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더 이상 찾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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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더 이상 찾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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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더 이상 찾지 말아요
2023.07.04.
재인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재인은 걱정스레 쳐다보는 차주영에게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좀 쉬면 괜찮을 거예요.”
“그래요, 어서 들어가 봐요. 도혁아, 여긴 내가 있을 테니 서재인 씨 집까지 데려다주고 와.”
차주영의 말에 도혁이 나갈 채비를 하자 재인이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팀장님,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서재인 씨,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가.”
“정말 괜찮아요. 할아버님이 깨어나셨는데 팀장님이 옆에 계셔야죠.”
“그럼 정문에서 택시만 태워줄게.”
“택시 바로 탈 수 있는데요, 뭘. 그냥 여기 계세요.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해요.”
“하여튼 고집은…….”
도혁은 재인이 한사코 마다하자 한발 양보했다.
“알았어, 그럼. 푹 쉬고 내일 봐.”
“네. 내일…….”
재인이 말끝을 흐리며 돌아섰다.
* * *
“좋은 아침입니다!”
도혁은 활기찬 인사와 함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양손에는 과일 주스와 샌드위치가 든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다들 이것 드시면서 일하시죠.”
박 과장이 화색이 도는 얼굴로 반겼다.
“아이구, 잘 먹겠습니다! 근데 팀장님 오늘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 봅니다?”
“네. 그럴 일이 있습니다.”
“뭔지 모르겠지만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어제 차 회장이 의식을 되찾은 뒤로 도혁은 그야말로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재인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어 특별 간식까지 사서 날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사랑스러운 미소로 맞아 줄 거라 기대했던 재인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도혁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근데 서 주임은 어디 갔습니까?”
“아, 조금 전에 갑자기 몸이 안 좋아서 휴가를 내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팀장님께는 당연히 말씀드린 줄 알았는데요?”
박 과장이 의외라는 눈빛을 보냈다.
“서재인 씨가 휴가를요?”
금시초문이었다.
어젯밤 잘 도착했는지 전화를 걸었을 때만 해도 별말이 없었는데.
‘피곤해 보이더니, 많이 아픈 건가?’
재인이 이런 식으로 휴가를 낸 건 처음이었다.
걱정이 된 도혁은 황급히 팀장실로 들어가 재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가며…….
몇 번이나 걸어도 부재중 메시지로 넘어갔다.
‘병원에 갔나? 역시 어제 우겨서라도 집까지 데려다줄 걸 그랬어.’
때늦은 후회를 하던 그때, 밖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네, 들어오세요.”
연지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팀장님,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 부장님이 하실 말씀 있다고 찾으세요.”
“아, 네. 바로 간다고 전해주세요.”
도혁은 필요한 서류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일 없을 거야. 일단 다녀와서 다시 연락해보자.’
* * *
부장과의 미팅에, 팀장급 미팅에, 밀려드는 일까지 처리하느라 도혁은 오전 내내 쉴 틈 없이 바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
도혁이 비밀 회의실에서 성준을 기다렸다.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재인에게 몇 번이나 전화를 걸고 문자를 남겼지만,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배터리가 나간 건가? 혹시 아파서 쓰러져 있는 거 아니야?’
자꾸만 안 좋은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 가던 그때, 때마침 성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김 실장님, 어디세요?”
―죄송합니다. 오늘은 찾아뵙기 힘들 것 같습니다.
“갑자기요? 무슨 일 있습니까?”
어안이 벙벙한 도혁의 귀에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이 소란스러운 것 같은데 밖이세요?”
―네. 지금 서울역입니다.
“서울역에는 갑자기 왜요?”
―부산에 다녀오려고요.
“부산이요?”
도혁이 놀란 목소리로 되묻자 성준이 차분하게 이유를 설명했다.
―안혜경 씨라고, 반년 전까지 차정환 대표님의 비서로 일했던 분이 부산에 사는데 가서 만나보려고 합니다. 계속 수소문 중이었는데 조금 전에 연락이 닿았거든요.
그러고 보니 차정환의 수행비서가 여자였는데 언제부터인가 남자로 바뀌어 있었다.
“그분을 왜요?”
―안헤경 씨가 차정환 대표님이 MF파트너스와 간을 볼 때부터 지켜봐서 알고 있는 게 많을 테니 뭔가 정보를 얻어내 봐야죠.
“순순히 말해줄까요?”
―비서실을 캐봤는데, 거의 쫓겨나다시피 관뒀답니다. 모르긴 해도 차정환 대표님께 좋은 감정은 없을 것 같으니 잘 얘기해봐야죠.
“그렇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성준의 존재만으로도 든든한 도혁이었다.
―그리고, 아직 확실하지는 않은데 한 가지 짚이는 게 있어서요. 자세한 건 만나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럼.”
도혁이 전화를 끊으려고 하자 성준이 조심스레 물었다.
―도련님, 회장님은 좀 어떠십니까? 말씀은 하실 수 있으세요?
“아직이요. 어제랑 똑같이 눈 깜박거리고 손가락 조금 움직이는 것 정도예요. 그래도 의사 선생님 말로는 굉장히 희망적이래요.”
―다행입니다. 회장님은 강한 분이시니 반드시 툭툭 털고 일어나실 겁니다.
“그럼요. 분명 그러실 거예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성준이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서재인 씨는 괜찮으십니까?
“네? 서재인 씨는 갑자기 왜요?”
가뜩이나 재인과 연락이 닿지 않아 걱정인 와중에 성준이 뜬금없이 재인의 안부를 묻자, 도혁은 가슴이 철렁했다.
―유라 씨가 그러는데, 어젯밤에 통화할 때 서재인 씨 목소리가 너무 안 좋았다고 해서요.
“그래요?”
도혁은 어제 재인과 있었던 시간을 되돌려 보았다.
확실히 뭔가 좀 이상하긴 했다.
그래도 곧 씩씩한 모습으로 돌아와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는데.
―울먹이는 것 같았는데, 유라 씨가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봐도 괜찮다는 말만 하면서 급히 전화를 끊어버렸다고 합니다.
“울먹였다고요?”
뭔가 문제가 있는 게 확실한 것 같다.
―네. 서재인 씨가 평소와 너무 달라서 걱정된다고 만나봐야겠다고 했습니다. 도련님은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그럼 전 열차 시간이 다 돼서.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잘 다녀오세요.”
성준과 통화를 마친 도혁은 곧장 재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또 부재중 전화로 넘어갔다.
[서재인 씨, 무슨 일이 있어? 대체 왜 연락이 안 되는 거야?]
답답한 마음에 읽지도 않는 메시지를 또 남겼다.
어떻게 해도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덜컥 겁이 난 도혁은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그즈음, 차대산 회장의 병실에서는 차주영이 차 회장의 팔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아휴, 우리 아버지 이러다 뼈밖에 안 남겠네. 왜 이렇게 마르셨어.”
“……주영아.”
“왜요?”
무심코 대답한 차주영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침대를 비스듬히 올린 채로 기대어 앉은 차 회장의 눈빛에 생기가 느껴졌다.
“아버지? 지금 저 부르신 거예요?”
차 회장이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여기 너밖에 더 있냐?”
들릴 듯 말 듯 희미한 목소리였지만 발음만큼은 또렷했다.
차주영은 왈칵 눈물을 쏟으며 차 회장을 끌어안았다.
“아버지, 고마워요! 이제 됐어요!”
“……숨 막혀. 놓고 얘기해.”
“아, 죄송해요. 너무 흥분해서 그만.”
차주영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차 회장은 그제야 숨을 크게 들이쉬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어서 도혁이랑 연지한테 연락해야겠어요. 아, 정환 오빠한테 먼저 해야겠다.”
차주영이 휴대전화를 꺼내 들자 차 회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깐만.”
“네? 왜요?”
“가까이 좀…….”
“뭔데 그러세요?”
차주영은 몸을 기울여 차 회장의 입가에 귀를 가져다 댔다.
차 회장이 무언가 웅얼거렸다.
잠시 후, 차주영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맙소사! 정환 오빠랑 진혁이가 정말 그랬다고요?”
“더 잘못된 길로 가기 전에 말려야 해.”
“그래야죠. 그나저나 윤세정이랑 진혁이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건 정말 충격이네요. 무슨 막장 드라마도 아니고.”
차주영이 혀를 내둘렀다.
“일단 정환이랑 진혁이한테는 내 의식이 완전히 돌아왔다는 건 비밀로 하자.”
“왜요?”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건지 알았으니 막을 방법을 궁리해봐야지.”
“알았어요. 제가 도울 일은 없어요?”
차주영의 말에 차 회장은 몇 가지 당부를 하고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도혁이를 불러다오.”
* * *
‘서재인 씨,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야?’
도혁은 창밖을 바라보며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 전 민우를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
「재인이가 차 팀장님한테 얘기 안 하던가요? 아침에 서연이한테 머리 좀 식히고 싶다면서, 며칠 휴가 내고 여행이나 다녀올까 한다고 했어요. 아마 벌써 떠났을걸요?」
곧장 유라에게도 전화를 걸어봤는데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갑자기 말도 없이 여행이라니!
대체 왜?
대체 어디로?
도혁은 연락이 되지 않는 재인이 걱정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광주에 내려갔을지도 몰라.’
도혁은 지체 없이 재인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차도혁 씨가 무슨 일인가요?
“아…….”
도혁은 냉랭한 반응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차도혁 씨?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차 서방’이라고 다정하게 불러주셨는데.
“바쁘실 텐데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혹시 재인 씨가 집에 내려갔나 해서요.”
―재인이 여기에 없어요.
“아아, 그렇군요. 재인 씨가 여행을 갔다고 하는데, 아침부터 연락이 안 돼서요. 죄송하지만 혹시 연락이 오면 저한테 꼭 전화 좀 해달라고 전해주시겠어요?”
건너편에서 아무 말이 없었다.
도혁은 괜스레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가게 이전 준비 때문에 바쁘실 텐데 제가 방해를 했네요. 그럼 이만…….”
―차도혁 씨, 재인이가 아무 얘기도 안 하든가요?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무슨 얘기를 말입니까?”
―이번 주에 우리 가게 이전하기로 한 거 취소됐어요.
“네? 그럴 리가 없는데…….”
도혁은 머리가 멍해졌다.
사실 재인의 부모님이 이전하기로 되어 있던 화순 교외의 카페는 도혁이 성준을 통해 미리 손을 써둔 곳이었다.
건물주가 재인의 부모님에게 파격적인 조선으로 임대를 하되, 도혁이 그에 따른 차액을 책임지는 것으로.
그런데 아직 건물주로부터 아무런 연락도 받은 게 없었다.
―그럴 리가 없긴요! 차도혁 씨 할아버지가 가게 건물을 매입해서,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했잖아요!
“할아버지가요?”
―대산그룹이고 뭐고, 돈 좀 있다고 남의 인생을 이렇게 함부로 망가뜨려도 되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우리 재인이가 뭐가 어때서. 우리도 그런 몰상식한 집안에 절대 재인이 안 보낼 거니까, 차대산 회장님한테 걱정 마시라고 전해요!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지 재인의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우리도 그렇지만, 재인이가 이 사실을 알고 얼마나 자책하고 속상해했겠어요.
“……죄송합니다.”
―재인이한테 더는 그런 일 겪게 하고 싶지 않아요.
“분명 뭔가 착오가 있는 걸 겁니다. 제가 다 바로잡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필요 없어요. 진짜 재인이를 위한다면 더는 힘들게 하지 말고 놔줘요.
“네?”
재인의 어머니가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차도혁 씨, 내가 부탁 하나 할게요. 더 이상 우리 재인이 찾지 말아요. 며칠 내로 일본으로 떠날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