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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할아버지가 깨어나셨어! (114/129)


113화. 할아버지가 깨어나셨어!
2023.07.01.


아아.

재인의 눈에서 미처 막지 못한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서재인 씨, 왜 그래?”

도혁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아, 아니에요.”

재인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눈물을 훔쳤다.


“정말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야?”

“그냥…… 할아버님이 걱정돼서요.”

“괜찮을 거라니까, 바보 같긴.”

도혁은 재인을 살며시 가슴에 안았다.


“걱정하지 마. 할아버지 꼭 깨어나실 거야.”

“팀장님…….”

“내가 대산그룹을 이어받는 걸 그토록 바라셨던 분이야. 할아버지가 그 장면을 절대 놓치실 리 없어.”

“……!”

“그러니까, 믿고 기다려보자.”

도혁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재인은 간신히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끝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도혁이 꿈꾸는 미래에는 재인의 자리가 없다는 것을.

* * *

월요일, 아침 회의를 끝내고 자리에 돌아오자마자 재인이 규민에게 물었다.


“한 과장님, 혹시 지금 시간 좀 괜찮으세요? 프로젝트 관련해서 상의드릴 게 있어서요.”

“아, 괜찮아요. 그럼 회의실에서 얘기할까요?”

“네, 감사합니다.”

규민은 먼저 회의실로 들어갔다.

뒤따라온 재인은 그의 앞에 서류 뭉텅이를 내려놨다.


“이게 뭐죠?”

“프로젝트 관련된 서류들 정리해놓은 거예요. 자세한 건 다 표시해놨으니 보시면 바로 아실 거예요.”

규민이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이 많은 걸 언제 다 했어요?”

“주말에요.”

“고생 많았겠네요. 근데 갑자기 이걸 왜……?”

“원본 파일과 관련 자료들은 전부 공유 폴더에 넣어뒀어요. 그거면 앞으로 업무 진행에 문제없을 거예요. 제품 라인도 다 정리됐고. 이제 마무리 단계니까, 여기 일정표대로만 체크해 주시면 다음 달 출시까지 순조롭게 잘 진행될 거예요.”

어딘가 평소답지 않은 재인의 모습에 규민은 걱정이 앞섰다.


“서 주임, 왜 그래요? 그만둘 사람처럼.”

“…….”

서류를 넘기던 재인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설마?

규민이 다급히 물었다.


“서 주임, 무슨 일 있어요?”

“……규민아, 친구로서 부탁 하나 해도 돼?”

갑자기 재인이 이름을 부르자 규민은 가슴이 철렁했다.

재인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무슨 부탁인데?”

“이번 프로젝트, 팀장님한테 정말 중요하거든? 그러니까 내가 없어도 프로젝트 끝까지 잘 마무리해줘.”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없다니?”

“아직 아무도 모르니까 너만 알고 있어.”

“팀장님은 아시는 거야?”

재인은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규민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규민이 조심스레 물었다.


“재인아, 너 설마…… 팀장님이랑 헤어진 거야?”

“……아직은 아니야.”

“그럼?”

“내가 옆에 있으면 팀장님 일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 내가 먼저 떠나려는 거야.”

규민의 눈이 커졌다.


“이번 스캔들 때문에 그래? 그건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들 거니까 신경 쓰지 마.”

“그것 때문이 아니야. 자세한 건 묻지 말아줘.”

“앞으로 어쩔 생각인데?”

“일본에 일찍 들어갈까 해. 어차피 3월 중에는 가야 하는 거 조금 당기는 거지, 뭐.”

“그래도…….”

“그럼 프로젝트 잘 부탁할게, 규민아.”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재인의 모습에 규민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날 저녁, 재인과 도혁은 병원에 가기 전에 잠시 회사 뒤편에 있는 강가를 산책했다.

강을 따라 난 산책길에는 화려한 전구를 휘감은 가로수가 양옆으로 쭉 늘어서 있어 낭만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그 덕분인지 강바람이 찬데도 팔짱을 낀 채 꼭 붙어 다니는 연인들이 많았다.

묵묵히 걷던 도혁이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도혁이 그렇게 웃는 건 오랜만이라 재인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팀장님, 갑자기 왜 웃으세요?”

“이렇게 걷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이 나서.”

“아…… 그렇네요.”

그 옛날이란, 재인이 막 도혁의 집에서 살기 시작했을 무렵 있었던 회식 때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날 재인은 잠시라도 도혁에게서 벗어나고 싶어서 혼자 산책을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굳이 도혁이 따라붙어서 춥다고 하는 재인에게 코트까지 벗어줬었다.


 


“나 처음이었어.”

“뭐가요?”

“여자한테 옷 벗어준 거.”

재인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춥다고 한 게 옷을 벗어달라는 뜻이 아니었는데……. 그때 많이 추우셨죠?”

“전혀. 땀이 다 났었는걸.”

“정말요? 그날 되게 추웠는데…….”

“너무 긴장해서 추운 줄도 몰랐어.”

도혁이 괜스레 옷깃을 세우며 말했다.


“둘이서 나란히 걸으니까 왠지 데이트하는 것 같았어서…….”

쑥스럽게 웃는 도혁을 보자 재인은 심장이 저릿했다.

갑자기 도혁이 재인의 손에 깍지를 끼고 제 코트 주머니 속에 넣었다.


“아아, 서재인 씨랑 이럴 수 있다는 게 아직도 가끔 믿기지가 않아.”

“…….”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때 가뜩이나 나 팀장님이 신경 쓰이는데 한 과장까지 나타났지, 서재인 씨는 나만 보면 불편해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일본에 유학 가면 영영 다시 못 만날 것 같지……. 정말 어떻게 서재인 씨를 붙잡아야 할지 몰라서 너무 막막했었거든.”

그때를 떠올렸는지 도혁의 눈에 씁쓸한 빛이 스쳤다.


“그런 줄 몰랐어요.”

“아, 차도혁 인생에 원해도 안 되는 게 있구나, 라는 걸 서재인 씨가 처음으로 가르쳐줬어. 그래도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결국 서재인 씨랑 사귀게 됐으니 원하는 대로 다 된 거네?”

“팀장님.”

재인은 가만히 도혁을 올려다봤다.

도혁이 다정한 눈길로 그녀를 마주 봤다.


“왜?”

“약속 하나만 해주세요.”

“뭔데?”

“제가 없어도…… 꼭 잘 지내셔야 해요.”

“서재인 씨가 없다니?”

도혁의 눈이 커지더니 이내 부드럽게 휘었다.


“날 뭘로 보고. 당연히 서재인 씨 없이 나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지.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아아, 그렇네요. 제가 괜한 걱정을…….”

재인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때, 도혁이 주머니 속 재인의 손을 더 꽉 힘주어 잡았다.


“이제 평생 서재인 씨랑 함께할 건데 잠시 떨어져 있는 게 뭐 대수라고.”

“네?”

“뭐야, 서재인 씨 일본 갈 거라고 벌써부터 겁주는 거야?”

“……그런 거죠.”

재인이 눈길을 돌리자 도혁이 짓궂게 말했다.


“걱정할 건 내가 아니라 서재인 씨 같은데? 이 잘생긴 얼굴 보고 싶어서 매일 우는 거 아냐?”

“맞아요. 분명…… 그럴 거예요.”

도혁이 한쪽 눈썹을 끌어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서재인 씨, 지난번부터 지나치게 솔직한 게 좀 이상한데?”

“제가 뭘요.”

도혁은 시무룩해 보이는 재인을 품 안에 꼭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떨어져 있을 게 걱정돼? 일본 정도야 언제든 갈 수 있는 거리잖아. 내가 자주 가면 되지.”

“그러시면 안 돼요.”

“나 능력자인 거 몰라?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나만 믿어. 서재인 씨는 학업에만 열중하면 돼.”

재인은 고개를 들어 도혁의 눈을 마주 봤다.


“팀장님, 그럼 잘 지내겠다고 약속하신 거예요?”

“응. 약속할게.”

재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도혁은 그 사랑스러운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서재인 씨, 고마워.”

“뭐가요?”

“힘들 때 옆에 있어 줘서. 서재인 씨 아니었으면 나 벌써 무너졌을지도 몰라.”

“아니에요, 제가 뭘 했다고…….”

“아주 큰일을 했지. 서재인 씨 아니었으면 다시는 할아버지를 못 볼 뻔했잖아.”

도혁이 눈빛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언제든 할아버지가 깨어나시면, 나 바로 서재인 씨와 결혼하겠다고 말씀드릴 거야.”

“결혼이요?”

“응. 이번 일로 더 확신이 들었어. 난 서재인 씨 아니면 안 돼.”

“팀장님…….”

재인은 눈시울이 젖어 드는 걸 느꼈다.

어떻게든 도혁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입술을 감쳐문 그때였다.

돌연 도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병원에 먼저 가서 차 회장의 곁을 지키고 있을 연지였다.


“무슨 일이야?”

불안으로 격양된 도혁의 목소리를 제치고 연지의 울먹이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오빠! 할아버지가 깨어나셨어!

“뭐? 그게 정말이야?”

―갑자기 눈을 뜨시더니 손짓을 하셨다니까. 암튼 오빠, 빨리 병원으로 와!

“알았어. 지금 출발할게.”

도혁은 기쁨에 들떠 재인을 쳐다봤다.


“서재인 씨?”

옆에서 듣고 있던 재인의 눈에서는 이미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도혁도 덩달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가자!”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 * *

VIP 병실 문을 열자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병실 안에는 차주영과 연지가 차 회장의 옆에 서 있었다.

차 회장은 가늘게 눈을 뜬 채로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호흡하고 있었다.

도혁을 본 차주영이 눈물을 훔치며 반겼다.


“도혁이 왔니? 재인 씨도 와줘서 고마워요.”

“고모, 할아버지는 괜찮으신 거죠?”

도혁이 다급히 물었다.

차주영은 눈물 닦던 휴지로 팽, 하고 코를 풀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좀 멍하신 상태야. 의사 선생님이 그러는데 의식이 완전히 돌아오고 말을 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대. 그래도 눈을 뜨신 게 어디니.”

“정말 다행이에요.”

도혁은 차 회장에게 다가가 살며시 차 회장의 손을 잡았다.


“할아버지, 제가 다 잘못했으니까 어서 기운 차리시고 혼내주세요.”

마치 응답이라도 하듯 차 회장의 손가락이 꿈틀했다.

순간 도혁은 울컥 솟구치는 눈물을 참느라 눈에 힘을 줬다.


“재인 언니는 왜 거기 서 있어요? 어서 이리 오세요.”

연지가 문가에 서 있는 재인을 발견하고 팔을 잡아끌었다.

주춤주춤 병상 옆에 선 재인은 편안해 보이는 차 회장의 눈빛에 마음이 놓였다.

그녀의 눈에서 안도의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에 재인의 안에 있던 차 회장에 대한 서운함이나 원망 같은 감정들이 모조리 씻겨 내려갔다.


‘할아버님, 그동안 정말 죄송했어요. 이제부터는 저 때문에 신경 쓰실 일 없을 테니 마음 편히 건강하게 지내세요.’

재인은 차 회장을 바라보며 속으로 읊조렸다.

그리고 도혁을 볼 때마다 흔들렸던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연지가 차 회장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할아버지, 재인 언니 왔어요. 재인 언니 아니었으면 할아버지 정말 큰일 날 뻔했잖아요.”

갑자기 차 회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재인을 확인한 차 회장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손가락을 달싹거렸다.

재인은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차 회장의 손짓이 마치 ‘네가 여기에 왜 있어!’라고 질책하는 것만 같아서.

기적처럼 차 회장이 깨어난 지금, 또다시 그를 괴롭게 할 수는 없었다.

재인은 황급히 뒤로 돌아섰다.


“죄송하지만 저는 이만 먼저 들어가 볼게요.”

차주영은 재인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 서재인 씨 괜찮아요? 안색이 안 좋은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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