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뭔가 숨기는 게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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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뭔가 숨기는 게 있어
2023.07.15.
사무실 문 앞에 도혁과 재인이 서 있었다.
오늘 이른 새벽, 광주에서 출발해 곧장 회사로 출근한 것이었다.
박 과장이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았다.
“팀장님 오셨습니까? 서 주임도 좋은 아침!”
“조금 늦었습니다. 그럼 각자 일 시작하시죠.”
도혁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팀장실로 들어갔다.
재인이 자리에 앉자 나희가 다급히 물었다.
“서 주임, 어제 별일 없었어요?”
“그냥 몸이 안 좋아서 휴가 냈던 것뿐이에요. 왜요?”
“팀장님 안색이 안 좋으시던데요? 생전 안 하던 조퇴까지 하시고.”
“피곤하셨나 보죠. 저, 지금 좀 바빠서 이만.”
재인은 나희의 따가운 시선을 외면하고 노트북을 켰다.
건너편에 앉은 규민이 재인을 보며 잘 돌아왔어, 라고 하는 듯 눈인사를 했다.
반겨주는 규민에게 재인도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규민에게 떠나겠다고 말했을 때만 해도 세상이 다 끝난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지금 이 순간이 그저 꿈만 같은 재인이었다.
전보다 더 행복해 보이는 재인의 모습에 분노한 나희는 휴대전화 키패드를 부술 듯 두드렸다
* * *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예요? 서재인이랑 차도혁, 어제 하루 반짝 안 좋더니 오늘은 더 끈끈한 모습으로 나타났단 말이에요!]
[어서 다음 단계 진행시켜줘요. 다음 단계가 있기나 한 건지 모르겠지만.]
이 시건방진 여자가.
진혁은 나희가 연이어 보낸 메시지를 보고 잔뜩 인상을 구겼다.
“왜 그래?”
진혁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세정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지난밤 DS호텔 스위트룸에 묵은 진혁과 세정은 한가로이 아침 식사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지난번부터 수상해. 뭐 숨기는 거 있어?”
“숨기긴. 차도혁이 서재인이랑 아직도 붙어 다닌다고 연락이 와서.”
세정이 나이프질을 하다 멈칫했다.
“뭐? 서재인이라는 여자, 차 회장님이랑 차도혁이 쓴 계약서를 보고도 정신 못 차린 거야? 차 회장님이 자기 때문에 쓰러지셨는데 보란 듯이 그러고 다니다니, 보통이 아니네?”
차 회장이 자신과 진혁의 관계를 알고 충격을 받아 쓰러졌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세정이었다.
진혁은 세정에게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그러게. 난 참 복도 많아. 너 같은 여자를 다 만나고.”
“알면 앞으로 잘해. 딴짓하다 걸리면 알지?”
“또 그 소리. 알았어, 알았어.”
진혁이 능글맞게 받아치던 그때, 또다시 그의 휴대전화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강나희, 진짜 성가시게 구네. 조만간 잘라버려야지 안 되겠어.’
짜증스레 메시지를 확인한 진혁은 흠칫 놀랐다.
메시지를 보낸 이는 나희가 아니었다.
[오랜만이에요. 저 혜경이에요.]
안혜경?
진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연거푸 메시지가 이어졌다.
[오늘 시간 좀 내주세요.]
[꼭 만나서 할 얘기가 있어요.]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는 진혁이었다.
‘몇 번 어울린 걸 가지고 사랑 타령하는 걸 간신히 떼어냈는데, 또 왜 이래?’
진혁은 혹시라도 세정이 이상한 눈치를 챌까 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정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벌써 가게? 오전에 천천히 들어가도 된다며?”
“미안. 급한 회의가 잡혀서 가봐야겠어. 세정이 넌 천천히 쉬다 와.”
진혁은 세정에게 애써 웃어 보이고는 서둘러 객실을 빠져나갔다.
‘분명, 뭔가 숨기는 게 있어…….’
홀로 남겨진 세정은 쫓기듯 뛰쳐나간 진혁을 떠올리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 * *
그날 저녁.
재인과 도혁, 연지까지 차 회장의 병실에 모였다.
차 회장의 곁을 지키고 있던 차주영이 재인을 보자마자 손을 덥석 잡았다.
“재인 씨 잘 왔어요! 에구, 마음고생이 심했죠?”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아버지가 계속 기다리셨어요. 어서 가봐요.”
차주영은 아직도 믿기지 않아 얼떨떨하기만 한 재인을 차 회장의 곁으로 이끌었다.
침대에 앉아 있는 차 회장은 며칠 사이에 부쩍 혈색이 좋아지고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재인은 예전처럼 건강해 보이는 차 회장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할아버님, 편찮으신 건 좀 어떠세요?”
“덕분에 많이 괜찮아졌네. 서재인 씨가 날 살렸어. 고마워.”
“별말씀을요. 이렇게 좋아지신 거 보니 정말 감사할 따름이에요.”
“그나저나 오해는 다 풀린 게지?”
“네.”
지난밤, 재인은 도혁으로부터 모든 내막을 전해 듣고 오해를 풀었다.
차 회장이 쓰러지기 전에 이미 재인을 받아들이겠다고 마음먹은 것부터,
진혁의 눈을 속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재인을 내보낸 것,
차 회장이 쓰러진 것은 도혁과 재인 때문이 아닌 진혁의 막말 때문이었다는 것,
진혁이 재인의 부모님 일을 훼방 놓고, 악의적으로 그녀와 도혁을 갈라놓으려 한 것까지.
거기다가 진혁과 윤세정이 농밀한 사이라는 얘기까지 들은 재인은 너무 놀라 입이 딱 벌어졌었다.
“그동안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 미안하네.”
차 회장이 재인의 손을 잡고 사과했다.
“힘들게 해드려 저도 죄송해요.”
재인은 차 회장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움츠렸던 마음이 활짝 열렸다.
“부모님 가게는 조금만 기다려주면 내가 원래대로 되돌려 놓겠네.”
“아,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무슨 소리! 괜히 서재인 씨 부모님까지 우리 집안일에 휘말리게 해서 미안하지. 내가 대신 사과하겠네.”
“할아버님…….”
재인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었다.
도혁이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 안으며 차 회장에게 말했다.
“할아버지, 저희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내가 괜한 고집을 부려서 너희를 힘들게 했어.”
“역시 우리 할아버지! 너무 잘됐어요!”
연지가 차 회장을 와락 껴안았다.
“연지 너한테 원망 듣기 싫어서 허락한 것도 있어. 서재인 씨 도망가면 원망할 거라고 으름장을 놓던 게 어찌나 무섭던지…….”
“제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할아버진데, 설마 진짜 그랬겠어요?”
“아, 됐어!”
차 회장이 퉁퉁거리자 연지가 그의 팔짱을 끼고 까르르 웃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즈음, 문이 열리고 성준이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벌써 모두 모여 계셨군요.”
성준은 곧장 차 회장에게 다가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어서 오게.”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이렇게 직접 뵐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고맙네. 나도 자네를 이리 다시 보니 반갑네, 그려.”
차 회장을 바라보는 성준의 눈가가 촉촉했다.
“김 실장님, 안녕하세요.”
재인이 인사를 건네자 성준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서재인 씨, 일찍 나타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만 늦었으면 서재인 씨를 찾아 전국을 다 뒤질 뻔했습니다.”
“어머,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도련님이 애가 타서 안절부절못하는 건 처음인데,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꽤 흥미로웠습니다.”
“진짜예요, 언니. 어제 회사에서도 표정 관리 못 하고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껴 있었다니까요.”
연지가 맞장구를 쳤다.
도혁이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말을 돌렸다.
“흠흠. 김 실장님, 오늘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네. 그동안 조사해온 사항을 보고드리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다 같이 상의해볼 필요가 있어서 모이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모두 긴장한 표정으로 성준을 주시했다.
성준은 차 회장의 침상 테이블에 태블릿을 올려놨다.
모든 시선이 일제히 태블릿에 꽂히자 성준이 문서파일을 열고 하나씩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차정환 대표님이 서진물산 윤문식 회장님과 협력 관계를 맺은 것은 맞았습니다.”
다들 예상했던 바였다.
“DS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다른 대주주들과 식사하는 모습이 세 번이나 목격되었습니다. 대주주들을 설득해 진혁 도련님을 후계자로 추대하려는 것이겠죠.”
“2대 주주인 서진물산에 다른 대주주들까지 합세하면 우리 쪽이 불리한데…….”
도혁이 턱을 괴고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성준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도련님과 서재인 씨의 스캔들을 퍼트린 익명게시판 글 말입니다. 강나희 대리가 의심스럽다고 하셔서 추적해봤더니 강나희 대리가 맞았습니다.”
“강 대리가 그랬다고요?”
재인의 눈이 주먹만 해졌다.
“네. 정황상 진혁 도련님에게 협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말도 안 돼…….”
“스캔들이 퍼진 당일의 대산F&G CCTV를 확인해봤습니다. 그랬더니 정시 출근 1시간 전에 강나희 대리가 건물에 들어왔다가, 강나희 대리 계정으로 익명게시판에 글이 올라온 이후 5분 만에 밖으로 나가는 게 찍혔습니다.”
“강 대리가 왜 그랬을까요?”
재인은 아직도 믿기지 않아 다시 물었다.
“도련님과 행복해 보이는 서재인 씨를 질투해서겠죠.”
“그렇다고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너무 신경 쓰지 마.”
도혁이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재인을 다독이며 성준에게 물었다.
“아, 내려간 보람이 있었습니다. 아주 엄청난 대어를 낚아 왔습니다.”
“대어라니요?”
성준은 대답 대신 문서파일의 다음 장을 넘겼다.
청순하면서도 똑 부러져 보이는 여자의 사진이 나왔다.
“어?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인데…….”
연지가 여자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고개를 갸웃했다.
성준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제 부산에서 만난 차정환 대표님의 전 수행비서 안혜경 씨입니다. 6개월 전쯤 갑작스럽게 그만뒀는데, 이유가 있었더군요.”
“그게 뭡니까?”
도혁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실은…… 그때 임신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설마, 그 애의 아버지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는 도혁 대신 성준이 말했다.
“아무래도 진혁 도련님 같습니다.”
도혁의 얼굴에 역시, 라는 표정이 스쳤다.
다들 너무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진혁이 이놈이!”
갑자기 차 회장이 뒷목을 잡으며 버럭 했다.
차주영이 황급히 차 회장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진정하세요, 아버지! 그래도 오빠가 그런 것보다는 낫잖아요. 전 혹시라도 오빠가 실수한 걸까 봐 간 떨려서 혼났어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차 회장은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성준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심증은 가는데 안혜경 씨 본인 입으로 들은 게 아니니까요. 저희 일에 협조해달라고 부탁했더니 안혜경 씨가 며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일단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겠군요.”
“네. 만약 안혜경 씨가 저희 쪽으로 넘어온다면 아주 유리한 패를 손에 넣게 되는 겁니다.”
“정말 안혜경 씨의 아이가 진혁이의 아이이고, 그걸 윤세정이 알게 된다면 아주 난리가 나겠군요.”
“그렇죠.”
도혁과 성준의 눈빛이 반짝, 하고 빛났다.
그때, 갑자기 연지가 사진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아! 어디서 본 것 같다 했더니 이 사람, 윤세정이랑 닮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