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다 내 탓이야
(111/129)
110화. 다 내 탓이야
(111/129)
110화. 다 내 탓이야
2023.06.20.
“서재인 씨, 괜찮아?”
도혁이 재인에게 달려와 다급히 물었다.
넋이 나간 채 벽에 기대어 앉아 있던 재인은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팀장님…….”
“어떻게 된 일이야?”
“할아버님이 부르셔서 팀장님 집에 갔는데 소파에 쓰러져 계셨어요.”
“할아버지는 어떠셔?”
“의식이 아직…….”
재인은 목이 메어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도혁이 얼빠진 얼굴로 털썩 의자에 앉았다.
지금, 재인과 도혁이 있는 곳은 한세병원 중환자실 앞이었다.
차 회장이 쓰러져 있는 것을 재인이 발견하고, 구급차를 불러 급히 이곳으로 이송해온 것이었다.
차 회장은 곧장 중환자실로 들어가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재인은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면서도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마치 악몽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잠시 후, 두 사람 앞에 성준이 담당 의사와 함께 나타났다.
“심인성 쇼크로 보입니다.”
담당 의사는 차분하게 차 회장의 상태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그래서, 현재로서는 의식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얼마나 말입니까?”
도혁의 물음에 담당 의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며칠이 걸릴지, 몇 달이 걸릴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몇 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최악의 상황까지도 대비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최악의 상황이라는 말에 재인은 가슴이 철렁했다.
“할아버지…….”
도혁의 얼굴이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마구 일그러졌다.
성준이 도혁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회장님이 얼마나 강한 분이신데요. 분명 깨어나실 겁니다.”
“제발 그래야 하는데…….”
불안해하는 도혁에게 의사가 말했다.
“그래도 초기에 발견하신 분이 CPR로 대처를 잘하고 곧장 중환자실로 옮겨 와서 일단 큰 고비는 넘겼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기다려 보죠.”
의사의 말에 성준이 재인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서재인 씨, 정말 감사합니다.”
“아, 아니에요.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재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혁이 살며시 재인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
그의 손에서 미세한 떨림이 전해져왔다.
도혁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불현듯 차 회장이 쓰러졌을 때 본 창백한 얼굴이 떠올라 재인은 숨이 턱 막혔다.
‘이번 스캔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셔서 쇼크가 온 걸 거야.’
어젯밤 차 회장과 도혁이 크게 싸운 일이 계속 마음에 걸렸던 재인이었다.
평소 심장병을 잘 관리해온 차 회장이 하루 새에 갑자기 쓰러졌으니 원인은 그것밖에 없을 것이다.
‘괜히 나 때문에 할아버지와 팀장님 사이가 멀어졌어. 이대로 영영 회장님이 깨어나지 못하시면 어쩌지?’
재인은 두려움에 이어 견디기 힘든 죄책감이 밀려왔다.
오늘 차 회장이 자신을 부른 것은 분명 도혁과 헤어지라고 얘기하려던 것이리라.
재인은 갑자기 도혁의 손을 잡고 있는 것조차 마음이 불편해져 슬그머니 손을 뺐다.
하지만 도혁이 도로 그녀의 손을 잡고 단단히 깍지를 꼈다.
희망의 끈을 붙잡기라도 하듯.
그 뒤로 한참을 도혁은 그렇게 중환자실을 바라보며 재인의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잠자코 지켜보던 성준이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도련님, 시간이 늦었는데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생각 없습니다.”
“안 됩니다. 기다리는 것도 체력이 있어야 할 수 있어요.”
“도저히 목에 넘어갈 것 같지 않아요.”
“그래도 다녀오세요. 서재인 씨 생각도 하셔야죠. 여기는 제가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
재인이 성준을 거들었다.
“그래요, 팀장님. 안색이 너무 좋지 않아요. 안 넘어가도 조금이라도 드셔야 해요.”
“…….”
두 사람의 설득에 도혁이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이 떨어지지 않는 걸 겨우 옮기려는데 요란스러운 발소리와 함께 차정환 부부와 진혁이 나타났다.
“도혁아,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대표님 오셨습니까.”
성준이 깍듯이 인사하자 차정환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자네가 여기 어쩐 일인가? 비서 일 그만두고 외국 나갈 준비한다고 들었는데?”
성준은 대외적으로 해외 이주를 위해 도혁의 비서를 그만둔 걸로 되어 있었다.
차정환을 방심하게 만들면서 몰래 뒤를 캐기 위해서였다.
“맞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회장님 일인데 달려와야죠. 20년 넘게 돌봐 주신 고마운 분이니까요.”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매정하게 관두나?”
“죄송합니다.”
쯧.
차정환은 탐탁지 않은 얼굴로 혀를 차고는 도혁에게 물었다.
“도혁아, 어떻게 된 건지 설명 좀 해봐라.”
“그래, 형. 대체 어떻게 했길래 할아버지가 쓰러지신 거야?”
진혁도 다그치듯 물었다.
‘당신들 때문이잖아!’
음모를 꾸미지 않았으면 차 회장이 재인을 쫓아내지도 않고, 차 회장과 부딪힐 일도 없었을 텐데.
도혁은 두 사람의 뻔뻔스러운 모습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맞은편에서 성준이 참으라는 듯 살짝 고개를 저었다.
도혁은 어금니를 질끈 깨물며 입을 열었다.
“거실에 쓰러져 계셨대요. 갑자기 심장에 무리가 갔나 봐요. 일단 고비는 넘겼는데 의식이 돌아오는 건 기다려 봐야 한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차정환이 미간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서재인 씨? 나 참, 기가 막혀서.”
진혁이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재인을 발견하고 눈을 부릅떴다.
“형, 어떻게 이런 와중에 여자를 불러들여? 할아버지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뭐야?”
“저 여자 때문에 신경 쓰느라 쓰러지신 거잖아! 형, 저 여자한테 아주 단단히 홀렸구나?”
“이 자식이! 함부로 얘기하지 마!”
도혁은 더는 참지 못하고 진혁의 멱살을 잡았다.
“도련님, 진정하세요!”
성준이 황급히 사이에 끼어들어 둘을 갈라놨다.
진혁이 넥타이를 고쳐 매며 이죽거렸다.
“왜? 내 말이 틀려? 어제 할아버지가 나한테 분명히 말했어.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저 여자랑 형을 갈라놓으려고 집에 들어왔는데 이제 다 소용없게 돼버렸다고. 형이 여자에 빠져서 이런 꼴이 됐다고 엄청 괴로워하셨단 말이야!”
“입 닥쳐!”
도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진혁의 엄마 김혜선이 끼어들었다.
“왜 진혁이한테 그래? 진혁이가 틀린 말 한 거 하나도 없는데. 여기가 어디라고 저 여자를 끌어들여?”
“서재인 씨가 할아버지를 발견해서 살린 겁니다!”
“병 주고 약 주니? 애초에 이런 일을 만들지 말았어야지!”
“작은어머니!”
“다들 그만해!”
차정환이 버럭 호통을 쳤다.
“지금 여자 하나 때문에 싸울 때가 아니잖아! 이런다고 아버님이 깨어나시는 것도 아니고, 가족이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웬 싸움질이야!”
여자 하나 때문에?
가족이 힘을 합쳐?
도혁은 가증스러운 꼴을 더는 참고 보기 힘들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성준이 안 된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이미 도혁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작은아버지, 이게 다……!”
“오빠! 할아버지 괜찮아?”
난데없는 목소리에 도혁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곧이어 연지가 달려와 도혁을 끌어안으며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오빠, 우리 할아버지 돌아가시면 어떡해! 난 못 살아!”
“…….”
당황한 도혁의 눈에 몰래 가슴을 쓸어내리는 성준이 보였다.
도혁은 뒤늦게 이성을 되찾았다.
“할아버지 괜찮으신 거지? 오빠가 어떻게든 살릴 거지?”
“……연지야, 일단 좀 떨어져 봐.”
도혁이 연지를 간신히 떼어내자 연지의 큼지막한 눈에서 눈물이 뚝뚝뚝 떨어졌다.
같이 온 연지의 엄마 차주영도 눈시울이 젖어 있었다.
“얘가 아버지 쓰러졌다는 얘기 듣고부터 계속 울어. 아버지는 좀 어떠셔?”
“의식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대요.”
“할아버지 괜찮으실 거야. 그럼, 우리 아버지가 누군데.”
차주영은 연지의 등을 토닥이며 주문을 걸듯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오빠 차정환 가족과 성준에게 인사를 한 차주영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재인을 가리키며 물었다.
“도혁아, 저기 앉아 있는 아가씨는 누구니?”
도혁은 그제야 한쪽 구석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죄인처럼 움츠리고 있는 재인을 보았다.
젠장!
요란한 가족들의 등장에 잠시 정신이 나가 있었다.
도혁은 황급히 재인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정식으로 차주영에게 재인을 소개했다.
“고모, 여기는 서재인 씨, 제 여자친구예요.”
“아, 그 서재인 씨?”
차주영도 어제의 사건을 연지에게 전해 들어 재인에 대해 알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차주영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는 재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서재인 씨, 반가워요!”
“네?”
재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도혁이가 여자친구라고 소개한 건 처음이라 흥분했네요. 난 도혁이 고모 차주영이예요.”
“아, 네.”
“심란한 상황에 만나서 마음이 좀 그렇긴 한데, 우리 앞으로 잘 지내봐요.”
“네,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해야죠. 도혁이 혼자 늙어 죽을까 봐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재인은 뜻밖의 환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도혁의 친척들은 분명 자신을 못마땅해할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연지와 꼭 닮은 차주영 덕분에 재인은 잔뜩 생채기가 난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차정환 부부와 진혁은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지켜보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 * *
그날 밤.
도혁은 같이 자리를 지키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재인을 억지로 보내고 중환자실 앞으로 돌아왔다.
성준이 홀로 남아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도혁은 성준의 옆에 힘없이 걸터앉았다.
“김 실장님도 그만 들어가세요.”
“아닙니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여기 있고 싶습니다. 차 회장님은 제 은인이시니까요.”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도혁은 굳게 닫힌 중환자실 문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을 말이 없던 도혁이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 저 때문인 것 같아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할아버지가 쓰러지신 거요. 제가 어제 너무 말이 심했어요.”
「어떻게 사람을 갑자기 내쫓을 수가 있어요? 할아버지한테 정말 실망했습니다!」
「이렇게 인정머리 없는 냉혈한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어차피 처음부터 이럴 속셈이었죠? 이번 일로 옳다구나, 하고 쫓아낸 거잖아요!」
도혁은 차 회장이 쓰러졌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부터 어제 퍼부었던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아 계속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연락하셨는데도 일부러 계속 무시했어요.”
“진심을 말씀드리면 회장님도 다 이해해 주실 겁니다.”
“그럴 기회가 있을까요?”
“……그럼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싶었던 것뿐인데…….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여자한테 정신 팔려서 애지중지 키워 준 할아버지를 저버렸다고 생각하셨겠죠.”
도혁의 눈에서 꾹 참아왔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성준은 도혁이 우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도혁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이대로 깨어나지 못하시면, 제가 저를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아요.”
“도련님…….”
성준은 소리 죽여 우는 도혁에게 차마 그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넬 수 없었다.
‘팀장님…….’
그 시각.
중환자실 복도, 꺾어진 벽에 기대어 재인도 같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