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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팀장님 눈이 얼마나 높으신데! (104/129)


103화. 팀장님 눈이 얼마나 높으신데!
2023.05.27.



“저, 강 대리님……?”

재인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나희가 정색을 하며 펄쩍 뛰었다.


“사람을 왜 그렇게 쳐다봐요? 난 모르는 일이에요!”

“서 주임님, 우리 팀 출근하기 전에 이미 글이 올라와 있었어요.”

연지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인트라넷은 사내 노트북으로만 접속할 수 있었다.

팀원인 나희가 출근하기 전에 글이 올라왔다는 것은 나희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소행이라는 얘기였다.

나희에 대한 오해가 풀렸는데도 재인은 영 찜찜함이 가시지 않았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누군지 모르지만, 헛소문을 퍼트려서 팀장님을 공격하려고 작정한 게 분명해요.”

연지가 주먹을 불끈 쥐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자 박 과장이 불쑥 끼어들었다.


“헛소문 맞지? 내 그럴 줄 알았어. 우리 팀장님은 그럴 분이 아니지. 대체 누가 이런 헛소문을 퍼트린 거야?”

“박 과장님…….”

재인은 도혁을 믿어주는 박 과장의 말에 울컥했다.

우리 박 과장님, 그동안 팀장님에게 업무적으로 무수히 깨지긴 했어도 힘들 때는 의리를 지키는 분이었구나.

재인이 박 과장의 새로운 면모에 마음이 따뜻해지려는 찰나!

박 과장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팀장님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은 냉혈한이긴 해도 눈이 얼마나 높으신데! 다들 기억나지? 톱스타 신연주 보고도 눈 하나 깜짝 안 하신 거. 그런 팀장님이 서 주임을? 그게 말이 돼?”

“아…….”

그런 뜻이었어?

재인은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가만, 언젠가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것 같은데?’

도혁과 영화관에 갔다 나희에게 딱 걸려서 의심받았을 때.

그때 박 과장이 말도 안 된다며 열변을 토했던 상황과 똑같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깊은 빡침이 느껴지는 것도 똑같았다.


 
이 사람이 진짜!

재인이 한마디 쏘아붙이려고 하는데, 갑자기 연지가 버럭 소리쳤다.


“박 과장님, 그런 거 아니에요!”

“아휴, 귀청 떨어지겠네! 아니면 아닌 거지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팀장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시면서 함부로 말씀하시니까 그렇죠.”

“팀장님 일에 연지 씨가 왜 이렇게 흥분해? 연지 씨가 무슨 팀장님 가족이라도 돼?”

네. 팀장님의 사촌 동생입니다.

시원하게 쏘아붙이고 싶은 재인이었지만, 그거야말로 밝혀져서는 안 될 비밀.

재인은 다급히 연지의 팔을 붙잡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듯 심각한 상황에서 쓸데없는 곳에 에너지를 낭비할 여력이 없다.

재인은 심호흡을 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했다.

도혁과의 관계가 본의 아니게 알려져 버린 지금, 발뺌해봤자 아무도 곧이곧대로 믿지 않을 게 뻔했다.

그렇다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더 큰 오해를 막기 위해 솔직하게 밝히는 것뿐.

이윽고 결심을 굳힌 재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실은…… 팀장님이랑 저, 사귀고 있어요.”

“뭐라고?”

박 과장의 눈이 툭 튀어나왔다.


“사귄 지는 얼마 안 됐어요.”

“그럼…… 동거도 사실이야?”

“네. 제가 사정이 있어서 살 곳이 없어지는 바람에 팀장님 집에서 살게 됐어요.”

박 과장은 믿기지 않는 진실에 충격이 컸는지 입을 헤, 벌린 채 눈만 끔벅거렸다.

다른 팀원들의 얼굴에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재인은 분명한 어조로 마침표를 찍었다.


“저랑 팀장님은 절대 글에 쓰인 것처럼 이상한 관계가 아니에요. 이건 누군가 팀장님을 음해하려는 음모라고요!”

재인은 그동안 감추려고 애써왔던 사실을 털어놓고 나자 한편으로는 속이 후련했다.

도혁과의 사랑이 굳건하니 구설수에 오르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규민이 재인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 주임, 그런 게 아니라는 거 다 아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 진실은 곧 밝혀질 테니까요. 나도 힘닿는 데까지 도울게요.”

“……고마워요.”

“근데 팀장님, 혹시 누구한테 원한 산 일 있나요? 이렇게 작정하고 매장시키려고 하는 걸 보면 뭔가 있는 것 같긴 한데…….”

“아!”

불현듯 재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그건 바로, 도혁이 후계자가 되는 걸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인물,

차정환 대표였다.

* * *

도혁과 재인의 스캔들로 회사 전체가 시끌시끌한 그 시각.

대산그룹 본사 차정환 대표의 집무실에서는 진혁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버지, 이 비서한테 연락이 왔는데 대산F&G 내부 분위기가 말이 아니랍니다. 도혁이 형은 곧장 이사실에 불려가고 서재인도 몹시 곤란해하고 있다던데요. 지금쯤 도혁이 형, 이사진들에게 해명하느라 골치 꽤나 아플 거예요.”

“계획대로 잘된 것 같구나.”

차정환은 책상 위에 턱을 괸 채 흡족하게 웃었다.

도혁을 후계자 자리에서 밀어내기 위한 계획의 서막이 활짝 열린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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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진혁과 세정의 하룻밤으로 결혼 얘기까지 직결됐던 그 날.

진혁은 윤문식에게 도혁을 쓰러뜨리기 위한 계획을 자세히 설명했다.

윤문식을 만나기 전에 미리 아버지 차정환과 입을 맞춰둔 내용이었다.


“윤 회장님, 차도혁이 지금 부하 직원인 서재인이라는 여성과 동거하고 있다고 말씀드린 것, 기억하고 계시죠?”

“그걸 어떻게 잊겠나. 차도혁 이 나쁜 놈, 감히 우리 집안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다시 들어도 분통이 터지는지, 윤문식이 잔뜩 구겨진 얼굴로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진혁은 윤문식에게 다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나치의 선동가 괴벨스가 이런 말을 했지요. ‘내게 한 문장만 달라. 그러면 누구든지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라고.”

“아, 들어본 적 있네만. 갑자기 그 말을 왜 하는 건가?”

진혁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진실과 적적하게 섞일 때 거짓말의 효과가 크다고도 했죠. 그래서 일단 차도혁의 동거 사실을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회사 전체에 공개할 겁니다.”

“‘그럴싸하게’라는 게 구체적으로 뭔가?”

“차도혁과 서재인, 평범한 남녀관계를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폭력 그리고 직권남용으로 엮을 겁니다.”

순간, 윤문식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것 가지고 차도혁한테 큰 타격이 있겠나? 두 사람이 아니라고 해명하면 그만인데.”

“해명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희의 목적은 차도혁의 깨끗한 커리어에 흠집을 내는 것이니까요. 대중은 진실을 원하는 게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을 믿거든요.”

“그렇긴 하지.”

“거짓말도 반복되면 결국 믿게 되어 있어요. 동거하고 있는 건 사실이니 분명 그 여파가 클 겁니다.”

“그렇군. 주주들도 그런 스캔들에 얽힌 것만으로도 못마땅하게 생각할 거야.”

윤문식이 흡족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이미 색안경을 꼈으니 회사 내에서 차도혁과 서재인을 쳐다보는 시선도 곱지 않겠지.”

“맞습니다.”

진혁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게다가 최근에 뭐가 틀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차도혁의 최측근인 김성준 비서실장이 제대로 된 인수인계도 없이 일을 그만두고 등을 돌렸다는 말이 자자합니다.”

“최측근이 갑자기?”

“소문으로는 서재인 문제로 차 회장님과 차도혁 사이에서 매우 곤란해했었다고 하더군요.”

김 실장이 그만뒀다는 얘기가 얼마나 반갑던지.

진혁은 신도 자기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그것 때문에 차도혁이 심적으로 많이 약해져 있을 겁니다. 지금이 차도혁을 공격하기에 가장 적기라는 얘기죠.”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최측근이 질려서 떠나게 만들다니. 차도혁도 어지간히 정신이 나갔군.”

윤문식이 조소 띤 얼굴로 이죽거렸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차정환이 맞장구를 쳤다.


“아무렴요. 후계자를 결정짓는 이 중요한 시기에 도혁이 녀석이 여자에게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다니. 우리 입장에서는 차라리 다행입니다.”

“차 회장님만 믿고 혼담을 진행했었는데, 차도혁이 그렇게 약해빠진 인물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그래서 덕분에 저희가 이렇게 좋은 인연을 맺게 된 거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차도혁에게 감사해야죠.”

“그건 그렇네요.”

차정환과 윤문식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껄껄껄 웃어 젖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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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은 그날의 회합을 회상하며 씩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드시 차도혁을 밀어내리라.

진혁은 들뜬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아버지, 곧장 다음 계획으로 넘어갈까요?”

“그러자꾸나. 기다릴 것 없이 바로 진행해라. 아예 약해져 있을 때 뿌리까지 뽑아버려야지.”

“네, 알겠습니다.”

진혁은 휴대전화를 꺼내 개인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야. 서재인 쪽 바로 움직여. 우리가 한 일이라는 거 절대 드러나면 안 되는 거 명심하고.”

 

* * *



“팀장님, 어디 계셨어요? 괜찮으세요?”

같은 날 점심시간.

재인은 25층에 있는 비밀회의실에서 도혁과 만났다.

오전 내내 도혁이 사무실에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 데다 연락도 되지 않아, 재인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도혁의 연락을 받고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었다.


“응. 서재인 씨야말로 괜찮아?”

도혁이 심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저보다 팀장님이 더 걱정이죠.”

“연락 못 해서 미안해. 계속 이리저리 불려 다니고 김 실장님과 상의하느라 정신이 없었어.”

“전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재인이 안쓰러운 마음에 도혁의 볼을 쓰다듬자, 그는 괴로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기분 탓인지 도혁의 얼굴이 아침에 집에서 봤던 것보다 부쩍 수척해 보였다.


“미안해. 이런 일을 겪게 해서…….”

“아니에요. 그보다 그 글은 누가 올린 건지 알아내셨어요?”

“아직. 아마 차정환 대표 지시일 거야.”

“역시. 저도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도 친척인데 차 대표님 정말 너무했네요.”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야. 이렇게까지 야비한 수를 쓸 거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지만.”

도혁이 대수롭지 않은 듯 말을 이었다.


“꼬투리를 제대로 잡았으니 무슨 수를 써서든 나를 후계자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 할 거야.”

“그럼 안 되잖아요! 빨리 아니라고 해명을 해야죠.”

재인은 도혁이 잘못될까 봐 덜컥 겁이 났다.

도혁이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해명한다고 끝날 일이 아니야. 다들 그대로 믿지도 않을 거고. 일단 스캔들이 터졌으니 주주총회에서도 불리하게 작용하겠지.”

“말도 안 돼! 그럼 팀장님이 너무 억울하잖아요.”

“어쩔 수 없지. 빌미를 제공한 건 나니까.”

도혁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빌미.

재인은 그 말이 가슴에 콕 박혔다.

애초에 도혁과 동거를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터였다.

도혁도 무사히 후계자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

재인은 자신이 도혁의 인생에 걸림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문득 차 회장과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깟 소꿉장난 같은 감정으로 도혁이 앞길을 막으려고?」

「서재인 씨는 도혁이한테 뭘 해줄 수 있지?」

차 회장 앞에서 당당하게 사랑한다고 큰소리쳤지만, 결과적으로 장애물이 되고 말았다.

재인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무슨 소리야! 다 내가 서재인 씨를 좋아해서 억지로 붙잡은 건데.”

그러게 왜 저를 좋아하셔서.


“어찌 됐든 팀장님한테 방해가 됐잖아요. 제가 없었으면…….”

그 순간, 도혁은 재인의 팔을 잡아당겨 부서져라, 세게 끌어안았다.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마! 서재인 씨가 없는 삶 따위 필요 없으니까!”

“팀장님…….”

재인은 고개를 들어 도혁을 바라봤다.

살짝 벌어진 그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열기가 새어 나왔다.


“서재인 씨……”

재인은 부름에 응답하듯 그의 입술을 찾아 한껏 발돋움을 했다.

맞닿은 두 입술이 부드러운 감촉에 막 젖어 들려는 찰나.


“저기…… 조금 이따 다시 들어올까요?”

날벼락 같은 목소리에 재인과 도혁은 후다닥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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