇다면 결정적일 때 차 회장이 도혁과 쓴 계약서를 들이밀며 도혁을 압박할 생각이었다.
계약서를 마음대로 이용하기 위해서도 차 회장이 깨어나지 않는 편이 유리했다.
“그래도 의식이 돌아오신 게 어디에요. 주치의는 뭐래요?”
“저기, 진혁아. 일은 바쁘지 않니? 그만 회사로 들어가 봐야지?”
차주영은 초조한 눈빛으로 시계를 쳐다보며 물었다.
곧 성준이 안혜경을 데리고 올 시간이었다.
혹시라도 두 사람과 진혁이 마주치게 될까 봐 차주영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빨리 가줬으면 하는 바람과 달리, 진혁은 여유롭게 테이블에 앉았다.
“괜찮아요. 고모 답답하실 텐데 잠깐이라도 말벗이 되어드려야죠. 오랜만에 같이 차나 한잔하실래요?”
“답답하긴. 바쁠 텐데 난 괜찮으니 어서 가봐.”
“고모, 왜 그러세요? 일부러 쫓아내려고 하는 것처럼?”
“응?”
정곡을 찔린 차주영이 말문이 막힌 그때.
때마침 진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세정에게서 온 전화였다.
“어. 무슨 일이야?”
―아버지가 지금 좀 보자고 하시는데 괜찮아? 끝나고 저녁도 같이 먹자고 하셨어.
“당연하지. 지금 바로 갈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혁은 저도 모르게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식사 시간 내내 윤문식 회장이 일의 진척 상황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을 게 뻔했다.
차주영이 놀라서 물었다.
“진혁아, 무슨 일이길래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고모, 저 급한 일이 터져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래, 어서 가봐.”
“그럼, 다음에 아버지랑 또 들를게요.”
말을 마친 진혁은 쫓기듯 병실 밖으로 나갔다.
차주영은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 나가 진혁을 배웅했다.
진혁이 탄 엘리베이터가 내려가자마자 간발의 차로 바로 옆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나와 계셨습니까?”
성준이 차주영을 발견하고 놀란 눈으로 물었다.
하마터면 들킬 뻔했던 상황, 차주영은 생각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했다.
“방금 진혁이가 왔다 갔거든요.”
“이런. 정말 놀라셨겠군요.”
“정말 간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분이 안혜경 씨인가요?”
차주영은 성준을 뒤따라 내린 초췌하지만, 미모를 숨길 수 없는 여자를 바라봤다.
그녀의 품에는 아기가 안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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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으로부터 그간의 모든 일을 전해 들은 차 회장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차 회장이 말이 없자 안혜경이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회장님, 유전자 검사를 해보시면 제 말을 믿으실 수 있을 거예요.”
“보나 마나 뻔하지.”
“네?”
혜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나 마나 진혁이 아들이 확실하다는 말이에요. 딱 봐도 어렸을 때 진혁이 얼굴이랑 똑같으니까.”
“아, 네…….”
“아이 이름이 뭐라고 했죠?”
“유준이요.”
“한번 안아봐도 되겠소?”
“그, 그럼요.”
혜경은 얼떨떨한 얼굴로 차 회장의 품에 아기를 안겨주었다.
곤히 잠든 아기가 반기듯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천사 같은 모습에 차 회장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안혜경 씨, 사정은 잘 알겠어요. 일단 제대로 된 살 집부터 정합시다. 마침, 알맞은 집이 있으니 거기에 원할 때까지 머무르도록 해요.”
진혁 때문에 재인을 내쫓을 때 급히 마련해둔 복층 오피스텔이 이렇게 주인을 찾을 줄이야.
차 회장은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모른다는 생각에 허탈한 웃음을 나왔다.
한참 동안 아기의 얼굴을 바라보던 차 회장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안혜경 씨, 친자확인소송이라는 거, 꼭 해야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