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화. 서재인 씨, 떠났어요 (116/129)


115화. 서재인 씨, 떠났어요
2023.07.08.



 
도혁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갑자기 일본을요? 아직 입학하려면 멀었는데…….”

―더는 할 말 없어요. 두 사람 이쯤에서 깨끗이 끝내는 걸로 알고 있을게요. 그럼.

“어머님, 잠시만요!”

도혁의 안타까운 외침을 뒤로하고 전화가 끊겼다.

다급히 다시 걸었지만, 곧장 부재중 메시지로 넘어갔다.

도혁은 심장이 욱신거려 가슴을 움켜쥐었다.

서재인과 끝낸다?

그것만큼은 절대 따를 수 없는 일이었다.

재인이 없는 삶이란, 그에게는 지옥이나 마찬가지니까.

잠깐 사이에 도혁은 천국과 지옥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믿고 싶지 않은 현실 앞에 망연자실한 도혁은 꺼진 휴대전화 화면만 멍하니 쳐다봤다.

불현듯 어제저녁 산책할 때 재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약속 하나만 해주세요.」

「뭔데?」

「제가 없어도…… 꼭 잘 지내셔야 해요.」

그 말을 했을 때 무심코 지나쳤던 재인의 표정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서둘러 병실을 나서던 모습까지.

아!

도혁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때 이미 떠날 생각이었구나!’

재인이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애쓰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었다.

차 회장이 부모님의 삶을 망가뜨리면서까지 자신을 반대한다는 생각에 재인이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까.

모든 게 다 진저리쳐졌으리라.


‘정말 할아버지가 그러신 걸까?’

도혁이 아는 한, 할아버지는 그런 일을 벌일 분이 아니셨다.

하지만 분명 서재인 씨 어머니 입에서 차대산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만약 할아버지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재인과 떼어놓겠다고 결심했다면, 완전히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도혁은 자신 때문에 재인의 부모님이 곤란에 처했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갑갑해졌다.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솟구쳐 죄책감과 마구 뒤엉켰다.

드르륵. 드르륵.

요동치는 그의 심경을 대변이라도 하듯 책상 위의 휴대전화가 요란한 소음을 냈다.

고모 차주영의 전화였다.


“무슨 일이세요?”

―도혁아, 할아버지가 조금 전에 말을 하셨어!

도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게 정말이에요?”

―응. 널 찾으시니까 빨리 와.

“알았어요. 지금 바로 갈게요.”

―참, 서재인 씨도 같이 오래.

“네?”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

할아버지가 서재인 씨를 데려오라고 하다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할아버지의 속내를 이해할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이럴 때가 아니야!’

도혁은 황급히 코트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할아버지와 풀어야 할 것들이 많이 쌓여 있었다.

* * *

도혁이 병실에 들어섰을 때, 차 회장은 차주영에게 의지해 병실 안을 걷고 있었다.

부쩍 혈색이 좋아진 할아버지를 보자 도혁은 마음이 놓였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도혁이 왔냐?”

“몸은 좀 어떠세요?”

“많이 좋아졌다.”

차주영이 끼어들었다.


“의사 선생님이 이 정도 회복 속도면 다음 주면 퇴원해도 되겠대.”

“정말 다행이네요.”

차 회장이 문 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서재인 씨는 같이 안 왔냐?”

“네.”

“왜? 일이 바쁜 게야?”

도혁은 살짝 실망하는 듯한 차 회장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정말 서재인 씨를 기다리신 건가?

도혁이 말이 없자 차 회장이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렇게 심각하게 표정이야? 무슨 일 있는 게야?”

“서재인 씨, 떠났어요.”

차 회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떠나다니!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할아버지는 정말 모르는 일이세요?”

“뭘 모른다는 거야? 빙빙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서재인 씨 부모님이 원래 이번 주 금요일에 화순에 있는 카페로 옮길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건물주가 바뀌면서 무산됐어요.”

“그런데?”

“그 건물주가 대산그룹이고, 할아버지가 지시하신 거라고 하던데, 아닌가요?”

“뭐야?”

도혁은 병원으로 오는 길에 성준에게 전화를 걸어 이 일의 내막을 확인해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성준으로부터 새 건물주의 연락처가 대산그룹 비서실이었고, 모든 일이 차 회장의 지시라는 답변을 들었다.


“할아버지가 부모님의 생계까지 위협하니 서재인 씨가 못 견디고 떠난 거예요. 아무리 그러셔도 전 서재인 씨 절대 포기 못 합니다.”

“난 모르는 일이다!”

“정말입니까? 할아버지가 서재인 씨도 집에서 쫓아내셨잖아요.”

도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차 회장이 기가 막힌 얼굴로 버럭 했다.


“그건 진혁이 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거지. 원래는 그때 내가 서재인 씨 옮겨 있을 곳까지 마련해뒀었단 말이야.”

“……!”

“대체 날 뭘로 본 게야! 내가 그런 짓까지 할 정도로 형편없어 보이냐?”

“아니요.”

갑자기 도혁이 차 회장을 덥석 껴안았다.


“그럴 줄 알았어요!”

도혁의 얼굴에 안도의 기쁨이 넘쳐흘렀다.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할아버지가 재인의 부모님 일에 개입되어 있을까 봐 불안했는데 천만다행이었다.


“아, 이 녀석이 왜 이래? 답답하니까 떨어져.”

차 회장은 무뚝뚝한 손자의 포옹이 낯 뜨거워 괜스레 밀어냈다.

그제야 흥분을 가라앉힌 도혁도 멋쩍은 얼굴로 떨어졌다.


“대체 누가 나를 사칭해 그런 짓을 한 거야?”

“작은아버지와 진혁이 말고 누가 있겠어요. 서재인 씨를 이용해서 저와 할아버지 사이를 흔들려는 거였겠죠.”

무심코 그동안 숨겨왔던 속내를 말해 버린 도혁은 순간 움찔했다.


“아, 제 말은…….”

“이놈들이 기어이 일을 크게 벌이려나 보구나.”

“할아버지, 다 알고 계셨어요?”

도혁이 흠칫 놀라 쳐다보자 차 회장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주에 정환이를 떠보러 대산에 갔다가 진혁이랑 윤세정이 만나는 것도 봤어. 키스까지 하는 걸 보니 보통 사이가 아니더라.”

“하.”

이거야말로 예상치 못한 충격이었다.

도혁은 기가 막혀 헛웃음만 나왔다.


“도혁아, 아무래도 정환이랑 윤문식 회장이 널 끌어내리려고 손을 잡은 것 같다.”

“……그렇군요.”

“한가하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지금부터라도 대책을 세워야지.”

“네, 그래야죠.”

“김 실장한테도 부산에서 올라오면 곧장 이리로 오라고 해뒀다.”

차 회장은 도혁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이쪽은 알아서 움직일 테니 넌 어서 다녀와.”

“어디를요?”

“어디긴? 서재인 씨 찾으러 가야지!”

차 회장이 활짝 웃으며 덧붙였다.


“까탈스럽고 고집 센 널 다룰 수 있는 건 서재인 씨밖에 없어. 서재인 씨 아니면 너 결혼도 안 하고 평생 혼자 늙어 죽을 거 아냐? 난 그 꼴 절대 못 본다.”

“할아버지…….”

도혁은 울컥 목이 메었다.


“아, 어서 다녀와!”

“네!”

도혁은 차 회장을 다시 한번 힘주어 안았다.

그리고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서재인 씨 반드시 데려올게요!”

 

* * *

그날 저녁, 재인은 별사랑보육원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이른 아침 광주에 내려온 재인은 엄마를 만난 뒤 이곳으로 왔다.

김성희 원장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당분간 보육원에서 머물기로 했다.

조금 전, 도혁이 보육원에 전화를 걸어 재인을 찾았다.

김 원장은 미리 부탁받은 대로, 재인은 여기에 없다고 둘러대 주었다.

재인은 도혁의 목소리에 기운이 하나도 없더라는 김 원장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정신 차려! 벌써 마음 약해지면 어떡해?’

재인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그쳤다.

그때, 한 아이가 재인의 앞에 불쑥 책을 내밀었다.


“재인 언니, 책 읽어줘요.”

“안 돼. 재인 언니는 나랑 소꿉놀이 할 거야!”

또 다른 아이가 재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내가 먼저 왔잖아!”

“치. 왜 너만 재인 언니 독차지하려고 해? 나도 재인 언니랑 놀고 싶은데…….”

여자아이들이 재인을 사이에 두고 옥신각신했다.


“자자, 그럼 지금 잠깐 책 읽고 다 같이 소꿉놀이 하자. 어때?”

재인이 웃으며 다독이자 아이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아요!”

“이리 와.”

아이들을 양쪽 무릎에 앉힌 재인은 동화책을 펼쳤다.

다른 아이들까지 하나둘 재인의 주위로 모여들어 귀를 쫑긋 세웠다.

재인은 차분한 목소리로 책을 읽어 내려갔다.


“아주 먼 옛날, 어느 가난한 집에 홀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세 딸이 있었어요. 그중에서도 셋째 딸이 가장 마음씨가 곱고 예뻤답니다. 어느 날, 숲에서 길을 잃은 왕자가…….”

“치, 재미없어!”

한 남자아이가 콧방귀를 뀌었다.


“왜 그러니?”

“너무 시시해서요. 어차피 왕자님이랑 결혼하는 얘기잖아요?”

“아마 그럴걸?”

“그게 말이 돼요? 왕자가 공주랑 결혼해야지, 왜 가난한 집 딸이랑 결혼해요?”

“…….”

그러게.

재인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현실은 동화와 다르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기에.


“뭐야, 너! 듣기 싫으면 다른 데로 가면 되잖아.”

책을 읽어달라고 했던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에게 눈을 흘겼다.

그러자 남자아이가 볼멘소리를 했다.


“내가 뭘 어쨌다고…….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난 나중에 커서 꼭 왕자님이랑 결혼할 거야. 두고 봐!”

“맨날 그 소리. 왕자 같은 게 어디 있다고…….”

“내 맘이거든!”

남자아이가 부루퉁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

재인은 몰래 눈물을 훔치고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중학생 현우가 지켜보고 있었다.

* * *

아이들을 재우고 나온 재인은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현우가 다가와 재인의 옆에 앉았다.


“누나, 갑자기 여기는 왜 왔어?”

“너희들 보고 싶어서 왔지. 너 설마, 누나 안 반가운 거야?”

“그게 아니라……. 그 아저씨는 잘 있고?”

도혁을 말하는 거였다.

재인은 아이들 덕분에 잠시 잊고 있었던 도혁이 생각나 심장이 저릿했다.


“으응. 잘 지내지.”

“이번엔 왜 같이 안 왔어?”

“그게…… 요즘 일이 좀 바쁘거든. 왜?”

“아니, 그냥……. 고마워서.”

동생 현아가 도혁 덕분에 무사히 심장 수술을 받아 건강을 되찾았으니 당연히 도혁의 안부가 궁금할 터였다.

현아는 수술 경과가 좋아 며칠 전 광주의 종합병원으로 옮겨와 치료를 받고 있었다.

재인은 도혁 생각을 지우려 말을 돌렸다.


“현아 다음 주면 퇴원하지?”

“응. 퇴원하면 누나가 그 아저씨랑 같이 네버랜드 데려간다고 했다고 엄청 신났던데?”

“아, 그랬었지.”

재인은 미처 막을 새도 없이 또다시 도혁이 떠올라 버렸다.


「현아가 다 나으면 네버랜드에 같이 갈 거예요.」

「외곽에 있는 놀이공원?」

「네. 현아가 몇 년 전부터 거기 가보는 게 소원이라고 노래를 불렀었거든요. 바빠서 다음에, 라고 미루기만 했었는데…….」

「할 수 없군. 내가 같이 가주지.」

「팀장님이요?」

「응. 사람 많은 건 딱 질색이지만.」

「팀장님……. 딱 질색인데도 가시려는 걸 보니, 놀이기구 타는 걸 엄청 좋아하시나 봐요?」

「뭐? 서재인 씨,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그때 도혁은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리며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웃음이 터졌었는데.


“누나, 왜 그래?”

현우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응? 내가 뭐?”

“울고 있잖아.”

 

 
재인은 그제야 제 볼이 축축하게 젖어 있음을 깨달았다.

걱정스레 쳐다보는 현우의 얼굴 위로 도혁의 얼굴이 흐릿하게 겹쳐 보였다.


“누나, 역시 무슨 일 있는 거지?”

“아, 아니야.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재인은 황급히 눈물을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는 일기예보에도 없던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당황해서 겉옷도 챙겨 오지 않은 재인은 매서운 겨울바람에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닦고 또 닦아도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흘러내리는 눈물을 그냥 내버려 뒀다.

눈물 자국이 금세 얼어붙어 살이 에였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거야.

아직 팀장님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

분명 금세 괜찮아질 거야.

그래, 이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어.

잠시, 아주 행복한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면 돼.

지나고 보면 별일 아닐 거야.

재인은 것 잡을 수 없이 튀어나오는 도혁을 지우려 계속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다짐을 비웃기라도 하듯 멀리 눈보라 속에 도혁의 환영이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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