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이 집에 우리 둘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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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이 집에 우리 둘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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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이 집에 우리 둘뿐이야
2023.07.18.
“맞습니다. 저도 만나기 전에는 긴가민가했는데 직접 보니 너무 닮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고 보니 진혁 오빠랑 윤세정, 미국에서 같은 대학에 다녔어요.”
연지의 말에 성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께서 진혁 도련님과 윤세정 씨를 보셨다는 얘길 듣고 딱! 감이 왔습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진혁 도련님이 미국에서 다녔던 대학에 있는 친구한테 물어보니 윤세정 씨와 진혁 도련님을 알고 있더군요. 두 사람, 1년 전에 잠깐 사귀는 사이였다고 합니다.”
연지의 눈이 커졌다.
“그래서 닮은 사람을 만난 거예요?”
“그럴 가능성이 높지요. 진혁 도련님이 헤어지고 나서도 윤세정 씨한테 미련이 많이 남은 것 같았답니다.”
“세상에! 그랬으면서 진혁 오빠는 어떻게 도혁 오빠랑 윤세정이랑 혼담이 오가는데도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수가 있어요?”
“그 속은 진혁 도련님 본인만 알 수 있겠죠. 이것도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니까요.”
성준의 말이 끝났는데도 모두들 멍한 얼굴로 안혜경의 사진만 바라보고 있었다.
차주영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어휴, 진혁이 녀석, 그렇게 밖으로 나돌더니 결국 사고를 쳤네요.”
“주영아, 이미 벌어진 일에는 토를 다는 게 아니다. 잘 매듭지을 궁리를 해야지.”
차 회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냉철한 이성을 되찾은 상태였다.
성준이 진중하게 다시 말을 꺼냈다.
“이제 주주총회가 2주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는 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저쪽에서는 이번 주주총회 때 진혁 도련님을 후계자로 공식화하려고 할 겁니다.”
도혁은 이사 임명을 앞두고 있었다.
그동안 신분을 숨기고 경영 능력을 검증했으며, 그룹 전체에 후계자로서 공표될 예정이었다.
차정환과 진혁은 서진물산을 등에 업고 그 판을 뒤엎으려는 것이었다.
“2대 주주인 서진물산에 다른 대주주들까지 합세했으니 도혁 도련님의 입지가 위태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지금 서재인 씨와 진행 중인 다이어트 간편식 프로젝트가 실패한다면, 스캔들을 트집 삼아 도혁 도련님을 끌어내리려고 할 겁니다.”
성준의 말에 차 회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기 전에 어떻게든 막아야지. 어떻게 하는 게 좋겠나?”
“이제 상황이 명확해졌으니 지금부터 다 같이 대책을 강구해봐야지요. 그래서 바쁘신 줄 알면서도 오늘 모여달라 말씀드렸던 겁니다.”
도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별수 있나요. 지금 주어진 상황을 최대한 이용해볼 수밖에요.”
“쉽진 않겠지만 잘될 겁니다. 왠지 행운의 여신이 우리 쪽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성준은 도혁과 마주 보며 씩 입꼬리를 올렸다.
* * *
그 시각, 진혁은 어느 인적이 드문 카페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구석 자리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한 여자가 진혁을 보자 아는 체를 했다.
뜬금없이 진혁에게 만나자고 연락을 했던 안혜경이었다.
진혁은 혜경의 앞에 앉으며 다짜고짜 물었다.
“갑자기 사람을 불러내고, 무슨 일이야?”
“오랜만이에요.”
혜경은 딱 봐도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핏기 없는 얼굴이나 초라한 행색으로 보아 그동안의 삶이 녹녹하지 않았음이 느껴졌다.
그런데도 목소리와 눈빛만큼은 또렷하고 당당했다.
어쨌거나 진혁은 잊고 있었던 혜경의 출연이 달갑지 않았다.
“우리가 한가하게 안부나 물을 사이는 아는 것 같은데?”
“그렇긴 하죠.”
혜경이 찬바람이 쌩쌩 부는 진혁을 보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한때 제 앞에서 세상을 다 줄 것처럼 뜨거운 눈빛을 보내던 남자의 흔적은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고작 3개월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마음 둘 곳 없던 그녀에게는 더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혜경이 임신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진혁과 헤어진 뒤였다.
헤어졌다고는 하나, 흥미가 떨어진 진혁에게 일방적으로 내쳐진 것이었지만.
진혁에 대한 분노가 끓어오르는 와중에도 혜경은 자신을 탓했었다.
그의 화려한 여성편력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속수무책으로 넘어가 버린 자신의 나약함을.
임신 사실을 알릴까 생각해봤지만, 지우라고 할 게 뻔해서 포기했다.
그렇다고 아이를 지우는 건 차마 못할 짓이어서 망설임 끝에 도망치듯 회사를 관둔 것이었다.
“차진혁 씨는 아주 잘 지내신 건 같네요?”
“피차 안부는 됐고, 이제 와서 나한테 할 얘기란 게 뭐야?”
진혁이 성가시다는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그게…….”
지난달, 당신을 똑 닮은 아이를 낳았어요.
혜경은 말해봤자 냉랭한 반응만 돌아올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진혁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보아 하니 힘든 것 같아 보이는데, 잘난 척하면서 거절했던 돈이 뒤늦게 아쉬워진 건가?”
그 순간, 혜경의 안에 남아 있던 그에 대한 실낱같은 기대가 모조리 사그라졌다.
지난날, 그녀가 갑자기 냉랭하게 돌아선 진혁을 붙잡았을 때 얼마를 원하냐고 물었던 그였다.
혜경은 또다시 그때의 비참하고 수치스러웠던 감정이 떠올라 속이 울렁거렸다.
“역시 차진혁 씨는 한결같네요.”
“내가 뭐?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말 돌리지 말고 똑바로 해.”
잠시 진혁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혜경이 파리한 얼굴로 입술을 뗐다.
“제대로 사과를 받고 싶어요. 그래도 조금은 내게 미안하지 않아요?”
“뭐?”
진혁은 혜경의 요구가 황당하기만 했다.
‘꼭 만나서 할 말이 있다길래 찜찜해서 억지로 나왔더니 사과를 하라고?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지?’
몇 번 어울렸던 것 가지고 사랑한다며 귀찮게 매달리더니, 갑작스럽게 일을 관두고 사라졌던 혜경이었다.
애초에 세정과 닮아서 혜경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이었을 뿐.
진짜 세정과 사귀는 지금, 진혁에게 있어 안혜경이라는 존재는 귀찮은 장애물이었다.
진혁은 세정이 했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어디 걸리기만 해봐, 뼈도 못 추리게 만들 거니까!」
이 중요한 시기에 세정이 알게 되면 괜한 오해만 불러일으킬 게 뻔했다.
혜경이 다시는 쓸데없이 연락하지 못 하도록 매정하게 끊어버리는 게 최선이었다.
“같이 즐겼을 뿐인데 내가 왜 미안해야 하지? 오히려 잠시라도 상류사회 맛을 봤으니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뭐라고요?”
“이딴 어이없는 일로 사람 오라 가라 하지 마. 다신 연락하지 말고.”
진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허. 허허.
혜경이 헛웃음을 웃으며 말했다.
“유감이네요.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면 끝났을 일인데…….”
“그건 잘못을 했을 경우에 하는 말이지.”
“단 한 순간만이라도…… 날 사랑하긴 했나요?”
“그럴 리가. 미치지 않고서야.”
비수 같은 진혁의 말이 혜경의 가슴을 후벼 팠다.
무슨 말을 기대한 거야?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지막으로 그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진혁은 내친김에 한 번 더 깊게 상처를 냈다.
“그냥 심심해서 몇 번 만난 것뿐이야. 그러니까 다신 내 눈에 띄지 마.”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혜경은 그만 울컥 솟구치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한참을 눈물만 훔치던 혜경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안혜경 씨?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성준의 목소리였다.
“김 실장님, 저 협조할게요.”
―감사합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저도 좀 도와주셔야겠어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혜경은 마음을 굳게 다잡으며 말했다.
“친자확인소송이요.”
* * *
“아직도 꿈만 같아요. 볼을 꼬집어 보니 아프긴 한데 전혀 현실감이 없는 거 있죠?”
그날 밤, 도혁의 집에 도착한 재인이 집 안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며칠 만에 돌아온 이곳이 새삼 정감 있게 느껴졌다.
“다시는 떠날 생각하지 마.”
“네. 이젠 나가라고 해도 절대 안 나갈 거니까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세요.”
재인이 장난스레 코를 찡긋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도혁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서재인 씨, 그럼 아예 일본에 안 가면 안 돼?”
“그건 절대 안 돼요!”
“막상 서재인 씨가 없으니까 못 살 것 같았단 말이야.”
“저 없어도 잘 지낼 거라고 큰소리치셨으면서?”
“그 말 취소야, 취소!”
어린아이처럼 투정 부리는 도혁의 모습에 재인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유학 가는 거 아니었으면 사표 내고 그냥 이직하고 말았을걸요? 그랬다면 팀장님이랑 계약할 일도 없었을 텐데 얼마나 감사해요?”
“그건 그렇지만…….”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유학 다녀오면 평생 팀장님 옆에 붙어 있을 테니까요.”
“정말이지?”
재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도혁의 볼에 쪽 입을 맞췄다.
금세 도혁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아아, 그나저나 몸이 천근만근이에요. 팀장님도 피곤하시죠?”
재인은 코트를 벗어 한쪽에 걸쳐놓고 소파에 푹 파묻혔다.
하루 종일 긴장했던 탓인지 푹신한 소파에 닿자마자 온몸이 나른해졌다.
도혁이 재인의 옆에 쓰러지듯 앉으며 말했다.
“응. 좀 피곤하긴 하네.”
“며칠 사이에 1년 치 사건을 몰아서 겪은 기분이에요.”
“그러게. 그래도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결국 이렇게 함께 있게 됐잖아?”
함께.
도혁이 없는 삶이 얼마나 황폐한지 뼈저리게 경험한 재인은 그 말이 눈물 나게 감사했다.
재인은 눈을 감은 채 도혁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도혁도 머리가 뒤로 젖혀지면서 스스르 눈이 감겼다.
지난밤 재회의 기쁨에 들떠 몇 시간 자지도 못한 데다, 새벽부터 서울로 올라오느라 쌓였던 피로가 뒤늦게 몰려온 두 사람이었다.
재인이 졸린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할아버님 건강이 많이 좋아지셔서 이제야 마음이 놓여요. 정말 다행이에요.”
“서재인 씨 덕분이야.”
“뭘요. 근데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바로 티가 난다고, 할아버님이 계시다 안 계시니까 집 안이 엄청 조용하네요.”
“그러게. 이제 이 집에 우리 둘뿐이야.”
“정말 이제 우리 둘뿐이네요.”
“드디어…….”
응?
도혁과 재인은 동시에 번쩍 눈을 떴다.
그러고는 누가 먼저라고 할 새도 없이 몸을 똑바로 세우고 서로를 마주 봤다.
도혁의 고요한 눈동자가 집어삼킬 듯 재인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은 그새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서재인 씨…….”
나지막이 그녀를 찾는 목소리 끝이 거칠게 갈라졌다.
그저 이름을 불리었을 뿐인데 재인은 가슴이 마구 술렁거렸다.
눈꺼풀에 내려앉았던 졸음은 달아난 지 오래였다.
“팀장님……, 좀 전에 피곤하다고 하셨잖아요?”
“내가 언제? 완전 쌩쌩하기만 한데.”
갑자기 도혁이 잘생긴 얼굴을 훅 밀고 들어왔다.
재인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시, 시간이 많이 늦었어요. 내일 일찍 출근도 해야 하는데…….”
“반차 냈어.”
“언제요? 그런 말씀 없었잖아요?”
도혁이 씩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방금. 물론 서재인 씨도 같이.”
꺄악!
재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