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8화. 뭘 모르나 본데 (109/129)


108화. 뭘 모르나 본데
2023.06.13.



 
메시지를 보자마자 재인은 심장이 철렁했다.

어제 봤던 차 회장의 싸늘한 눈빛이 또다시 떠올라 가슴이 죄어들었다.


‘보나 마나 팀장님과 헤어지라는 얘기를 하시려는 거겠지.’

피하고 싶지만, 도혁을 생각해서라도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재인은 마음을 다잡고 차 회장에게 회신을 보냈다.

상황은 절망적이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모든 일이 바로 잡히면, 그땐 할아버님도 날 받아들여 주실 거야.’

 

* * *



[네. 퇴근 후에 찾아뵙겠습니다.]

차 회장은 재인의 메시지를 확인하자 마음이 놓였다.

아들 차정환과 헤어진 그는 배웅하겠다는 비서를 물리치고 홀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만나서 잘 얘기해야지.’

어제 재인을 매정하게 쫓아낸 게 마음에 걸려 밤잠까지 설친 그였다.

도혁은 그렇다 쳐도 재인의 빈자리가 어찌나 허전하던지.

재인을 내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진혁이 계속 버티고 있어서 차 회장도 어쩔 수 없었다.

확실한 증거를 잡을 때까지는 진혁의 눈을 속여야 했으니까.

쫓아낸 게 진심이 아니라는 뜻으로 재인의 짐 속에 삼팔광땡 화투장을 넣어두긴 했는데, 재인이 그 뜻을 알아챘을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사실 차 회장은 진혁이 느닷없이 도혁의 집까지 찾아왔을 때부터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진혁이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확신이 든 것은 재인에 대한 말 때문이었다.


「주변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니 서재인의 남자관계가 꽤나 복잡했다고 하더라고요.」

「분명 도혁이 형이 재벌이라는 걸 알고 일부러 접근한 걸 거예요.」

서재인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차 회장은 지난번 뒷조사를 통해 재인이 모솔에, 도혁 못지않게 일만 하며 열 살았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직접 겪어보니 서재인은 따뜻한 마음과 올곧은 성품을 가진 지혜로운 아가씨였다.

게다가 같이 있으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특별한 매력이 있었다.

재인과 같이 지낸 며칠 사이, 차 회장은 도혁이 왜 재인에게 빠졌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전화위복이라고, 진혁의 계략 때문에 재인의 존재감을 확실히 깨닫게 된 차 회장이었다.


「딱 한 달만 서재인 씨를 받아들여 주세요. 한 달 뒤에도 안 된다고 하시면 서재인 씨 깨끗이 포기하겠습니다.」

도혁이 공증까지 받아가며 자신 있게 내기를 제안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도혁이 녀석 술수에 내가 제대로 넘어가 버렸어.’

차 회장은 약속한 한 달이 되기도 전에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고.


‘역시 정환이가 일을 꾸미고 있는 게 확실해.’

차 회장은 자신의 불길한 느낌이 맞아떨어졌음을 직감했다.

오늘 그가 아들 차정환을 방문한 목적은 어제 진혁에게서 느꼈던 이상한 낌새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짐작대로 아들 차정환의 태도가 지나치게 의뭉스러웠다.

마치 잘 짜인 시나리오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차 회장은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도혁이 대신 진혁이를 후계자 자리에 앉히려고 하는 건가?’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차정환 혼자 힘으로는 무리였다.

도혁과 서진물산의 혼사가 어긋나긴 했어도, 후계자 자리를 위협받을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차 회장의 지분과 딸 차주영의 지분을 합치면 도혁에게 힘을 실어주기에 충분했다.


‘정환아, 대체 어쩔 생각인 게야? 내가 널 얼마나 믿었는데…….’

차 회장은 갑자기 심장이 죄어드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큰아들 차인환을 먼저 보내고, 줄곧 차정환을 믿고 의지해왔던 차 회장이었다.

그에게는 차정환과 진혁, 도혁 모두 소중한 가족이었기에 가족들 간의 분란을 막기 위해 늘 주의를 기울여왔다.

그런데 결국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었다.

차 회장은 갑갑한 가슴을 부여잡고 로비 밖에 대기해 있던 차에 올랐다.


“박 기사, 도혁이 집으로 가주게.”

“네, 알겠습니다.”

차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던 그때.

심란함을 달래려 창밖을 내다보던 차 회장의 눈에 낯익은 흰색 차가 들어왔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이는 바로.


‘아니, 세정 양이 대산에는 어쩐 일이지?’

차 회장은 주차장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세정의 차를 눈으로 좇았다.

자세히 보니 조수석에 웬 남자가 앉아 있었다.

순간적으로 뇌리에 짧게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으니.

설마?

차 회장은 운전석을 향해 다급히 외쳤다.


“박 기사, 저기 앞에 가는 흰색 차를 쫓아 가주게!”

“네. 알겠습니다.”

차 회장의 차가 눈에 띄지 않게 세정의 차를 뒤따랐다.

잠시 후, 세정의 차가 주차장 구석진 곳에 멈춰 섰다.

차 회장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몰래 세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조수석에 있던 남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갑자기 세정에게 키스를 했다.

한참이 지나고 조수석의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설마설마했던 그 진혁이었다.

차 회장은 머리 위로 번개가 내리친 것 같았다.

대낮에, 그것도 회사 주차장에서 당당히 키스하는 두 사람이라니.

세정과 진혁은 딱 봐도 농밀한 관계임이 분명했다.

대체 언제부터?

문득 지난 연말에 진혁이 뜬금없이 본가로 찾아왔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진혁은 도혁이 다른 여자와 있는 걸 봤다고 전하면서 세정과 도혁의 결혼에 관해 물었었다.


「할아버지, 도혁이 형이랑 윤세정, 정말 결혼시키실 건가요?」

「당연하지. 왜, 맘에 안 드냐?」

「둘이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요.」

단순히 도혁이 서진물산을 등에 업는 것을 질투해 쓸데없는 참견을 한다고만 생각했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날 진혁의 표정이나 말투에 찜찜한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분명 그전부터 진혁과 세정이 아는 사이였을 거라는 느낌이 왔다.

세정과 도혁의 혼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가족들 간에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앞에서는 말 한 마디 없던 진혁이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이야.


‘진혁이, 네가 어떻게 이런 짓을……!’

차 회장은 충격으로 숨이 턱 막혔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심장이 갑갑해 미칠 것만 같았다.

막연히 진혁이 후계자 자리를 노리고 있다고만 짐작했었는데, 윤세정과 엮여 있었다니.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앞에서 도혁에게 여자가 있는 것 같다며 눈물을 글썽였던 세정이었는데.

그동안 알고 있었던 세정과 오늘 목격한 세정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하마터면 깜박 속을 뻔했군.’

세정이 뒤에서 진혁과 만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지금,

차 회장은 재인에게 기우는 마음 때문에 세정에게 가졌던 죄책감을 말끔히 털어버렸다.

그리고 비로소 모든 상황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차정환과 진혁이 무엇을 믿고 뒤에서 일을 꾸미고 있는지를.

차정환이 대산그룹의 두 번째 대주주인 서진물산의 윤문식 회장과 손을 잡은 게 분명했다.

도혁을 밀어내고 진혁을 후계자 자리에 앉히려는 속셈이리라.

어제 터진 도혁에 관한 중상모략도 그들의 짓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결국 차 회장이 우려했던 대로 서진물산이 도혁을 위협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이거야말로 보통 일이 아니군. 이제 어떻게 한다.’

일단 도혁과 만나서 오해를 푸는 게 먼저였다.

차 회장은 어제 집을 뛰쳐나간 뒤부터 시위하듯 연락을 받지 않는 도혁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도혁아, 중요한 얘기가 있으니 오늘은 꼭 집에 들어와라.]

그러고는 역시 이럴 때 차 회장이 의지할 수 있는 단 한 사람, 성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실장, 오늘 나 좀 보세. 도혁이도 같이. 아주 중요한 일이야.”

차 회장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 * *

그즈음, 도혁은 팀장실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연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연지 네 말은, 강나희 대리가 어제 일과 연관이 있다는 거지?”

“응. 내 두 귀로 똑똑히 들었어.”

“글을 올린 것도 강 대리의 계정이고?”

“아마도. 이런 꼴 보자고 협조한 거 아니라고 하는 걸 보면 그럴 확률이 높은 것 같아.”

“대체 강 대리가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도혁은 생각지도 못한 나희의 배신에 어안이 벙벙했다.


“질투가 나서 그랬을걸?”

“질투? 누구한테?”

“당연히 재인 언니지. 원인은 오빠일 거고.”

“내가 뭐?”

“강 대리님이 오빠 좋아했잖아. 아마 지금도 그럴걸? 그러니 재인 언니가 얼마나 밉겠어?”

연지의 말에 도혁이 콧방귀를 뀌었다.


“네가 뭘 모르나 본데, 강 대리는 서재인 씨 사촌 오빠랑 사귀고 있어. 할머님 팔순 잔치에서 만났었다고 얘기했잖아.”

“오빠가 뭘 모르나 본데, 둘이 헤어졌어.”

“며칠 사이에? 그걸 어떻게 알아?”

“강 대리님이 지겹게 우려먹던 의사 남친 자랑이 쏙 들어간 것 보면 뻔하지. 본인은 헤어졌는데 못 잡아먹어 안달인 재인 언니가 오빠랑 달달한 티가 팍팍 나니 속이 좀 쓰렸겠어?”

“고작 그것 때문에? 강 대리, 질투심이 무서울 정도인데.”

도혁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갑자기 연지가 조심스레 물었다.


“오빠, 이 일에 진혁 오빠도 관련돼 있지?”

순간 도혁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진흙탕 싸움에 연지까지 개입시키고 싶지 않아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도혁이었다.


“숨기려고 해도 소용없어. 아까 강 대리님이 통화한 남자가 오빠랑 닮았다고 했을 때 바로 눈치챘어.”

“맞아. 작은아버지와 진혁이가 날 밀어내려고 하는 것 같아.”

“역시 그랬구나. 아무리 후계자 자리가 욕심이 난다고 해도 이런 야비한 수를 쓰다니. 삼촌이랑 진혁 오빠 너무해!”

연지가 씩씩거리자 도혁이 덤덤히 말했다.


“넌 모르는 척해. 두 사람 뜻대로 될 일은 없을 거니까.”

“애 취급하지 마! 나도 힘닿는 데까지 도울 거야!”

“그래, 고맙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일단 모든 게 명확해질 때까지 모른 척해야지. 서재인 씨한테도 그때 가서 얘기할 거니까 괜히 티 내지 말고.”

“걱정 마. 그리고, 재인 언니랑 오빠는 내가 꼭 지킬 거니까 나만 믿어!”

연지가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어제 김 실장을 응원하던 재인과 판박이 같은 모습에 도혁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너무 든든해서 눈물이 다 날 것 같네.”

“장난치지 말고!”

“장난 아닌데?”

도혁의 진심이었다.

* * *

퇴근 시간 무렵, 재인은 도혁에게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


“그럼, 보고서 수정해서 내일 다시 검토하기로 하죠.”

“네, 알겠습니다.”

도혁이 책상에 보고서를 내려놓자 재인이 물었다.


“팀장님, 오늘 저녁에 바쁘세요?”

“김 실장님이랑 만나서 할 일이 있는데, 왜? 무슨 일 있어?”

재인은 차 회장을 만나러 가는 것을 말할까 고민하다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잘됐어. 팀장님도 많이 힘드실 텐데…….’

도혁의 집에서 마주치지 않을 거라면 그가 모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가뜩이나 머릿속이 복잡할 도혁을 더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차 회장에게서 어떤 소리를 듣든 재인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재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냥 궁금해서요. 집에는 들어가실 거죠?”

“그래야지.”

도혁이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답했다.


“잘 생각하셨어요. 할아버님이 많이 걱정하실 거예요.”

“서재인 씨…… 오늘 밤에는 같이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

“아니에요. 제 걱정은 말고, 할아버님과 꼭 화해하셔야 해요.”

“몰라. 보통 황소고집이 아니라…….”

“잘하시리라 믿어요. 그럼 저 먼저 퇴근할게요.”

재인은 꾸벅 인사하고 문으로 향했다.

그러자 도혁이 다급한 목소리로 재인을 불러 세웠다.


“서재인 씨, 잠깐만!”

“뭐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무심코 뒤를 돌아본 재인은 흠칫 놀라 한 발짝 물러섰다.

어느새 도혁이 코앞까지 바짝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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