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이쯤에서 끝내 (112/129)


111화. 이쯤에서 끝내
2023.06.24.



“팀장님이 안 계시니 사무실이 너무 허전하네. 역시 팀장님이 계셔야 팀 내 기강이 딱 잡히는데 말이야.”

아침부터 박 과장이 재인보고 들으라는 듯 아부성 발언을 날렸다.

하는 말과 달리 눈치 볼 사람이 없어서인지 요 며칠 새 얼굴이 확 핀 박 과장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인은 어두운 얼굴로 말없이 노트북 자판만 두드렸다.

차대산 회장이 쓰러진 지 벌써 사흘이 지났다.

그사이 VIP실로 옮겼지만 여전히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도혁은 회사에 휴가를 내고 줄곧 차 회장 곁을 지키고 있었다.

재인은 연지와 함께 퇴근길마다 도혁에게 들렀다.

도혁은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간신히 숨을 이어가고 있는 차 회장을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그 눈빛에서 그가 얼마나 할아버지를 사랑하는지가 느껴져 재인은 가슴이 아렸다.

도혁은 재인이 같이 있겠다고 해도, 매번 프로젝트 마무리에 힘써달라며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재인도 알고는 있었다.

도혁이 자신을 배려해 혼자 있겠다며 돌려보냈다는 것을.

그런데도 자꾸만 쓸데없는 생각들이 치고 올라왔다.

팀장님이 할아버지에게 미안해서 나와 거리를 두는 건 아닐까?

일이 이렇게 돼서 날 만난 걸 조금은 후회하고 있지 않을까?

…….

그 시작은 차 회장이 쓰러진 날, 재인이 중환자실 복도에서 도혁과 성준의 대화를 몰래 엿들었을 때부터였다.

그 밤, 도혁이 울먹이며 했던 말이 아직도 재인의 귓가에 생생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싶었던 것뿐인데…….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여자한테 정신 팔려서 애지중지 키워준 할아버지를 저버렸다고 생각하셨겠죠.」

「할아버지가 이대로 깨어나지 못하시면, 제가 저를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아요.」

그때, 재인은 곧장 달려가 도혁을 안아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차 회장이 쓰러진 것부터 도혁이 괴로워하는 것까지, 죄다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서.

결국 재인은 쌀쌀한 병실 복도에서 밤을 지새울 도혁을 위해 산 핫팩과 간식을 전하지도 못한 채 돌아서야만 했다.

재인은 서글펐던 그 밤을 떠올리며 불 꺼진 팀장실을 쳐다봤다.

벌써 사흘째, 앞으로 얼마나 더 있어야 팀장님이 제 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까.


‘이러다 할아버님이 정말 깨어나지 못하시면 어떡하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재인은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니야! 할아버님은 반드시 깨어나실 거야.’

재인은 불길한 생각을 떨치려 고개를 내저었다.

애써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일을 시작하려던 그때였다.

갑자기 사무실 문이 활짝 열리더니 뜻밖에도 휴가 중이어야 할 도혁이 걸어 들어왔다.

박 과장이 흠칫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팀, 팀장님? 다음 주부터 출근하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그럼.”

도혁은 굳은 얼굴로 팀장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박 과장의 얼굴에 좋다 말았네, 하는 표정이 스쳤다.

재인은 남들 눈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팀장실로 따라 들어갔다.

도혁은 의자에 기대어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재인이 다가가 물었다.


“팀장님, 괜찮으세요?”

“응. 좀 피곤해서.”

도혁은 그제야 눈을 뜨고 재인을 바라봤다.

희미하게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이 부쩍 수척해 보였다.


“할아버님은 좀 어떠세요?”

“아직도 기다리는 중이야. 고모가 계시겠다고 해서 왔어.”

“그럼 집에 가서 좀 쉬지 그러셨어요.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을 텐데…….”

“일이 많이 밀렸잖아. 계속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재인은 안쓰러운 마음에 도혁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물끄러미 재인을 올려다보던 도혁이 갑자기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눈을 감은 채 재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말했다.


“잠시만, 잠시만 이러고 있을게.”

도혁의 목소리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재인은 그의 머리를 살며시 감싸 안았다.

그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막막했다.

사방이 꽉 막힌 미로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아아,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도혁이 재인을 끌어안은 팔에 더 힘을 주며 중얼거렸다.


“이러고 있으니까 피로가 싹 풀리는 것 같아. 역시 난 서재인 씨가 아니면 안 돼.”

“팀장님…….”

“진짜…… 서재인 씨가 아니면 안 된다고…….”

나직이 내뱉은 도혁의 마지막 말이 괜스레 서글프게 들리는 재인이었다.

* * *

그 시각.

진혁은 본가에 들러 차 회장의 서재를 뒤지고 있었다.

본가에는 집사를 비롯해 집안일을 돕는 이들이 몇 명 상주해 있었다.

하지만 차 회장이 쓰러진 마당에, 그의 아들인 대산그룹 대표 차정환의 이름을 걸자 아무도 감히 진혁을 저지하지 못했다.

진혁이 찾는 것은 3년 전에 차 회장이 미리 작성 두었다는 유언장과 개인 자산이 들어 있는 비밀 금고였다.

차 회장의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지금, 혹여라도 나중에 뒤통수를 맞지 않기 위해 미리 내용을 확인하고 손을 써두려는 것이었다.


‘분명히 서재에 있다고 했는데……. 잘도 꽁꽁 숨겨두셨군.’

유언장을 작성한 변호사를 매수해 서재의 비밀 금고에 보관하고 있다는 것까지는 알아냈다.

하지만 손쉽게 손에 넣을 줄 알았던 예상과는 달리, 금고가 어디에 있는지 찾지 못해 1시간째 헛수고만 하는 중이었다.


‘하긴, 까탈스러운 할아버지가 쉽게 눈에 띄는 곳에 놔둘 리가 없지.’

진혁은 짜증스레 책들이 빼곡히 꽂힌 책장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차 회장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진혁은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런데도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여자 하나 때문에 정신 못 차리는 도혁이 형이 문제야. 난 할아버지한테 현실을 일깨워 줬을 뿐, 아무 잘못 없어.’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끝낸 진혁의 발 앞에 무언가 툭, 하고 떨어졌다.

책장 끝에 끼어 있던 파일이었다.

무심히 파일을 열어본 그의 눈이 커졌다.


“이게 뭐야? 할아버지랑 도혁이 형이 계약을 했어?”

새해 첫날, 도혁이 차 회장과 재인에 관한 문제를 담판 지을 때 작성한 계약서였다.

계약서에는 차 회장이 한 달간 재인을 도혁의 여자친구로서 인정하고, 한 달 뒤에도 차 회장이 재인을 반대하면 도혁이 재인과 깨끗이 헤어지겠다고 약속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기가 막혀서! 차도혁, 정말 한 달이면 할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야? 이런 무모한 계약을 하다니, 그 여자한테 완전 정신이 나갔구나?’

대체 그 평범하기 짝이 없는 여자가 뭐라고.

서재인의 무엇이 철옹성 같았던 도혁을 무너뜨렸는지, 진혁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한 달 뒤에도 반대하면 정말 서재인이랑 헤어질 생각이었던 거야? 그렇게 좋다고 난리를 쳤으면서? 재밌군.’

비밀 금고는 찾지 못했지만 뜻밖의 소득이었다.

도혁이 할아버지가 쓰러져 심적으로 약해져 있을 때, 그때를 노려 타격 입힐 준비를 하고 있었던 진혁이었다.

바로 도혁이 푹 빠져 있는 서재인을 그에게서 떨어뜨리는 것.

이 계약서가 그 계획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할 것 같았다.


‘후계자 승계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여자 때문에 망가지는 차도혁이라니, 아주 볼만하겠는걸?’

계약서를 손에 쥔 진혁은 희열에 들떠 킥킥거렸다.

Rrrrrrr. Rrrrrrr.

떄마침 맞장구를 치듯 진혁의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진혁의 개인비서였다.


“어. 나야.”

―지시하신 일, 잘 마무리됐습니다. 팔 생각 없다고 버티던 건물주가 시세보다 후하게 쳐줬더니 바로 판다고 해서 오늘 계약 끝났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돈 앞에 안 넘어올 사람이 있겠어? 계약은 대산그룹 명의로 한 거 맞지?”

―네. 그쪽에도 차대산 회장님 지시라고 전했습니다.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진혁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그려졌다.


“자, 준비는 끝났고. 이제 서재인을 만날 일만 남았군.”

 

* * *

그날 퇴근 무렵, 재인은 엄마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세 통이나 온 걸 확인했다.

요 며칠 엄마에게 괜히 심려를 끼치고 싶지 않아 일부러 통화를 피했기에, 재인은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그나저나 엄마가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무슨 일이 있나?’

평소에는 근무 시간에 방해가 된다며 메시지도 잘 보내지 않는 엄마였다.

그런데 전화를 세 통이나 걸다니.

꽤나 급한 용건이 분명했다.

덜컥 겁이 난 재인은 다급히 복도로 나가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울리자마자 곧바로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재인아, 지금 통화돼?

“네, 엄마. 무슨 일이에요?”

―그게, 너한테 물어볼 게 좀 있어서…….

엄마의 목소리가 여느 때와 달리 착 가라앉아 있었다.


“뭔데요?”

―재인아, 우리, 다음 주에 가게 이전하기로 했었잖아.

“아, 그렇죠. 엄마 아빠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바쁘시겠어요.”

―조금 전에 이사 갈 곳 건물주한테서 계약 못 하겠다고 연락이 왔어. 위약금 물어줄 테니 딴 데 알아보라고.

재인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갑자기요? 그런 경우가 어디 있어요!”

―건물주가 바뀌었대. 새로운 건물주가 연락한 거였어.

“그게 누군데요?”

―대산그룹이래. 차대산 회장 지시라고 하더라.

“뭐라고요?”

재인은 전기에 감전된 듯 머리가 얼얼했다.


‘말도 안 돼! 할아버님은 지금 쓰러져 계시는데?’

제 귀로 똑똑히 듣고도 믿기지 않아 재인이 되물었다.


“분명히 차대산 회장님이라고 했어요?”

―그래. 너무 기가 막혀서 몇 번이나 물어봤어. 대기업에서 왜 화순 변두리 카페에 눈독을 들이는지 이해가 안 돼서.

“그럴 리가 없는데…….”

재인은 어떻게 된 건지 영문을 몰라 말끝을 흐렸다.


―다음 주에 옮겨야 하는데 갑자기 이러는 법이 어디 있냐고 따지니까, 그쪽에서 재인이 너한테 물어보면 알 거라고 하더라.

“저한테요?”

―재인아.

잠시 뜸을 들인 엄마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 일, 차 서방이랑 관련 있는 거지?

“……죄송해요.”

―역시 그랬구나. 차대산, 차도혁. 드문 성씨인데 같고 해서, 혹시나 싶은 마음에 차대산 회장을 검색해봤더니 차 서방이랑 얼굴도 많이 닮았더라. 차 서방이 대산그룹 차대산 회장 손자인 거지?

이제 와 숨긴다고 믿을 엄마가 아니었다.

재인은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네, 맞아요.”

―그래서 가게까지 건드린 거였구나…….

엄마는 또다시 말이 없어졌다.

곧 지금 가게 자리를 빼줘야 하는데, 이전할 곳이 없어졌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리라.


“엄마, 죄송해요. 저 때문에 이렇게 돼서…….”

재인은 부모님을 힘들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가슴 아파서 목이 메었다.


‘정말 할아버님이 벌인 일일까? 그럼 쓰러지시기 전에 이미 지시하셨었다는 거야?’

정말 차대산 회장의 지시가 맞는다면, 이는 재인에게 보내는 경고가 분명했다.

도혁과 헤어지지 않으면 재인은 물론 가족의 삶까지 망가뜨리겠다는 선전포고.

겉으로는 툭툭거려도 차 회장이 조금은 자신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던 재인은 충격으로 할 말을 잃었다.

모든 상황이 그건 자신의 헛된 망상일 뿐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재인아, 넌 내 소중한 딸이라는 거 알지?

잠자코 있던 엄마가 대뜸 물었다.


“……알아요.”

―그럼 됐다.

엄마가 서늘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서재인, 힘들더라도 차도혁 씨와는 이쯤에서 끝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