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왜 이렇게 솔직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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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왜 이렇게 솔직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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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왜 이렇게 솔직하지?
2023.06.27.
도혁과 헤어지라는 엄마의 말에 재인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건 안 돼요!”
―난 돈 좀 있다고 이렇게까지 몰상식하게 구는 집안에 우리 딸 못 보낸다. 네가 뭐가 부족해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니?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엄마, 그래도…….”
―우리 걱정은 하지 말고 너나 잘 챙겨. 가게는 다른 곳에 구하면 되니까 혹시라도 차 회장한테 가게 돌려달라고 구걸하지 말고.
“엄마아!”
―그리고, 차도혁 씨 얼굴 보기 껄끄러울 테니 그깟 회사 때려치우고 유학 가기 전까지 내려와 있어. 알았지?
“아,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엄마가 다시 한번 못을 박았다.
―재인아, 엄마 입 아파서 세 번은 말 안 한다. 차도혁 씨 깨끗하게 정리하고 내려와.
“네? 엄마, 잠시만요!”
―끊는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한마디를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엄마가 엄청나게 화났다.
평소에는 쾌활하고 온화한 성품의 엄마지만, 참다가 터지면 무시무시했다.
재인이 엄마가 폭발하는 걸 처음으로 본 것은 입양된 첫해였다.
명절에 모인 집안사람들이 일부러 들으라는 듯 고아라고 수군댔을 때.
그때 늘 싹싹하고 고분고분하던 종손부의 무시무시한 면목을 본 집안사람들은 이후, 아무도 대놓고 고아 소리를 꺼내지 못했다.
그다음은 중학교 때.
공부는 물론 이모저모 다재다능한 재인을 질투한 못된 무리가 어디서 들었는지 고아라는 소문을 퍼트리며 괴롭혔을 때였다.
엄마는 방관하는 선생들과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는 상대측 학부모들에게 철저하게 짠 복수 10개년 계획을 보여줌으로써 깨갱 하게 만들었다.
‘이렇게까지 화내시는 건 그때 이후로 처음인데…….’
그렇다면, 도혁과 헤어지라고 한 것도 그냥 던진 말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가뜩이나 차씨 집안의 반대로 힘든데 엄마까지 반대하고 나서다니.
‘이제 정말 어떻게 하지?’
재인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잠시 창가에 걸터앉았다.
손에 쥔 휴대전화가 지이잉 지이잉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재인은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서재인 씨?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목소리였다.
“네, 제가 서재인인데…… 누구세요?”
―나, 차진혁입니다.
순간 재인은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무슨…… 일이신데요?”
―전화로 할 얘기는 아니고, 곧 퇴근 시간이니 잠깐 봅시다.
“제가 차진혁 씨와 할 얘기는 없는 것 같은데요.”
건너편에서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서재인 씨는 부모님 일이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하지 않나 봐요?
“네?”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싶으면 도혁이 형한테는 말하지 말고 혼자 나와요. 그럼 이만.
“저기, 잠시만요!”
재인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전화가 뚝 끊겼다.
곧이어 시간과 장소가 적힌 메시지가 날아왔다.
* * *
퇴근 후, 재인은 회사에서 두 블록 떨어진 조용한 카페 구석 자리에 앉아 진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멍하니 문만 쳐다보기를 20여 분, 드디어 진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혁은 재인에게 다가와 다짜고짜 물었다.
“혼자 온 거 맞죠?”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미안한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진혁이 자리에 앉자마자 재인이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주세요.”
“진정해요. 급할 것 없으니까.”
사람을 가지고 노는 듯한 진혁의 태도에 재인은 분통이 터졌다.
“차진혁 씨, 대체 우리 부모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난 그저 할아버지 부탁을 들어드렸을 뿐이에요. 서재인 씨가 쫓겨난 날, 할아버지가 도혁이 형한테서 그쪽을 확실하게 떼어내 달라고 하셨거든.”
“차진혁 씨 말, 못 믿겠어요.”
진혁이 ‘이것 봐라’ 하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말로는 안 통하니 가족을 손보는 수밖에 없다고도 하셨는데?”
“거짓말 말아요. 회장님은 그렇게까지 하실 분이 아니에요.”
진혁을 기다리는 동안 재인은 이미 마음속으로 정리를 끝낸 상태였다.
아무리 재인과 도혁을 떼어놓기 위해서라도, 차 회장이 그런 비열한 방법을 쓸 사람 같지는 않았다.
만약 차 회장이 쓰러진 틈을 타 진혁이 일을 꾸민 거라면? 오히려 이 시나리오가 더 납득이 갔다.
도혁을 모함한 일도 그렇고, 재인을 쫓아냈을 때를 생각해본다면 진혁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니까.
“거짓말이라…….’
진혁이 조소 띤 얼굴로 이죽거렸다.
“서재인 씨, 할아버지를 얼마나 봤다고 그렇게 확신하지? 원래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분이에요, 우리 할아버지가.”
“그래도…… 이렇게까지 바닥을 보이실 분이 아니란 건 알아요.”
만만치 않은 여자야.
진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재인에게 파일 하나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것은 바로 차 회장과 도혁이 작성한 계약서였다.
“잘난 척하긴. 그거나 확인해보고 멋대로 떠드시죠?”
“이건……?”
계약서를 읽어 내려가는 재인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차 회장과 도혁이 작성한 계약서, 심지어 공증까지 받았다.
재인은 차 회장과 도혁이 자신을 두고 내기를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한 달간 차 회장이 자신에게 기회를 준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런 기막힌 내막이 있었다니.
계약서에는 한 달 뒤에도 차 회장이 재인을 반대하면 도혁이 재인을 깨끗이 포기한다고 쓰여 있었다.
만일 도혁이 계약을 위반하면 후계자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고도.
“두 사람 사랑이 엄청 대단한 줄 알았는데 고작 한 달짜리 시한부였네요? 고작 그것 때문에 할아버지가 쓰러지셨다니. 나 참, 기가 막혀서.”
충격으로 할 말을 잃은 재인에게 진혁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전에 똑똑히 들었죠? 할아버지가 도혁이 형 집에 들어간 건 두 사람을 갈라놓기 위해서라고, 나한테 그렇게 말씀하셨던 거. 할아버지는 애초에 두 사람을 인정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는 얘기지.”
“팀장님한테 확인해보기 전에는 아무것도 안 믿을 거예요.”
재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능글맞게 웃던 진혁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서재인 씨, 설마 순진하게 도혁이 형이 후계자 대신 서재인 씨를 택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
“평생 후계자가 되기 위해 살아온 형이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삶을 망칠 것 같아요? 착각하지 마요. 도혁이 형한테 그쪽은 계약서에 나와 있는 대로 한 달간 노력해보고 안 되면 그만인 존재일 뿐이니까.”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진혁의 말이 거짓인 줄 알면서도, 재인은 가슴에 날카로운 비수로 후벼 파인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재인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진혁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쓰러지기 전날, 본인 건강에 이상이 느껴졌는지 이 계약서를 맡아달라고 하셨어요. 도혁이 형이 혹시라도 당신이랑 안 헤어질까 봐 걱정돼서 증인이 되어달라고 준 거였다고요.”
“차 회장님이 정말 그러셨다고요?”
“아니면, 내가 여기 심심해서 놀러 나온 것 같아요?”
믿고 싶지 않은 사실 앞에 재인은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쪽이 아직도 형 옆에 있는 걸 알면 할아버지가 참 속상하시겠어. 난 쓰러져 계신 할아버지가 불쌍해서라도 당신 인정 못 해요. 다른 식구들도 이 계약서를 보면 나와 같은 마음일걸?”
진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덧붙였다.
“이제 당신이 옆에 있으면 도혁이 형이 후계자가 될 수 없다는 건 알았을 테고, 어떻게 하는 게 진짜 형을 위한 일인지 잘 생각해봐요.”
말을 마친 진혁은 계약서가 든 파일을 챙겨 들고 유유히 사라졌다.
재인은 건드리면 무너질 것 같은 모습으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 * *
그날 저녁.
재인은 차 회장의 병실에 들렀다.
도혁은 VIP실 한쪽에 놓인 테이블에 노트북을 펴놓고 일을 하고 있었다.
“팀장님, 저 왔어요.”
재인을 보자 도혁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어디 들렀다 온다고 하더니 일은 잘 보고 왔어?”
“……네. 할아버님은 좀 어떠세요?”
“아직이야. 좀 더 기다려봐야지.”
재인은 병상으로 다가가 차 회장의 옆에 앉았다.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깊은 잠에 빠진 듯 누워 있는 차 회장을 보자 재인은 더 슬퍼졌다.
‘할아버님, 꼭 저희 부모님까지 힘들게 만드셔야 했어요? 제가 그렇게 싫으셨어요?’
차 회장이 진혁에게 도혁과의 계약서를 넘기고 재인의 가족을 압박하면서까지 그녀가 도혁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를 바랐다니.
그 사실이 재인은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한바탕 원망이 휩쓸고 지나가자 이내 감당하기 버거운 죄책감이 몰려왔다.
‘죄송해요, 할아버님. 제가 없었으면 차도혁 씨와 갈등을 빚을 일도, 이렇게 쓰러지실 일도 없었을 텐데…….’
날 이렇게 만들어놨으면서, 왜 아직도 도혁의 옆에 있는 거냐고 차 회장이 질책하는 것만 같았다.
재인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옆에 있던 도혁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할아버지 꼭 깨어나실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재인은 가만히 도혁을 쳐다봤다.
도혁은 일부러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왜? 다시 봐도 너무 잘생겼어?”
“네.”
“뭐야, 그새 또 반하기라도 한 거야?”
“네.”
“이상한데……. 서재인 씨, 오늘따라 왜 이렇게 솔직하지? 무슨 일 있었어?”
도혁이 피식 웃으며 재인의 머리를 토닥였다.
재인은 다정한 그의 손길에 울컥 목이 메었다.
“아니에요. 일은 무슨…….”
진혁과 만났던 일을 도혁에게 차마 말할 수 없었다.
‘팀장님, 어떻게 할아버님과 그런 계약을 할 수가 있어요? 정말 한 달 뒤에 헤어질 각오까지 했었던 거예요?’
속 시원하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막상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도혁을 보니 다 부질없는 짓 같았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재인 역시 짐작할 수 있었다.
막무가내로 정략결혼을 밀어붙이는 차 회장과 담판 짓기 위해 도혁이 무리수를 둔 것이라고.
자신을 향한 도혁의 진심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음을 알기에 진혁의 막말을 있는 그대로 믿지도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질문이 줄곧 재인을 괴롭히고 있었다.
‘만약 정말 나와 대산그룹 중에 선택해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팀장님은 어느 쪽을 선택할까?’
백번 생각해봐도 답은 명확했다.
‘당연히 대산그룹이지.’
매번 같은 답만 나오는데도 계속 혼자 되묻고 있었다.
도혁이 없는 나날을 맞이하는 게 겁이 나서.
그럴 리 없지만, 만에 하나 도혁이 모든 걸 내려놓고 자신을 택한다 해도, 재인은 그 무게를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거야말로 도혁의 앞길을 막는 일이니까.
쓰러져 있는 차 회장을 생각하면 더더욱 못 할 짓이었다.
팀장님과 할아버님의 삶을 망가뜨렸다는 죄책감이 평생 따라다닐 거야.
시간이 지나면 팀장님도 후계자를 포기한 걸 후회할지도 몰라.
자기 발목을 잡았다며 날 원망하겠지?
……결국 둘 다 행복해질 수 없을 거야.
재인은 끝없이 조잘대는 생각에 한 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이, 몹시도 서글펐다.
그리고 끝내, 재인이 끝까지 외면하고 싶었던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정말 팀장님을 위한다면 이쯤에서 물러나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