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그딴 거 알 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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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그딴 거 알 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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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그딴 거 알 게 뭐야
2023.06.17.
도혁이 씩 웃으며 물었다.
“그냥 가려고?”
“그, 그냥 안 가면요?”
“뭐 잊은 거 없어?”
도혁이 그윽한 눈빛을 날리며 재인에게 다가왔다.
또! 또! 또!
재인은 황급히 두 팔을 뻗어 도혁을 막아 세웠다.
“팀장님, 공과 사 구분하기로 한 거 잊으셨어요?”
“공사 구분? 난 동의한 적 없는데?”
맞다.
차도혁 씨는 장담 못 하겠다고 했었지.
그래도 그렇지!
“저희 사귀는 거 알아서 지금 밖에서 모두 주시하고 있을 거예요!”
“그렇겠지.”
“그걸 알면서 이러시면 어떡해요? 저 정말 곤란하다고요!”
“흠.”
도혁이 한쪽 눈썹을 끌어올린 채 재인을 빤히 바라봤다.
“왜, 왜요? 제가 뭐 틀린 말 했어요?”
“서재인 씨,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네?”
도혁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던 보고서를 재인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조금 전에 여기 수정 사항 체크해 놓은 거 고쳐서 내일 다시 보고하기로 하지 않았나?”
“아…… 그랬었죠.”
“공사 구분 못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서재인 씨 같은데?”
“…….”
아우, 창피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재인은 두 손으로 서류를 고이 받아 들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재인이 쥐구멍 대신 잽싸게 문을 향해 돌진하려던 그때였다.
“그냥 가려고?”
도혁이 갑자기 재인의 앞을 막아서며 와락 끌어안았다.
당황한 재인이 바동거리며 물었다.
“팀장님, 뭐 하시는 거예요?”
“내 여자친구 안고 있는데?”
“저 보고 공사 구분 못 한다고 하셨으면서 이게 뭐예요?”
“그딴 거 알 게 뭐야.”
도혁은 쿡, 웃으며 재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미로운 입맞춤이 물결치듯 이어졌다.
잠시 후, 도혁의 입술이 떨어지자 재인이 뾰로통하게 말했다.
“팀장님, 원래부터 이럴 생각이었죠?”
“당연하지.”
또 당했네.
재인은 바짝 약이 올랐다.
“그랬으면서 사람을 무안하게 만들고……. 정말 너무해요.”
“서재인 씨야말로 내심 이런 걸 기대했던 거 아니야?”
도혁이 얄궂게 웃었다.
아니라고 받아치려던 재인은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러고는 사슴 같은 눈망울로 도혁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실은…… 조금은 기대했어요.”
“정말?”
언제 봐도 가슴을 뒤흔드는 재인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도혁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재인은 도혁의 가슴을 밀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팀장님, 오늘은 이게 다예요?”
“응?”
뒷걸음질 치던 도혁이 소파 위에 털썩 쓰러지듯 앉았다.
소파 위에 무릎을 꿇고 올라선 재인은 도혁의 목에 팔을 감으며 말했다.
“이제 한동안 떨어져 있어야 하잖아요, 우리.”
“서재인 씨……?”
처음 보는 재인의 모습에 도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재인의 손이 살며시 미끄러져 내려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헤쳤다.
이어 와이셔츠 단추까지 풀며 재인이 속삭였다.
“너무 짧은 거 아니에요?”
“밖에서 다들 주시하고 있다고 해서…….”
“그래서요?”
뜻밖의 도발에 도혁은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숨결은 이미 거칠 대로 거칠어져 있었다.
재인이 부드러운 손길로 도혁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도혁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그렇게 도혁은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달래며 보드라운 입술이 닿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영 감감무소식이었다.
도혁은 게슴츠레 눈을 떴다.
반쯤 열린 그의 시야에 문 앞에 서 있는 재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서재인 씨?”
“팀장님,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이러고 가면 난 어떻게……?”
재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딴 거 알 게 뭐예요?”
재인은 도혁이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고는 쌩하니 나가버렸다.
허.
허허.
덩그러니 남겨진 도혁은 재인이 사라진 문을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귀여워 죽겠네.
도혁은 헝클어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서재인 각오해. 다음에 이번 것까지 책임을 물을 거니까.”
* * *
그날 저녁.
차 회장은 도혁의 집 거실에 앉아 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성준이 도혁을 데리고 도착하기로 한 시간까지는 아직 30분쯤 여유가 있었다.
차 회장은 머리가 지끈거려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지하 주차장에서 봤던 진혁과 세정의 모습이 뇌리에 박혀 몇 시간째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말썽을 일으키며 속을 썩였던 진혁은 차 회장에게 있어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래도 요즘에는 회사에 잘 적응하고 제법 철이 든 것 같아서 마음을 놓았었는데.
‘괘씸한 놈 같으니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진혁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만약 억지로 도혁과 세정의 결혼을 밀어붙였더라면?
생각만으로 끔찍했다.
도혁이 서재인이 아니면 안 된다고 고집을 부린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도혁이 녀석, 그래도 여자 보는 눈은 있어서 다행이야.’
이미 재인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차 회장은 생각할수록 재인이 마음에 들었다.
차 회장과 도혁은 둘 다 워낙 무뚝뚝한 성격이라 마음과 달리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불과 며칠 사이에 차 회장은 도혁과 부쩍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모두 재인 덕분이었다.
‘서재인 씨가 올 때가 됐는데…….’
차 회장이 시계를 들여다보는데, 때마침 인터폰이 울렸다.
“왔으며 그냥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올 것이지.”
차 회장은 무심코 혼잣말을 내뱉고는 아차, 싶었다.
재인은 쫓겨났다고 생각할 테니 벨을 누르는 게 당연했다.
차 회장은 또다시 재인에게 미안해져 걸음을 서둘렀다.
그런데 뜻밖에도 문밖에 서 있는 이는 기다리던 재인이 아닌 진혁이었다.
“진혁이 네가 어쩐 일이냐?”
“할아버지를 뵈러 왔죠. 어제 충격을 많이 받으신 것 같은데 괜찮으신지 걱정이 돼서요.”
진혁이 심각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난 괜찮다.”
차 회장은 복잡한 심경으로 진혁을 바라봤다.
당장이라도 윤세정과의 관계를 캐묻고 싶었지만, 그런다고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은 잘못을 추궁하는 것보다, 차정환과 진혁이 잘못된 길로 가려는 것을 바로잡을 방법을 찾는 게 급선무였다.
차 회장의 속도 모르고, 진혁이 넌지시 물었다.
“어제 도혁이 형은 괜찮았어요? 서재인 쫓아냈다고 난리가 났을 것 같은데…….”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그걸 물어보러 온 게야?”
거짓말.
진혁은 어제 도혁이 들어오자마자 뛰쳐나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리 경비원을 매수해둔 덕분이었다.
분명 서재인 때문에 차 회장과 도혁이 대판했으리라.
진혁이 노렸던 게 바로 그거였다.
도혁과 차 회장 사이를 이간질해 도혁의 날개를 꺾어버리는 것.
그리고 도혁이 여자 때문에 더 정신 못 차리게 만드는 것.
오늘은 차 회장의 심중을 떠보려고 온 것이었다.
도혁의 얘기에 차 회장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지는 것으로 보아 둘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 같았다.
진혁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할아버지 뵈러 온 거라니까요. 저녁 같이 드시러 나갈까요?”
“됐다. 입맛도 없구나. 너나 가서 먹어.”
“이러실 줄 알았다니까요. 속상하다고 굶으시면 안 돼요. 같이 일어나시죠.”
“아, 괜찮대도…….”
“제가 안 괜찮아요. 힘들 때는 가족이 최고라잖아요. 어서 같이 가세요.”
가족이 최고라.
차 회장은 착잡한 심정으로 사람 좋은 척 웃고 있는 진혁을 바라봤다.
‘진혁아,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냐.’
도혁의 등에 칼을 꽂으려 하는 진혁에게 화가 나면서도, 진혁이 왜 이렇게까지 삐뚤어졌는지 안타깝기만 했다.
그 생각을 하니 가슴이 갑갑해져 더는 진혁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기 힘들었다.
게다가 조금 있으면 재인이 올 시간이었다.
‘서재인 씨와 마주치기 전에 진혁이를 내보내야 해.’
마음이 급해진 차 회장은 일부러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피곤해서 좀 눕고 싶구나. 진혁이 너도 그만 가보거라.”
“정 그러시면 어쩔 수 없죠. 그럼 건강 잘 챙기시고요, 또 올게요.”
“그래.”
진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차 회장은 조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어?”
걸음을 옮기던 진혁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거실 책장에 놓인 코끼리 인형이었다.
진혁은 손가락으로 코끼리 인형을 툭툭 건드리며 코웃음을 쳤다.
“할아버지, 이 코끼리 인형은 뭐예요? 설마 도혁이 형, 몰래 애도 키우는 건 아니죠?
“서재인 씨 거다.”
“다 큰 여자가 애들이나 갖고 노는 인형을요? 유치하긴. 이제 주인도 없는데 쓰레기통에 버리세요.”
진혁이 빈정거리며 인형을 집어 들었다.
“그냥 놔둬. 도혁이가 알아서 하겠지.”
“도혁이 형이 어서 정신을 차려야 할 텐데 걱정이네요. 참, 여자 보는 눈도 없어요, 그죠?”
그래서 넌 윤세정이랑 그런 거냐?
순간 차 회장의 눈앞에 세정과 진혁이 진하게 키스를 나누는 장면이 펼쳐졌다.
차 회장은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걸 알 리 없는 진혁은 우쭐하며 덧붙였다.
“어떻게 서진물산 윤세정을 놔두고 그런 여자를 좋아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니까요. 저 같으면 당연히 윤세정을 택할 텐데.”
“진혁이 너!”
결국 차 회장은 참았던 화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런 소리 할 거면 당장 나가!”
“할아버지……?”
갑작스러운 날벼락에 진혁이 움찔했다.
“대체 왜 도혁이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그렇게 형을 깔아뭉개야 직성이 풀려?”
“제가 뭘 어쨌다고 그러세요? 도혁이 형이 걱정돼서 한 말인데.”
“도혁이 일에 신경 끄고 네 일이나 잘해! 다 필요 없으니까 어서 나가!”
순간, 진혁의 열등감이 건드려졌다.
네 일이나 잘해?
아직도 날 문제아 취급한다 이거지?
“가지 말래도 갈 겁니다! 할아버지는 언제까지 그렇게 도혁이 형만 감싸고 도실 거예요?”
진혁은 발끈하며 일부러 코끼리 인형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도발하는 듯한 그의 행동에 차 회장은 또다시 가슴이 갑갑해졌다.
“너 지금 이게 무슨 버르장머리야!”
“할아버지, 제가 생각고 말씀드리는데요, 도혁이 형만 믿다가는 큰코다치실 수도 있으니 조심하세요.”
“너……. 너……!”
차 회장이 가슴을 부여잡았다.
진혁이 조소 띤 얼굴로 이죽거렸다.
“도혁이 형이 별것 아닌 여자 하나 때문에 할아버지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는 것 같으니 하는 말이에요.”
“……!”
“할아버지도 참 안됐네요. 그렇게 도혁이 형만 바라보더니. 저는 충고드렸으니 이제 판단은 할아버지가 알아서 하세요. 그럼 전 이만 갑니다.”
진혁은 문이 부서져라 쾅, 닫고 나가버렸다.
후우. 후우.
차 회장은 심장이 죄어들어 숨쉬기가 힘들었다.
진혁 때문에 충격을 받아 지병이 있는 심장에 무리가 간 것이었다.
‘약! 약을 먹어야 해!’
차 회장은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약을 꺼내 입에 넣고 간신히 삼켰다.
약효가 돌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차 회장은 힘겹게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쓰러지듯 소파에 누운 차 회장의 호흡이 점점 더 가빠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혼미해진 그의 귓가에 다급한 목소리가 날아와 꽂혔다.
“회장님, 괜찮으세요?”
차 회장의 흐릿한 시야에 사색이 된 재인의 얼굴이 들어왔다.
재인이 떨리는 손으로 차 회장을 흔들었다.
“회장님 제발 눈 좀 떠보세요!”
“……서재인 씨……?”
“회장님, 안 돼요!”
재인의 날카로운 비명을 끝으로 차 회장은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