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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그 잘생긴 차 팀장님이 왜? (108/129)


107화. 그 잘생긴 차 팀장님이 왜?
2023.06.10.



 
복도 끝으로 간 나희는 창밖을 내다보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들리자마자 서늘한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나희 씨, 전화는 걸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무슨 용건입니까?

“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하는 거예요? 서재인이랑 차도혁이 너무 멀쩡하잖아요!”

―그래요?

“눈꼴사납게 찰싹 붙어 다닌다고요! 제가 이런 꼴 보자고 협조한 거 아니잖아요.”

나희가 짜증스레 다그치는데도 상대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래서요?

“스캔들 터지기 전보다 더 끈끈해진 것 같단 말이에요.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그것 때문에 전화한 겁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다음 계획이 진행 중이니까.

“다음 계획이 뭔데요?”

―강나희 씨, 너무 많은 걸 알아봤자 좋을 게 없을 텐데요. 강나희 씨의 역할은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메시지로 서재인과 차도혁의 동태를 알려주는 것, 딱 거기까지예요.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에 나희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 알았어요. 이번에야말로 두 사람 확실히 갈라지는 거죠?”

―두고 봐야죠. 뭐, 안 되면 그다음 계획을 세우면 되니까. 더 할 말 있습니까?

“……아니요.”

―그럼 이만. 다음부턴 전화하지 말아요.

뚝.

전화가 끊겼다.


“뭐야, 잘난 척은! 생긴 건 차도혁이랑 그렇게 닮았으면서, 하는 건 정말 짜증 나는 인간이네!”

나희는 휴대전화 화면에 대고 괜한 신경질을 부리고는 씩씩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또각또각.

나희의 하이힐 소리가 희미해지자, 조금 전 나희가 서 있던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에서 누군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연지였다.


“그런 거였어?”

연지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나희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 * *

진혁이 전화를 끊자, 운전대를 잡은 세정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강나희가 누구야?”

“아, 의심 많고 성가신 여자 하나 있어.”

“차진혁, 아직도 노는 버릇 못 고쳤어?”

“아니야. 그랬으면 몰래 통화했지, 네 앞에서 받았겠어?”

세정이 찌릿, 째려보자 진혁이 너스레를 떨었다.


“오빠 너 만나고 주변 싹 다 정리했다. 내 인생에 여자는 이제 윤세정 하나밖에 없어.”

“말은 잘한다. 어디 걸리기만 해봐, 뼈도 못 추리게 만들 거니까!”

“알았어, 알았어.”

“강나희가 대체 누군데?”

“도혁이네…… 그러니까 서재인이랑 같은 부서 대리인데 서재인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더라고. 앙숙이라길래 입질 한번 해봤더니 바로 낚였어.”

지난주, 재인에 대한 정보를 손에 넣은 진혁은 비서에게 그녀의 주변을 탐색하라고 지시했다.

도혁의 약점이 될 만한 걸 찾아내고 부서 내에 끄나풀을 만들어둘 속셈이었다.

그 목적에 딱 맞는 적임자가 바로 강나희였다.

원래 비서 선에서 끝내려 했으나, 의심 많은 강나희 때문에 결국 진혁이 도혁의 사촌임을 밝히며 직접 나서야 했다.

차도혁에게 갚아줘야 할 빚이 있다는 명분을 걸고.

그렇게 진혁과 나희는 각각 차도혁과 서재인을 무너뜨리기 위해 손을 맞잡았다.

인트라넷에 올린 글도 나희의 아이디를 이용해 진혁의 비서가 올린 것이었다.


“그 말, 정말이야?”

세정이 의심이 가시지 않는 목소리로 물었다.

진혁은 실실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당연하지. 이제 그 얘긴 그만하자. 모처럼 데이트하는 건데 괜히 기분만 망치겠어.”

“근데 일은 안 하고 이렇게 놀아도 돼?”

“곧 내 회사 될 건데 뭐 어때? 너랑 브런치 먹고 쉬다가 오후에나 들어가지, 뭐.”

“우리 아빠 앞에서는 그렇게 성실한 척하더니…….”

“왜? 이러는 거 싫어?”

진혁이 세정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능글맞긴.

세정은 대답 대신 진혁에게 눈을 흘기고는 엑셀러레이터를 세게 밟았다.

* * *

점심시간, 구내식당 안은 여느 때처럼 붐볐다.

재인과 팀원들이 긴 줄의 끝에 서자, 어디에선가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봐. 맨 끝에 서 있는 저 여자야.”

“어디, 어디?”

“근데 그 얘기 헛소문이라며?”

“그걸 믿어? 나 같아도 아니라고 딱 잡아떼겠다.”

“맞아.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는 거 봤어?”

근처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여직원들 무리가 재인을 힐끗거리며 떠들어대는 소리였다.


“아니,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믿어야지!”

연지가 도끼눈을 뜨고 따지러 가려는 걸 재인이 황급히 붙잡았다.


“괜히 일 크게 벌이지 말자.”

“서 주임님, 그래도 이건 좀…….”

“아무렇게나 떠들라지, 뭐. 시간 좀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재인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여직원들이 더 크게 수군거렸다.


“근데 생각보다 너무 평범한데? 그 잘생긴 차 팀장님이 뭘 보고 넘어간 거야?”

“그러게 말이야. 재주도 좋아.”

“돈이 많나? 알고 보니 재벌집 딸 아니야?”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인의 얼굴이 확 어두워지는 것을 본 연지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도저히 못 참겠네!”

“연지 씨, 잠시만.”

규민이 팔을 뻗어 돌진하려는 연지의 앞을 가로막았다.


“한 과장님……?”

규민은 당황해하는 연지에게 빙긋 웃어 보이고는 문제의 테이블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잠시 실례 좀 해도 될까요?”

“네?”

여직원들이 일제히 말을 멈추고 홀린 듯 규민을 올려다봤다.

햇살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규민이 말했다.


“저희 팀원 얘기를 하시는 것 같은데, 좀 작게 해주실래요? 하지 말라고 한다고 안 할 분들도 아닌 것 같고, 저쪽에서 엄청 잘 들리는데 모르시는 것 같아서요.”

“…….”

여직원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규민이 다시 한번 살인 미소를 날리고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는데, 여직원 중 한 명이 분한 듯 툴툴거렸다.


“뭐야, 자기가 서재인 남자친구라도 돼? 왜 나서고 난리야?”

“저기요…….”

규민이 한마디 하려고 뒤돌아선 그때였다.

쓰윽, 그의 앞을 도혁이 스쳐 지나갔다.

도혁은 볼멘소리를 내뱉은 그 여직원 앞으로 걸어가 단호하게 말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서재인 씨 남자친구는 바로 접니다. 저기 있는 한 과장은 그냥 친구.”

도혁은 보란 듯이 재인을 향해 씩 미소를 날렸다.

곧장 재인에게 다가간 도혁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규민에게 견제의 눈빛을 보냈다.

고마움도 한 스푼 섞어서.

나 참.

규민도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재인의 옆에 섰다.


 
그렇게 존재 자체로 빛이 나는 도혁과 누가 봐도 멋진 규민이 보호막처럼 재인의 곁을 지켰다.

신나게 뒷담화를 하던 여직원들의 얼굴이 부러움 반 창피함 반으로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러더니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한 듯 후다닥 자리를 정리하고 떠났다.


“팀장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재인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묻자 도혁이 무심히 답했다.


“왜요? 내가 오면 안 됩니까”

“그게 아니라…… 원래 구내식당에서 안 드시잖아요?”

“맞아요. 그런 의미에서, 다 같이 나가시죠. 오늘 점심은 제가 제대로 한 턱 쏘겠습니다!”

단비 같은 도혁의 말에 부인에게 용돈을 타 쓰는 박 과장의 얼굴이 급격히 밝아졌다.


“팀장님, 감사합니다! 자, 자, 어서들 나가자고!”

박 과장을 필두로 상품기획1팀은 우르르 밖으로 몰려나갔다.

다들 신이 난 가운데 오로지 나희만 혼자 쓰린 속을 삼켰다.


‘두고 봐, 서재인! 그 웃는 얼굴도 얼마 못 갈 테니까.’

나희는 진혁이 말한 다음 계획이 빨리 눈 앞에 펼쳐지길 기대하며 재인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 * *

그날 오후.

차대산 회장은 아들 차정환을 만나러 대산그룹 본사를 찾았다.

대표이사실은 과시하기 좋아하는 차정환의 성격답게 온갖 값비싼 가구와 장식들로 채워져 있었다.

평생 검소함을 미덕으로 살아온 차 회장의 눈에는 못마땅한 것투성이였다.


“쯧. 멀쩡한 가구를 그새 또 바꾼 게야? 대체 일하는 데 이런 게 왜 필요한 건지…….”

차 회장이 집무실 안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차정환은 심기가 불편한데도 꾹 참고 물었다.


“아버지, 갑자기 여긴 어쩐 일이세요?”

“그건 너도 잘 알 텐데? 너까지 날 뒷방 늙은이 취급하는 게야?”

차 회장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차정환은 태연하게 받아쳤다.


“도혁이 문제 때문에 오셨어요? 진혁이 녀석이 괜한 짓을 했다는 얘긴 들었어요.”

“그래,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냐?”

“뜬소문 하나 가지고 뭘 그렇게 신경 쓰세요? 어차피 그깟 소문 따위, 곧 사그라들 텐데.”

“그럴 것 같은 분위기냐?”

“네. 별일이 아니라 아버지께 말씀 안 드리려고 했던 거예요. 아버지가 이미 서재인이라는 여자도 내쫓으셨다면서요?”

재인의 얘기가 나오자 차 회장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괜히 문제가 더 커질까 봐 서둘러 내보냈지.”

“아주 잘하셨어요. 곪았으면 빨리 도려내야죠. 도혁이 문제는 곧 괜찮아질 거예요.”

차정환이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자 비로소 굳어 있던 차 회장의 얼굴이 펴졌다.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헛소문이 하루빨리 사라지게 네가 신경 좀 써다오.”

“걱정 마세요. 도혁이도 제 자식이나 마찬가지인데 당연히 그래야죠.”

“그래. 너만 믿으마.”

마음이 놓였는지 차 회장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졌다.

차 회장이 차를 입에 가져가며 넌지시 물었다.


“정환아, 도혁이 후계자 승계 준비는 잘 진행되고 있는 게지?”

“아, 후계자 승계요?”

“대산그룹이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네 형 인환이 공이 컸다는 거 너도 잘 알지? 인환이를 생각해서라도 도혁이가 무사히 대표직에 오를 수 있게 도와다오.”

차정환은 도혁의 후계자 승계 얘기에 배알이 꼴렸지만 애써 본심을 감추며 웃어 보였다.


“그럼요. 저도 이제 도혁이한테 넘겨주고 편하게 여행이나 다녀야죠.”

“그래. 고맙구나. 네 형이 살아서 그걸 봤으면 얼마나 좋았을꼬…….”

갑자기 차 회장이 아련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또 시작이군.

차정환은 그런 차 회장을 보며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대놓고 차별하진 않았지만, 죽은 형 차인환을 유독 아꼈던 아버지였다.

차인환이 사고로 죽자 한 달 넘게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해 이러다 돌아가시는 건 아닌지 걱정했을 정도로.

차정환이 죽은 형의 뒤를 이어 대표를 맡았을 때도, 차 회장은 다음 후계자는 반드시 도혁이 되어야 한다며 신신당부를 했었다.

그때 차정환은 아무리 장자승계가 원칙이라지만, 후계자로 자신의 아들인 진혁은 염두에도 두지 않는 차 회장에게 섭섭함을 넘어 배신감마저 느꼈었다.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죄송하지만 아버지 뜻대로는 안 될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넘기기엔 제가 영 억울해서 말입니다.’

과연, 나중에 아버지가 모든 것을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그땐 이미 도혁이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난 뒤일 것이다.

차정환은 상상만으로도 통쾌해 입꼬리가 절로 씰룩거렸다.

* * *



‘아, 왜 이렇게 졸리지? 점심을 너무 과식했나?’

재인은 밀려오는 졸음을 쫓으려 휴게실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도혁의 통 큰 한턱 덕분에 화기애애하고 즐거운 점심시간이었다.

늘 물과 기름처럼 따로 놀았던 도혁도 팀원들과 편안하게 어울렸다.

어제의 말도 안 되는 사건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아직 넘어야 할 산들이 많지만.

재인이 슬며시 미소를 짓던 그때.

주머니 속 휴대전화가 지이잉 울렸다.

휴대전화를 확인한 순간, 재인은 잠이 싹 달아났다.


[오늘 저녁에 도혁이 집으로 좀 오게.]

차 회장이 보낸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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