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찾았다, 서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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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찾았다, 서재인
2023.07.11.
재인은 온몸이 전율하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나 어떡해. 진짜 미쳤나 봐.”
뿌연 장막이 드리운 듯 시야가 흐릿했다.
재인은 정신을 차리려고 눈을 깜박거렸다.
다음 순간, 도혁의 환영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인은 홀린 듯 그 환영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발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다.
앗, 하는 사이에 도혁이 재인의 눈앞에 서 있었다.
툭툭, 그가 장갑 낀 손으로 머리 위에 내려앉은 눈을 털었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이 재인을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도혁의 무심한 눈동자가 흔들렸다.
거칠게 내쉬는 숨이 뿌옇게 얼어붙어 흩어졌다.
굳게 다문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 살짝 열린 입술 사이로 뜨거운 입김이 새어 나왔다.
“찾았다, 서재인.”
재인의 눈앞에 선 이는, 진짜 차도혁이었다.
“……팀장님?”
도혁이 눈부시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재인은 굳게 다짐한 보람도 없이 와르르 무너졌다.
“팀장님…… 진짜 팀장님이에요?”
재인이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도혁의 얼굴을 더듬었다.
형언할 수 없는 눈빛으로 재인을 바라보던 도혁이 코트 단추를 풀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끌어당겨 있는 힘껏 껴안았다.
두툼한 코트 자락이 차갑게 식은 재인의 몸을 포근히 감쌌다.
아직도 얼떨떨하기만 한 재인은 그의 따뜻한 가슴에 가만히 볼을 맞대고 있었다.
미친 듯이 뛰는 도혁의 심장 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세차게 두드려댔다.
응답하듯 재인의 가슴도 두근두근 뛰었다.
꽁꽁 얼어 있던 몸이 언제 그랬냐는 듯 봄눈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머리 위에서 도혁의 컬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서재인 씨, 약속이 다르잖아?”
“네?”
“평생 책임지기로 했으면서 사라지면 어떡해? 여기까지 찾아오는 데 백 년은 걸린 것 같단 말이야.”
“……죄송해요.”
재인은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도혁을 올려다봤다.
“근데 제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아셨어요? 아까 팀장님이 전화했을 때, 분명 원장님이 여기에는 안 왔다고 대답하셨는데?”
“그냥 느낌. 우린 어떻게든 만날 운명이니까 다신 날 떠날 생각하지 마.”
“제가 있으면 계속 팀장님께 방해가 되잖아요.”
“서재인 씨 없는 내 삶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
촉촉이 젖은 그의 눈빛에 재인의 가슴 한복판에 거센 파도가 일렁였다.
하지만, 곧이어 자괴감이 밀려왔다.
기껏 마음먹고 도혁을 떠나왔는데 하루도 안 돼서 무너져 버리다니.
“그만 돌아가세요! 어차피 우리, 한 달 뒤면 끝내야 하잖아요.”
재인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가슴을 밀어냈다.
그러나 어느새 등 뒤로 코트 단추가 잠겨 있어 벗어날 수가 없었다.
도혁이 그녀를 더 꽉 껴안으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할아버님이랑 계약한 거 다 알아요. 한 달 내에 허락 못 받으면 저 포기하기로 하셨잖아요.”
도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괜히 더 끌어봤자 우리 둘 안 된다는 결론은 똑같아요.”
“멋대로 그런 계약해서 미안해. 그래도 오해는 말아줘. 난 할아버지가 끝까지 허락 안 하시면 서재인 씨가 아니라 후계자를 포기할 생각이었으니까.”
“네?”
재인은 깜짝 놀라 도혁을 쳐다봤다.
자신을 향한 짙은 눈동자에는 거짓이 없었다.
그녀가 백번도 넘게 스스로 묻고 답했던 질문이 보기 좋게 예상을 빗나간 것이었다.
재인은 또다시 울컥 눈물이 솟구쳤다.
“어떻게 팀장님 앞길을 막아요. 제가 뭐라고…….”
“전부.”
“……!”
도혁은 다시 힘주어 말했다.
“내 전부야. 조금 전에 얘기했잖아? 서재인 씨 없는 삶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그치만…….”
재인이 울먹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떻게 우리만 생각해요? 할아버님이 얼마나 속상하시겠어요.”
“서재인 씨, 잠시만 내 말 좀 들어봐.”
“설득하려고 하셔도 소용없어요. 할아버님이 그렇게 저를 마다하시는데 제가 어떻게 팀장님 옆에 있겠어요?”
설움과 걱정이 뒤섞여 재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니, 그게 아니라…….”
“할아버님 이제 겨우 깨어나셨잖아요. 안정을 취하셔도 모자랄 판에 이러다 충격으로 또 쓰러지시면 어떡해요? 그러면, 전 더는.”
갑자기 울먹이는 재인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눈을 동그랗게 뜬 재인의 얼굴에 뜨거운 숨결이 훅 끼쳤다.
도혁이 그녀의 볼을 감싸 쥐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
일순간 재인은 마치 꿈속을 거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간신히 붙들었던 마음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그에게 내달리고 있었다.
재인은 달콤한 입맞춤에 취해 도혁의 가슴을 꼭 붙들고 한껏 발돋움했다.
조금 전까지 조잘대던 새초롬한 입술은 그렇게 그의 데일 듯한 열기에 속수무책으로 녹아 들어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하아.
아쉬움 섞인 짧은 한숨을 내쉬며 도혁이 천천히 멀어졌다.
재인은 아직 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몽롱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도혁이 고개를 들다 말고 피식 웃었다.
“서재인 씨, 이제 그만 놔주면 고맙겠는데?”
“네?”
“하도 오래 숙이고 있었더니 목이 좀 아파서 말이야.”
재인은 그제야 그의 목에 매달리듯 두 팔을 걸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꺄악!
정신이 번쩍 든 재인은 황급히 손을 풀었다.
하지만 코트에 갇혀 도망도 못 가는 신세.
재인은 할 수 없이 코트 속에 새빨개진 얼굴을 푹 파묻었다.
도혁이 쿡쿡 웃으며 말했다.
“이번 일로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네. 서재인 씨 설득하는 데는 말보단 행동이 더 빠르다는 거.”
“노, 놀리지 마세요.”
“참, 한 가지 분명히 말해둘 게 있는데, 나 지금 할아버지가 등 떠밀어서 온 거야.”
“할아버님이요?”
재인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할아버지가 빨리 가서 서재인 씨 찾아오라고 하셨다고.”
“거짓말…….”
“못 믿겠으면 서재인 씨가 가서 직접 확인해봐.”
“그럼 할아버님이 정말 그러셨단 말이에요?”
재인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쳐다보자, 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갑자기, 재인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치듯 말했다.
“어머! 할아버님 혹시 쓰러진 충격으로 머리가 어떻게 되신 거예요? 설마 기억상실증?”
“뭐?”
도혁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재인이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도혁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허. 도혁은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다.
“서재인 씨,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아니에요?”
재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귀여워 죽겠네.
도혁은 재인의 두 볼을 감싸고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콩, 하고 부딪쳤다.
“이그! 당연히 아니지!”
“정말요? 휴우, 다행이다!”
재인이 이마를 문지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근데 기억상실증도 아닌데 할아버님이 저를 왜 보고 싶어 하시는 거예요? 떼어놓으려고 쫓아내실 땐 언제고…….”
그 모습이 또 사랑스러워서 도혁은 그만 웃음이 터져 버렸다.
“팀장님, 웃지만 말고 어서 말해 주세요.”
“이래서 난 서재인 씨 아니면 안 된다니까. 나, 불치병이니까 서재인 씨가 평생 책임져.”
“네에? 말 돌리지 마시고요.”
재인이 재촉하자 도혁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가 우리 사이 허락하셨어.”
“네? 말도 안 돼…….”
“진짜야. 가서 확인해보라니까?”
도혁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던 재인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팀장님…….”
“응?”
재인이 갑자기 도혁을 와락 껴안았다.
단단한 가슴에 기댄 그녀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 * *
그날 밤.
도혁은 시간이 늦어 별사랑보육원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로 했다.
편한 옷을 빌려 입은 도혁은 거실 소파에 앉았다.
옆자리에는 일찌감치 자리를 차지한 현우가 휴대전화를 붙들고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도혁은 멀리 급식실 안에서 김 원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재인을 바라보며 넌지시 말했다.
“메시지 잘 받았다.”
“진짜 올 줄은 몰랐네요.”
현우도 게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무심히 대답했다.
도혁은 피식 웃으며 현우가 보낸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현우의 메시지는 딸랑 두 개뿐이었다.
첫 번째는 지난 연말에 현아 수술이 무사히 끝난 날 감사하다고 보낸 메시지였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오늘 저녁 뜬금없이 날아온 것이었다.
메시지에는 가타부타 설명 없이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는 재인의 사진 한 장만 딸랑 첨부되어 있었다.
도혁은 그 길로 곧장 차를 몰고 광주로 향했다.
“아저씨.”
여전히 게임에 열중한 채 현우가 말을 걸었다.
“왜?”
“재인이 누나 울리지 말라고 했잖아요. 다음번엔 진짜 가만 안 있을 거예요.”
그러고 보니 지난 크리스마스 날 헤어질 때 현우가 도혁에게 경고를 날렸었다.
「아저씨, 재인이 누나 절대 울리지 마요! 울리면 가만 안 있을 거예요. 웃지 마요! 진짜예요.」
「이런. 너무 무서운걸. 오늘 밤 잠은 다 잤네.」
「장난 아니라니까요!」
쪼끄만 녀석이.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네.
도혁은 짓궂은 얼굴로 현우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협박이냐?”
“아잇! 뭐 하는 거예요!”
현우가 정색하며 손을 쳐내자, 도혁이 씩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무튼, 도와줘서 고맙다.”
“아저씨 좋으라고 한 거 아니거든요. 재인이 누나가 너무 슬퍼 보여서 그런 거라고요.”
“이제 그럴 일 없을 테니 걱정 마.”
“그건 두고 봐야 알죠. 내가 다섯 살만 더 먹었어도 재인이 누난 내가 지켜줬을 텐데…….”
이것 봐라?
도혁은 곧장 현우의 목에 헤드락을 걸었다.
“이 녀석이 아주 엉큼한 꿈을 꾸고 있었네? 일찌감치 꿈 깨!”
“아팟! 아, 놔요!”
바둥거리다 겨우 풀려난 현우는 퉁퉁 부은 얼굴로 다시 게임을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놀랐는지 재인이 급식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무슨 일 있어요?”
“아주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지.”
도혁의 말에 현우가 쳇,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어쩐지 전보다 친해진 것 같은 둘의 모습에 재인은 웃음이 나왔다.
“팀장님, 여기 금방 끝나니까 조금만 기다리세요.”
“알았어.”
“현우 넌 늦었으니까 그만 들어가서 자고.”
“응.”
재인의 말이라면 고분고분 순한 양이 되는 두 사람이었다.
“아저씨.”
현우가 방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돌아섰다.
“왜? 또 무슨 협박을 하려고?”
“네버랜드…… 재밌어요?”
아까 도혁이 김 원장에게 현아의 상태를 물어보면서, 따뜻한 봄이 오면 보육원 아이들을 네버랜드에 데려가겠다고 한 얘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그렇겠지?”
“아저씨는 생각보다 더 좋은 사람 같아요.”
“왜 이래, 갑자기?”
“약속도 엄청 잘 지킬 것 같고요. 혹시라도 네버랜드에 못 가게 되면 애들이 많이 실망할 거예요.”
현우는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도혁은 몹시 들뜬 듯한 현우의 뒷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거야말로 무서운 협박 같은데?”
* * *
다음 날 아침.
재인의 빈자리를 본 나희는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눈꼴시던 서재인이 안 보이니 속이 다 시원하네!’
어제 서재인이 처음으로 갑작스럽게 휴가를 내고 나오지 않았다.
차도혁은 심각한 얼굴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오후에 조퇴까지 하고 뛰쳐나갔다.
그리고 지금, 두 사람 다 출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사무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이름 모를 인간이 재수는 없어도 일 처리는 잘했나 본데? 계획이 잘 먹힌 게 분명해.’
나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강 대리, 왜 혼자서 실실 웃고 그래? 뭐 좋은 일이라도 있어?”
박 과장이 믹스커피를 홀짝거리며 물었다.
“속이 뻥 뚫리는 일이 있긴 했죠.”
“그래서 얼굴이 확 폈구나? 뭔데 그래?”
“비밀이에요.”
“사람 궁금하게 만들어놓고 야박하게 굴기야?”
“제가 뭘요.”
나희는 실로 오랜만에 사무실에서 시원하게 웃어젖혔다.
그 순간.
“좋은 아침입니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무심코 뒤를 돌아본 나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