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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내 옆에 있어만 줘 (105/129)


104화. 내 옆에 있어만 줘
2023.05.30.


성준이 뻘쭘한 얼굴로 반쯤 열린 문을 붙잡고 서 있었다.

재인은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기, 김 실장님,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성준이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이며 덧붙였다.


“혹시라도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데요, 저 분명히 노크했습니다. 똑똑, 하고 두 번이나.”

“아, 네에…….”

차도혁 씨랑 있으면 귀가 꽉 막혀버리는 제가 문제죠.

아우, 내가 미쳐!

재인은 너무 민망한 나머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감동적인 분위기를 방해하고 싶진 않았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흠흠. 김 실장님, 뭔가 좀 알아내셨습니까?”

도혁이 헛기침을 연발하며 물었다.

성준은 대답 대신 빙긋 웃으며 큼지막한 도시락 세 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일단 따뜻할 때 식사부터 하시죠. 이럴 때일수록 든든하게 먹어둬야 하는 법이니까요. 오늘은 특별히 스페셜 도시락에 전복과 낙지까지 추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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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알아본 바로는, 오늘 차정환 대표님이 MF파트너스 장문수 대표님의 딸과 진혁 도련님의 혼사를 없던 일로 하자고 일방 통보를 했다고 합니다.”

노릇노릇 잘 구운 전복구이를 한입 베어 물며 성준이 말했다.

예상치 못한 반전에 도혁의 눈이 커졌다.


“그게 정말입니까? 혼사가 깨진 건 잘된 일이긴 한데, 그렇게 자금줄을 붙잡으려고 혈안이더니 차 대표가 갑자기 왜 그랬을까요?”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차 대표님 측에서 이렇게 대놓고 비열한 일을 벌이는 걸 보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긴 합니다. 그게 뭔지는 이제부터 알아봐야죠.”

“김 실장님,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김 실장님이 듬직하게 곁에 있어 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도혁은 새삼 성준의 존재에 대해 깊이 감사했다.

그사이 재인은 도시락을 싹 비우고 물을 마시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폭격에도 굴하지 않고 잡초처럼 다시 살아난 재인이었다.


‘여전히 씩씩해 보이는군. 다행이야.’

역시 서재인.

이번 일로 인해 행여 재인이 상처받지는 않았을까 걱정했던 도혁은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팀장님,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전복과 낙지의 힘으로 제대로 재충전된 재인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일단 차 대표 쪽에서 헛소문을 퍼뜨려 명예훼손을 했다는 증거를 잡아야지. 그건 김 실장님이 뒤에서 움직여 주실 거야.”

“그렇군요. 김 실장님, 홧팅입니다!”

재인이 비장한 표정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자 성준이 쿡,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도혁이 왜 재인에게 빠져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역시나 그 모습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도혁이 말을 이었다.


“일단 임원들에게 해명은 해뒀어. 인트라넷에 서재인 씨와 사귀고 있고, 업무상 특혜는 없었다고 해명하는 글도 올렸고. 얼마나 믿어줄는지는 알 수 없지만.”

“네, 저도 봤어요. 아직도 여기저기서 수군대긴 해요.”

“미안해. 괜히 겪지 않아도 될 일을 날 만나는 바람에……. 힘들어도 한동안은 귀 닫고 있어 줘.”

도혁의 눈빛에 재인에 대한 안쓰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재인은 일부러 더 활짝 웃어 보였다.


“저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고마워.”

“그나저나 주주총회가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그 전에 해결이 돼야 할 텐데 걱정이에요.”

“맞아. 그 전에 빨리 내막을 밝혀내야 해.”

“제가 도울 일은 없어요?”

“서재인 씨는 그냥 내 옆에 있어만 주면 돼. 존재 자체로 힘이 되니까.”

두근.

불시에 치고 들어온 도혁의 애정 공세에 재인의 눈빛이 촉촉해졌다.


“팀장님…….”

“서재인 씨…….”

 

 
또다시 두 사람이 서로의 눈 속으로 빠져들기 일보 직전, 보다 못한 성준이 제동을 걸었다.


“죄송하지만 두 분, 지금 심각한 상황인 건 명확하게 인지하고 계시죠? 아직 논의할 게 많이 남았는데…….”

“아, 죄송해요!”

“흠흠. 김 실장님, 말씀하세요.”

화들짝 놀란 재인과 도혁은 황급히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성준은 민망해하는 두 사람을 난감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슬며시 미소 지었다.

* * *

그날 오후.

차 회장은 언제나처럼 방 안에서 무료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시간이 남아돌아서일까.

도혁에 관한 일들이 끊임없이 떠올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차 회장은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려 휴대전화 게임 앱으로 고스톱을 쳤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렇게 재밌었던 고스톱 게임이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이유는 단 하나.

재인과 맞고를 쳤을 때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손에 착착 감기는 화투장의 감촉,

화투장을 내리칠 때 나는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은 경쾌한 소리,

거기에 신나게 장단을 맞춰 주는 재인의 리액션까지.

죄다 아쉽기만 한 차 회장이었다.


‘남 주긴 아까운 아가씨야. 서재인 씨 집안이 조금만 더 괜찮았어도…….’

차 회장은 흠칫 놀라며 마구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체 뭐 하자는 거야! 손자의 인생이 걸려 있는데 사사로운 정에 휩쓸릴 순 없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서진물산을 놓치는 건 리스크가 너무 컸다.

차 회장이 애써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은 순간, 책장에 놓여 있는 코끼리 인형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나한테 인형을 선물하다니. 기가 막혀서, 원.’

허허.

다시 생각해봐도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볼 때마다 재인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아 가슴이 따뜻해지는 차 회장이었다.


‘볼수록 얼굴도 곱고, 심성도 곱고, 참 괜찮은 아가씨이긴 한데…….’

차 회장이 재인에게 기우는 마음을 속절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

인터폰 알림음이 들려왔다.


‘이 시간에 누구지? 서재인 씨일 리는 없고……. 혹시 조퇴라도 한 건가?’

차 회장은 내심 기대하며 인터폰을 확인했다.

화면에 나타난 이는 뜻밖에도 손자인 진혁이었다.


“진혁이 네가 어쩐 일이냐? 내가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알고?”

“할아버지 집에 들렀더니 여기 계신다고 해서 달려왔죠.”

“그랬구나.”

“할아버지, 그런데 갑자기 왜 도혁이 형 집에 계시는 거예요?”

“그, 그럴 일이 좀 있다. 일단 앉자꾸나.”

차 회장은 재빨리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재인의 흔적이 있나 확인했다.

다행히 거실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차 회장은 도혁이 여자와 같이 살고 있다는 걸 혹시라도 진혁이 알게 될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지난번, 진혁이 도혁에게 여자가 있냐고 물었을 때 소문이 날까 두려워 딱 잡아뗐던 차 회장이었다.

진혁이 거실 소파에 앉자마자 차 회장이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야?”

“역시 아직 모르시는군요. 아주 엄청난 일이 있었죠.”

“그게 뭔데?”

차 회장의 눈썹이 꿈틀했다.


“도혁이 형에 관련된 일이라 할아버지가 꼭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왔어요.”

“도혁이와 관련된 일? 뜸 들이지 말고 어서 말해봐.”

“일단 이것 먼저 보세요.”

진혁은 차 회장에게 휴대전화 화면을 보여줬다.

차 회장은 티셔츠 앞주머니에서 돋보기를 꺼내 찬찬히 휴대전화를 들여다봤다.

다음 순간, 휴대전화를 쥔 차 회장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차 회장이 사색이 된 얼굴로 물었다.


“대체 이게 뭐냐?”

“오늘 아침에 회사 인트라넷에 올라온 글이에요. 이것 때문에 대산그룹 전체가 아주 발칵 뒤집혔다니까요.”

“어디서 이런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그러게요. 도혁이 형이 부하 직원을 가스라이팅하고 동거한다는 게 말이 돼요?”

진혁은 일부러 차 회장을 떠보는 말을 던졌다.

차 회장은 속이 뜨끔해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진혁이 왜 집으로 찾아왔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분명 루머인지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겠지.

차 회장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동거하는 건 맞다.”

“네?”

진혁은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 기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이 내용이 사실이란 말이에요?”

“어디 도혁이가 그럴 애냐? 누군가 모함하는 거지. 그냥 서재인이랑 사귀는 것뿐이야.”

“그렇군요. 아무리 그래도 서진물산과 혼담이 오가는 중에 다른 여자와 동거라니……. 엄청난 일이긴 하네요.”

서진물산 얘기가 나오자 차 회장은 골치가 아파 이마를 짚었다.

이제 서진물산 측에 동거 얘기가 퍼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둘을 갈라놓으려고 내가 여기 와 있었던 거다. 이제 다 소용없게 돼버렸지만.”

“그러셨군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이다니 평소 냉철했던 도혁이 형답지 않네요.”

“아주 여자에 푹 빠져서 넋이 나가 있더니 결국 이런 꼴이 됐구나.”

쯧.

차 회장이 혀를 차며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이 사태를 어떻게 잠재워야 하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결국, 우려하던 대로 도혁과 재인의 관계가 소문이 나버렸다.

악의적으로 비방하고 모함하는 글이기는 하지만, 여성인 부하 직원과 같이 살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이 루머를 잠재우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거냐?”

잔뜩 날이 선 차 회장의 눈빛에 진혁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지금은 뒷전으로 물러나 있긴 해도 차 회장은 서슬이 퍼렇게 대산그룹을 호령했던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이었다.

자칫하면 불호령이 떨어지기 일쑤여서, 진혁은 반항기 가득했던 사춘기 시절에도 할아버지 앞에서는 꼼짝도 못 했었다.

이번 일이 진혁과 차정환의 소행이라는 걸 알게 되면 할아버지가 어떻게 나오실지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쫄 것 없어. 그래 봤자, 이빨 빠진 호랑이야. 이 연세에 무슨 힘이 있다고.’

진혁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미리 준비해온 대답을 꺼냈다.


“그걸 알면 벌써 할아버지 앞에 대령했죠. 누군지 모르겠지만 도혁이 형에게 원한이 깊은 사람인가 봐요.”

“흠. 인트라넷에 올린 데다 서재인에 대해 알고 있는 걸 보면 분명 내부자의 소행인데…….”

“안 그래도 그런 것 같아서 아침에 일이 터지자마자 제가 사람을 시켜서 서재인에 대해서 좀 캐봤어요. 주변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니 서재인의 남자관계가 꽤 복잡했다고 하더라고요.”

“남자관계가 복잡했다고?”

차 회장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진혁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미리 짜둔 시나리오대로 재인을 몰기 시작했다.

차도혁이 재벌이라는 걸 알고 일부러 접근한 헤픈 여자로.


“옆 부서 나민우 팀장과 선후배라고 하면서 밖에서 자주 따로 만났었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정말이냐?”

“네. 같은 부서에 있는 한규민 과장과도 끈적끈적해 보이는 게 둘 사이도 심상치 않았답니다. 몇 년 만에 회사에서 다시 만났다고 하는데, 일부러 끌어들인 것 같다더군요.”

차 회장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진혁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런 여자가 도혁이 형과 얽히다니! 분명 도혁이 형이 재벌이라는 걸 알고 일부러 접근한 걸 거예요.”

“…….”

“졸지에 버림받은 꼴이 된 남자들 중 하나가 앙심을 품고 일을 벌였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진혁의 말이 끝났는데도 차 회장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저 서늘한 눈빛으로 뚫어지게 진혁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잘 먹힌 것 같네.’

진혁은 짐짓 걱정스러운 얼굴로 덧붙였다.


“할아버지, 서재인이랑 도혁이 형, 빨리 떼어놔야 하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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