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그쪽이 말로만 듣던 서재인 씨?
(106/129)
105화. 그쪽이 말로만 듣던 서재인 씨?
(106/129)
105화. 그쪽이 말로만 듣던 서재인 씨?
2023.06.03.
흐읍.
휴우.
퇴근한 재인은 현관문 앞에서 연거푸 크게 심호흡을 했다.
아직 어떤 얼굴로 차 회장을 마주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오늘 하루 차 회장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그룹 전체를 뒤흔든 도혁과 재인의 스캔들을 전해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직까지는.
아마도.
‘할아버님은 모르고 계시는 게 나을 거야. 심장도 약하신데 괜히 충격이라도 받으시면 큰일이니까.’
재인은 일단 차 회장에게는 알리지 않기로 마음먹고 연습 삼아 입꼬리를 올려 활짝 웃어 보았다.
오늘 재인은 종일 인사과는 물론, 부장님과 이사님께도 불려가 해명하느라 곤욕을 치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티 나게 수군대는 사람들,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
일부러 복도를 지나치며 사무실 안을 흘낏거리는 사람들,
그리고 또…….
하루 종일 곱지 않은 시선들을 감내해야 했다.
각오는 했지만, 심적으로 버텨내기 힘겨운 하루였다.
도혁은 그 난리를 치르고도 급한 일이 밀려 야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이 정도인데 팀장님은 얼마나 더 힘드시겠어. 팀장님을 생각해서라도 힘을 내야지.’
재인은 마음을 다잡고 일부러 평소보다 더 씩씩하게 인사를 건네며 안으로 들어갔다.
“할아버님, 저 다녀왔어요!”
“…….”
소파에 앉아 있는 차 회장은 굳은 얼굴로 재인을 쳐다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옆에는 낯선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남자의 인상이 훨씬 날카롭고 어둡긴 했지만, 한눈에 도혁의 친척임을 알 수 있었다.
“옆에 계신 분은…….”
“그쪽이 말로만 듣던 서재인 씨?”
다짜고짜 무례하게 구는 진혁 때문에 재인은 잠시 주춤했다.
“실례지만 누구세요?”
“난 도혁이 형 사촌인 차진혁이에요.”
“아, 안녕하세요.”
팀장님의 사촌 동생?
그렇다는 것은 도혁을 밀어내려고 혈안이 된 차정환 대표의 아들이라는 말이었다.
그런 인물이 왜 여기에?
재인이 미처 물어보기도 전에 차 회장이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서재인 씨, 긴말 필요 없고 당장 이 집에서 나가!”
“네?”
재인은 똑똑히 듣고도 제 귀를 의심했다.
“이 집에서 나가라고.”
“할아버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누가 그쪽 할아버님이야. 회장님이라고 불러.”
차 회장이 차갑게 받아쳤다.
노발대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협적이었다.
동물원에 다녀온 이후 그래도 조금은 차 회장과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던 재인은 충격으로 말문이 막혔다.
“이유는 서재인 씨가 잘 알 거 아니야? 기어이 도혁이 인생에 초를 치고 말았군. 쯧.”
“알고…… 계셨어요?”
“진혁이 아니었으면 눈 뜬 장님 신세가 될 뻔했어. 내 진즉 이런 사달이 날 줄 알았지. 이제라도 바로잡아야겠네.”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건 모함…….”
차 회장이 재인의 말을 싹둑 자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뭐든 상관없어. 중요한 건 이제 절대 아가씨를 이 집에 둘 수 없다는 거야.”
“회장님,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짐은 저쪽에 놔뒀어. 밖에 차 대기 중이니까 도혁이 오기 전에 당장 떠나. 그게 그간의 미운 정을 생각해서 내가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이야.”
차 회장의 손끝을 따라간 한쪽 구석에는 재인의 짐이 든 이민 가방과 캐리어, 그리고 상자 몇 개가 쌓여 있었다.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차 회장이었다.
재인은 갑자기 가슴이 죄어들어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사색이 된 재인을 보며 진혁이 조소 띤 얼굴로 말했다.
“서재인 씨, 버텨봤자 소용없어요. 이제 도혁이 형 그만 방해하고 제자리로 돌아가시지?”
“그건……!”
당신 아버지가 방해하는 거잖아!
재인은 발끈해서 받아치고 싶었지만, 차 회장을 생각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차 회장이 화를 내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룹 전체가 발칵 뒤집혀 도혁의 후계자 계승에 차질을 빚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니까.
억울하지만 일단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당장 어디로 가야 하지?’
유라의 집은 부모님이 계셔서 괜한 걱정을 끼칠 것이다.
그렇다고 광주 집에 내려갈 수도 없고.
재인이 고심하는 사이,
진혁이 턱짓을 하자 대기하고 있던 운전기사가 카트에 짐을 옮겨 싣기 시작했다.
차 회장은 묵묵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너무나도 싸늘해서 재인은 울컥 눈물이 솟구쳤다.
재인은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꾹 다물고 차 회장에게 인사를 했다.
돌아서는 발걸음이 한없이 무거웠다.
* * *
늦은 시각.
도혁은 야근을 마치고 기운이 쪽 빠진 채 집에 돌아왔다.
그에게는 재충전을 위해 사랑스러운 재인이 필요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왔는데도, 언제나처럼 환하게 웃으며 맞아주는 재인이 보이지 않았다.
집 안 공기도 뭔가 달라진 것 같았다.
“왔냐?”
소파에 앉아 있던 차 회장이 무심히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할아버지, 서재인 씨는 어디에 갔어요?”
“서재인 씨는 이제 여기 없다.”
“그게 무슨 소리세요?”
“내가 내보냈다.”
“뭐라고요?”
순간 도혁은 머리가 멍해졌다.
미친 듯이 두리번거리며 재인을 찾았지만, 곧 차 회장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도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다시 물었다.
“서재인 씨 어디로 갔어요?”
“저녁때 박 기사가 지인 집에 데려다줬다더구나. 내가 따로 머물 곳을 마련해 놨는데…….”
“지인? 그게 누군데요?”
“강서구에 사는 선배네 집이라더라.”
강서구라면 도혁도 짐작이 가는 곳이 있었다.
바로 나민우 팀장의 신혼집.
도혁이 버럭 소리쳤다.
“할아버지, 서재인 씨한테 대체 왜 그러셨어요!”
“몰라서 물어, 이놈아? 너 나한테 할 말 없어? 회사에 그런 큰일이 났는데, 나는 뒷방 늙은이라고 쉬쉬할 속셈이었어?”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까칠한 척했지만 늘 차 회장의 건강을 염려했던 도혁이다.
그래서 할아버지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주변에 입단속을 시켜두었는데.
“진혁이가 찾아왔다.”
“진혁이가요?”
이 자식이 잘도!
지금, 도혁을 곤란에 빠뜨리기 위해 아버지 차정환과 함께 앞서서 행동하고 있을 진혁이었다.
그들이 벌인 일이라는 심증은 있지만 결정적인 물증이 없는 상태인 지금.
오히려 양심에 찔려서라도 잠자코 있어야 할 진혁이었다.
그런데 굳이 들킬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할아버지에게 찾아와 도혁의 일을 알리다니.
‘대체 무슨 속셈인 거지?’
도혁은 미간을 좁혔다.
꺼림칙한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있었다.
“그깟 일 때문에 서재인 씨를 쫓아냈단 말이에요?”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일이 그렇게까지 커졌는데 서재인 씨를 집 안에 둘 수 있겠냐? 계속 같이 살면 의혹만 더 커질 텐데?”
차 회장이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도혁을 나무랐다.
“그런 거 아니라고 이미 해명했어요! 정식으로 교제하고 있다고 했다고요!”
“본디 사람들은 제멋대로 떠들기를 좋아하지. 해명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
“…….”
“벌써 대주주들 귀에 다 들어갔을 거다. 주주총회도 얼마 안 남았는데 이제 어떻게 하려고?”
도혁도 소문을 잠재우기가 쉽지 않다는 걸 잘 알기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추운 겨울에 갈 곳도 없는 재인이 막무가내로 쫓겨났을 걸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사람을 갑자기 내쫓을 수가 있어요? 할아버지한테 정말 실망했습니다!”
“뭐, 실망?”
“네! 서재인 씨가 할아버지한테 잘해드리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이렇게 인정머리 없는 냉혈한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어차피 처음부터 이럴 속셈이었죠? 이번 일로 옳다구나, 하고 쫓아낸 거잖아요!”
“네놈이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해!”
“아주 자알 알고 있죠! 할아버지가 갈 곳 없는 서재인 씨를 매정하게 찬 바닥에 내몰았다는 사실을요!”
“이놈이! 그런 게 아니라…….”
차 회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뒷목을 잡은 차 회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도혁아, 진정하고 일단 이리 와서 내 얘기 좀 들어봐라.”
“아뇨, 이젠 듣기 싫어요! 절대 할아버지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겁니다!”
도혁은 곧장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 글쎄 일단 들어보라니까!”
차 회장의 안타까운 외침은 쾅, 닫힌 문에 부딪혀 산산이 흩어졌다.
* * *
그즈음 재인은.
민우와 서연의 신혼집에서 짐을 풀고 있었다.
재인이 차 회장에게 떠밀려 막 차에 올랐을 때, 때마침 서연으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민우한테서 재인의 일을 전해 들은 서연이 걱정되어 연락한 것이었다.
서연의 따뜻한 목소리에 재인은 그만 서러움이 밀려와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사정을 들은 서연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당장 자기 집으로 들어오라고 손을 내밀어 주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재인은 심란한 마음으로 캐리어를 열었다.
마지막 순간에 마주한 차 회장의 차가운 눈빛이 뇌리에 깊숙이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앞으로는 영영 차 회장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을 거라는 불길한 생각이 자꾸만 치고 올라왔다.
언제 들어왔는지 서연이 재인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재인아, 내가 좀 도와줄게.”
“고마워요. 괜히 언니랑 민우 선배한테 민폐를 끼치네요.”
“무슨 소리야! 우린 괜찮으니까 아무 생각하지 말고 얼마든지 있어도 돼.”
“아, 아니에요! 집 구하는 대로 나갈게요.”
그때, 민우가 방밖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말했다.
“그래, 재인아. 어차피 남는 방이니까 편하게 있어도 돼. 너한테 우리가 그 정도도 못 해줄까.”
“……고마워요.”
재인은 또 울컥 눈물이 나와 황급히 눈시울을 훔쳤다.
“언니,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래. 어서 다녀와.”
재인은 뛰다시피 방 밖으로 나갔다.
안쓰러운 눈길로 재인을 바라보던 서연도 짐 정리를 서둘렀다.
“어? 이게 뭐야?”
캐리어에서 짐을 꺼내던 서연이 눈을 크게 떴다.
캐리어 바닥에 들어 있는 것은,
뜻밖에도 화투 두 장이었다.
삼광과 팔광, 이른바 삼팔광땡.
“재인이가 고스톱도 칠 줄 알아? 근데 왜 두 장뿐이지?”
서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화투장을 책상 서랍 안에 넣었다.
“재인아, 차 마셔.”
짐 정리를 마친 재인과 서연은 거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세한 얘기를 들은 서연이 분통을 터뜨렸다.
“헛소문 퍼트린 사람, 누군지 모르지만 아주 천벌을 받을 거야! 재인이 오늘 너무 힘들었겠다.”
“이제 좀 괜찮아졌어요, 언니.”
재인이 애써 웃어 보이자 서연이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차도혁 씨 집안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이렇게까지 심하게 반대를 하는 거야? 너 같은 애가 또 어디 있다고.”
“아, 그게…….”
아무리 친한 서연 언니라도 도혁이 대산그룹 후계자라는 것을 밝힐 수는 없었다.
재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드디어 신혼집에 와보네요! 너무 아늑하고 좋은데요. 지난번엔 못 와서 미안했어요.”
“아니야. 아파서 그런 건데, 뭘.”
재인은 지난 연말에 도혁과 함께 서연의 홈파티에 초대를 받았지만, 갑자기 차 회장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약속을 지키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날,
도혁과의 가슴 설렜던 첫날밤을 떠올리자 재인은 심장이 저릿했다.
그리고,
참을 수 없을 만큼 도혁이 보고 싶어졌다.
‘아! 팀장님한테 연락해야 하는데. 걱정하고 있겠다.’
재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가방 속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맙소사!
도혁으로부터 걸려온 부재중 전화가 열 통도 넘었다.
정신이 없는 데다 진동으로 해놔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Rrrrrrr.
전화벨이 울리자마자 도혁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재인 씨, 괜찮아? 연락이 안 돼서 걱정했잖아!
“죄송해요. 경황이 없어서…….”
―미안해. 할아버지 때문에 이런 꼴을 당하게 해서. 내가 대신 사과할게.
“아니에요. 전 잘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
갑자기 침묵이 흘렀다.
재인은 덜컥 걱정이 되어 도혁을 찾았다.
“팀장님, 괜찮아요? 별일 없는 거죠?”
―……보고 싶어.
“저도요.”
―문 좀 열어줘.
“네?”
재인은 심장이 철렁했다.
설마?
재인은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홀린 듯 현관으로 달려갔다.
손잡이를 돌려 빼꼼 문을 열자, 문틈 사이로 눈부시게 멋진 도혁의 모습이 보였다.
“여긴 어떻게……?”
재인이 믿기지 않는 눈으로 쳐다보자 도혁이 씩 웃으며 말했다.
“나도 방금 집 나왔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