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처음이라 부끄러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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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처음이라 부끄러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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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처음이라 부끄러웠구나?
2023.06.06.
“초면에 민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민우의 옷을 빌려 입고 나온 도혁이 서연에게 말했다.
재인을 찾아 민우와 서연의 신혼집에 들른 도혁은 서연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얼떨결에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되었다.
“민폐라니요. 걱정 말고 마음 편히 계세요.”
서연이 활짝 웃으며 덧붙였다.
“재인이가 만나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었는데 드디어 속이 시원해졌네요. 너무 멋진 분이 오셔서 깜짝 놀랐어요.”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은 재인이가 연애를 한 번도 안 해봐서 이상한 사람한테 꼬인 건 아닌지 걱정했었거든요. 지난번에 통화할 때 어찌나 놀랐던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지 서연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지난번이란, 도혁이 질투를 참지 못하고 폭발했던 때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도혁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재인과 민우와 만날 거라고 오해를 했었다.
폭주하는 도혁을 말리느라 재인이 엉겁결에 좋아한다고 고백했고, 둘은 뜨겁게 키스를 나누었다.
엇갈림을 반복하던 마음이 드디어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딱 하나 문제가 있었다면, 그때 하필 재인이 서연과 통화하는 도중이었다는 것.
“무슨 큰일이 난 건 아닌지 간이 철렁했었다니까요. 웬 남자가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은데, 대체 뭘 하는지 재인이는 아무리 불러도 답이 없고…….”
뜨끔.
재인과 도혁은 누가 먼저라고 할 새도 없이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서연이 애가 타는 동안 키스 삼매경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두 사람이었기에.
“아아, 그때? 아마 거실에 휴대전화를 놔두고 화장실에 갔을걸요? 그죠, 팀장님?”
재인은 애써 태연한 척 둘러대며 도혁에게 눈짓을 했다.
응?
순간적으로 당황한 도혁이 한 박자 늦게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그랬었죠.”
“정말요? 분명 그때 재인이가 ‘내가 좋아하는 건 팀장님이란 말이에요!’라고 했던 것 같은데…….”
“……!”
우리 서연 언니, 기억력도 참 좋네.
재인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녀를 대신해 도혁이 말을 받았다.
“그러니까요. 저도 서재인 씨가 고백하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서 많이 당황했습니다.”
“어머어어어! 재인이 너, 처음이라 부끄러웠구나? 난 그런 줄도 모르고 괜히 걱정했네.”
서연이 킥킥 웃었다.
민우도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런 거였다니! 그때 전화 끊은 뒤에도 서연이가 차 팀장님이 스토커 아니냐며 경찰에 신고한다는 걸 말리느라 혼났는데.”
“그러셨군요.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도혁이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래, 다들 즐거우면 됐어.
왜 하필 난 화장실 핑계를 댔을까.
졸지에 고백하고 화장실로 달려간 이상한 여자가 되어버린 재인은 땅굴이라도 파서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차 팀장님, 우리 재인이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더는 힘들지 않게요.”
서연이 도혁에게 거듭 당부했다.
“걱정 마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서재인 씨는 제가 지킬 겁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든든하네요. 재인이가 강해 보여도 속은 엄청 여리거든요. 눈물도 많아서 몰래 울 때도 많고요. 그러니까…….”
민우가 노파심에 말이 길어지려는 서연을 잡아끌었다.
“자자, 벌써 12시가 넘었어. 재인이랑 차 팀장님 내일 출근하려면 피곤하실 테니, 우린 그만 들어가자.”
“어머,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네.”
“그럼 차 팀장님, 푹 주무시고 내일 뵙죠. 재인이도 잘 자고.”
민우와 서연은 마무리 인사를 건네고 방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재인과 도혁도 서재로 쓰는 작은 방에 누워 잠을 청했다.
하지만, 엄청난 일을 겪어서일까?
재인은 몸은 천근만근인데 정신이 너무나도 또렷해서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짙은 어둠 속, 낯선 공간에 도혁과 나란히 누워 있다는 것도 한몫했다.
도혁은 그새 잠들었는지 숨소리만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팀장님은 잘만 자는데 너 왜 이래? 이 와중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도혁과 더한 일도 있었으면서, 지금 이 순간 참을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움이 밀려드는 재인이었다.
그때, 돌연 어둠을 뚫고 도혁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서재인 씨, 자?”
“아, 아니요. 팀장님, 아직 안 주무셨어요?”
재인은 제 속을 들킨 것만 같아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도혁이 재인 쪽으로 돌아누우며 말했다.
“……미안해.”
또 그 소리.
도혁이 이 집에 온 뒤로 수십 번은 들은 것 같다.
“전 괜찮다니까요. 갑자기 나가라고 하신 건 좀 서운했지만, 할아버님 입장도 이해해요.”
“조금만 기다려줘. 내가 꼭 원래대로 돌려놓을게.”
“네. 아무튼 팀장님, 내일은 꼭 집에 들어가셔야 해요, 알았죠?”
재인은 자신을 찾아 한달음에 달려온 도혁에게 감동을 받았으면서도, 차 회장과 크게 말다툼했다는 얘기에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싫어. 서재인 씨 없이는 안 들어갈 거야.”
“또 그러신다. 일단 할아버님과 화해한 뒤에 오해를 풀어야죠. 팀장님이 다투다 나와버려서 할아버님도 애가 많이 타실 거예요.”
“몰라. 속 좀 썩어보시라지.”
“아휴, 애도 아니고…….”
재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도혁이 물었다.
“서재인 씨, 정말 괜찮은 거야?”
“팀장님도 참. 괜찮으니까 이제 그만 좀 물어보세요.”
“그런데 왜 계속 내 쪽을 안 쳐다봐?”
“네?”
그 순간 재인은 제 볼에 닿는 뜨거운 시선을 느꼈다.
“봐. 지금도 천장만 쳐다보잖아.”
“아, 그게…….”
왠지 부끄러워서 그런 건데.
재인이 말끝을 흐리자 도혁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역시 오늘 일로 마음이 많이 상한 거지? 그럴 만도 해.”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이쪽 좀 봐봐.”
재촉하는 듯한 말투에 재인은 할 수 없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새 어둠에 적응한 그녀의 눈동자에 도혁의 얼굴이 가득 담겼다.
재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됐죠?”
“잠시만.”
갑자기 도혁이 재인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그렇게 코끝이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재인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왜, 왜 그러세요?”
“몰래 잘 운다길래 혹시 울고 있는 건가 했는데 그건 아니네. 다행이다.”
서연이 당부했던 말을 마음속에 담아뒀던 도혁이었다.
재인은 세심한 부분까지 다독여 주는 도혁의 말에 가슴이 설렜다.
“저 그 정도로 약하지 않거든요? 이제 그만 잘게요.”
“그건 곤란한데?”
도혁은 돌아서려는 재인을 와락 끌어안았다.
앗, 하는 사이에 재인은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폭 파묻혔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내일을 버티기 위한 에너지 충전. 잠깐만 이렇게 있어 줘.”
도혁의 목소리에서 고단함이 느껴졌다.
재인은 튀어나올 것처럼 뛰는 도혁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숨을 죽였다.
포근한 그의 품 안에 안겨 있으니 어느새 그녀의 피로도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어느새 저도 모르게 눈이 감긴 재인이 막 잠이 들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도혁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아……!”
재인은 잠결에 멍하니 눈만 깜박였다.
도혁은 절대 놓지 않겠다고 다짐이라도 하듯 그녀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거친 숨결이 스치고 지나가자, 곧이어 재인의 얼굴 곳곳에 뜨거운 입술 세례가 쏟아졌다.
정처 없이 배회하던 도혁의 입술이 제 목적지인 보드라운 입술을 깊숙이 파고든 순간, 재인은 살포시 눈을 감았다.
그 밤, 힘든 하루를 지나온 서로를 위로하는 입맞춤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 * *
다음 날 아침.
재인과 도혁은 서연과 민우가 힘내라며 정성껏 차려준 아침밥을 든든하게 먹고 회사에 출근했다.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 두 사람은 멈춰 서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어제 팀원들에게 충분히 해명하긴 했지만, 오늘 어떻게 반응할지는 그야말로 미지수였다.
“서재인 씨, 준비됐어?”
“네. 팀장님은요?”
“좋아. 들어가지.”
이윽고 자동문이 열리고, 재인과 도혁은 천천히 사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일순 사무실 안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처음으로 나란히 출근한 두 사람을 본 팀원들의 눈이 일제히 휘둥그레졌다.
“좋은 아침입니다!”
정적을 깨고 규민이 인사를 건넸다.
언제나처럼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그러자 너나없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인사를 했다.
다행이다.
재인은 팀원들이 도혁과 자신의 결백을 믿어주는 것 같아 가슴이 뭉클했다.
“흠흠. 좋은 아침입니다.”
도혁은 무심히 인사를 받고 곧장 팀장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내내 졸였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재인도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박 과장이 재인에게 다가와 호들갑을 떨었다.
“이렇게 보니 정말 서 주임이랑 팀장님이 사귀는 사이가 맞긴 맞네. 알고 보니 서 주임이 진짜 능력자였어!”
“능력자는 무슨요.”
“톱스타 신연주도 별로라고 했던 팀장님이 서 주임한테 어떻게 넘어간 거야?”
“팀장님이 넘어왔다기보다는……. 굳이 따지자면 제가 넘어간 건데요?”
“뭐? 그럼 팀장님이 서 주임을 먼저 좋아했단 말이야?”
박 과장이 믿기지 않는다는 티를 팍팍 내며 되물었다.
“네.”
“하긴. 세상에는 불가사의한 일도 많이 일어나니까. 서 주임, 그래서 말인데…….”
박 과장이 목소리를 확 죽여 재인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그동안 내가 팀장님에 대해 한 말…… 팀장님께는 얘기 안 했지? 어제 한 말도…….”
“아,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은 냉혈한’이라고 하셨던 거요?”
“그, 그건 그만큼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다, 뭐 그런 뜻이었지. 다 팀장님을 존경하는 마음을 에둘러 표현한 거라는 거, 서 주임도 알지?”
어느 부분이?
재인이 대답 대신 눈을 크게 뜨자, 박 과장의 눈동자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늘 도혁에 대한 불평불만에 앞장섰던 박 과장이었으니, 도혁의 여자친구이자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재인의 존재가 불안한 게 당연했다.
“저기, 우리 와이프가 연초 보너스만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거든.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아…….”
곧 팀장인 도혁이 매길 인사 고과 등급이 연초 보너스와 직결되어 있었다.
재인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역시 서 주임은 말귀를 잘 알아듣는다니까. 그럼, 난 서 주임만 믿을게.”
“네.”
그제야 박 과장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건너편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희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젠 박 과장님까지 구워삶아? 눈꼴사나워서 못 보겠네. 그 난리가 났는데 왜 서재인은 더 좋아 보이는 거야?’
어제 사색이 된 서재인 얼굴이 꽤 볼만했었는데.
기가 팍 죽었을 줄 알았던 재인이 아예 대놓고 차도혁과 붙어 다니자 더욱 눈엣가시처럼 느껴지는 나희였다.
어떻게든 저 여유로운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보고 싶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아우, 짜증 나! 이대론 안 되겠어!’
나희는 조용히 휴대전화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