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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지금이라도, 집에 갈까요? (103/129)


102화. 지금이라도, 집에 갈까요?
2023.05.23.



“진짜예요. 자, 보세요.”

유라가 휴대전화 화면을 켜서 성준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대화창에는 그녀가 옥탑방 안에서 찍은 셀카와 몇 마디 짤막한 대화가 적혀 있었다.


[엄마, 여기 재인이 집인데 늦었으니까 자고 갈게요.]

[알았어. 재인이한테 놀러 좀 오라고 해.]

[그럴게요.]

“혹시나 해서 미리 허락받아 놨어요. 우리 엄마한테는 재인이가 곧 프리패스거든요.”

유라가 살며시 성준의 옷깃을 붙들며 물었다.


“이제 괜찮죠?”

“아…….”

순간 성준은 머릿속이 새하얘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정말이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무심코 던진 농담이 진짜가 되어버리다니.

눈앞의 그녀가 허락까지 받았다는데.

지금 와서 농담이었다고 다시 집에 가라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곳에 머물게 했다가는?


‘참을 자신이 없어!’

성준은 상상만으로도 이성이 날아가 버릴 것 같아 미간을 찌푸렸다.

성준이 인상을 구기며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유라는 유라대로 자존심이 상했다.


‘이렇게까지 티를 팍팍 내는데 왜 여태 아무 말도 없어? 사람 민망하게. 나 혼자 오바 한 거야?’

키스할 때 열정적인 걸 보면 목석도 아닌 것 같은데 대체 뭐가 문제인 건지.

결국 유라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볼멘소리를 터뜨렸다.


“별로 반기지 않는 것 같으니 그냥 집에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

“아니, 그게 아니라…….”

성준은 밖으로 나가려는 유라의 팔을 다급히 붙잡았다.


“그게 아니면 뭔데요?”

유라가 물끄러미 쳐다보자 성준은 숨이 턱 막혔다.

순식간에 온몸에 열이 훅 올라왔다.

이대로 거추장스러운 생각 따위 다 집어던지고 유라에게 돌진하고 싶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성준은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폭주하려는 욕망에 제동을 걸었다.

성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시간이 늦었어요. 집에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됐어요! 혼자 갈래요.”

유라가 성준의 손을 뿌리치고 돌아섰다.


“유라 씨, 그러지 말고…….”

성준이 다시 그녀의 팔목을 붙잡은 순간, 유라가 심통이 단단히 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도 엄마가 선보라고 하는 거 기껏 싫다고 하고 왔는데, 확 나가버릴까 보다.”

“유라 씨, 어떻게 그런 말을!”

“왜요? 사귀는지 아무도 모르는데 안 될 것도 없죠.”

유라의 가시 돋힌 말이 성준의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다.

성준은 유라를 와락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절대 안 돼!”

“놔요! 그만 가라면서요.”

유라는 성준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바동거리다 그의 가슴을 세게 밀쳤다.

하지만, 그 반동으로 오히려 튕겨져 나와 그만 중심을 잃고 침대로 털썩 쓰러져 버렸다.


“아얏!”

“유라 씨, 괜찮습니까?”

성준은 황급히 유라의 안색을 살폈다.

유라도 놀랐는지 멍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다행이다. 어디 다쳤을까 봐 걱정했어요.”

성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유라 씨, 선보겠다는 말, 진심입니까?”

“당연히 거짓말이죠. 선보라는 얘기도 없었는걸요.”

“아, 다행이다!”

응? 잠깐만.

성준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유라를 쳐다봤다.

그러자 유라가 발그레한 얼굴로 그의 목에 스윽 팔을 둘렀다.


 
그 순간, 성준은 침대 위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유라를 내려다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런! 성준은 흠칫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유라가 더 빨랐다.

유라는 성준의 목에 두른 손을 단단히 맞잡았다.

그러고는 얼어붙은 그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속삭였다.


“지금이라도, 집에 갈까요?”

“아……!”

일순 성준은 백만 볼트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온몸이 찌르르 떨렸다.

가슴을 뒤흔드는 그녀의 한마디가 잠자고 있던 야수의 본능을 건드려버렸다.

미처 제어할 틈도 없이 피가 단숨에 끓어올랐다.

이성이 위태롭게 흔들리자 때를 놓치지 않고 그의 본능이 목이 쉬어라 ‘아니오!’를 외쳤다.

결국,

성준은 입술을 감쳐물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유라의 입가에 사랑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성준은 갑옷처럼 옥죄고 있던 셔츠를 벗어 던지고 지체 없이 그 속으로 풍덩 빠져들었다.

억눌러왔던 욕망이 한꺼번에 분출되자, 좁디좁은 옥탑방은 순식간에 뜨거운 공기로 가득 찼다.

하아.

하아.

어두운 방 안,

거친 호흡만이 적막을 깨트리며 쉴 새 없이 교차했다.

성준은 그녀의 따뜻하고 보드라운 감촉에 취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눈을 감은 채 제게 감겨오는 가녀린 손길을 느끼며 오로지 본능이 이끄는 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긴긴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에게 스며들었다.

마치 원래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 * *

한밤중.

짙은 어둠 속에 무언가가 소리 없이 움직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불면증에 시달린 자.

그 이름은 차도혁이었다.

도혁은 최대한 살금살금 풍선이 동동 뜨는 것처럼.

최대한 숨을 죽인 채,

느릿느릿,

길고 긴 복도를 걷고 있었다.


‘이러다 서재인 씨 방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날이 새겠네. 대체 누가 이렇게 복도를 길게 만든 거야! 이사를 가버리든가 해야지!’

재인의 방까지 왜 이리 멀게만 느껴지는지.

도혁은 괜히 죄 없는 건축업자를 원망하며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었다.

혹시라도 지난번처럼 할아버지가 불쑥 튀어나오는 건 아닌지, 온 신경이 곤두선 채.

잔뜩 긴장한 탓에 등은 벌써 땀으로 눅눅했다.

할아버지에게 걸리는 것도 민망한 일인 데다, 밤잠 없고 예민한 할아버지에게 걸릴 확률이 엄청나게 높지만.

그렇다고 넋 놓고 멍하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지난번 재인이 속삭였던 말 한마디 때문에.


「앞으로는 밤에…… 방문 안 잠글게요.」

그 말을 하고 사랑스럽게 웃던 재인을 떠올리자 도혁은 힘이 불끈 솟았다.


‘서재인 씨가 그렇게까지 얘기했는데, 진짜 안 잠갔는지 확인은 해보는 게 예의 아니겠어?’

도혁은 저를 보고 사막여우처럼 눈을 동그랗게 뜰 재인을 상상하다 그만 쿡쿡 웃음이 터져버렸다.

흡!

흠칫 놀란 도혁은 황급히 입을 틀어막고 할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방 쪽을 쳐다봤다.

방문이 벌컥 열리는 건 아닌지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별다른 기척이 없었다.

잠귀 밝은 할아버지도 간만의 나들이 덕분에 깊은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휴우.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정신 바짝 차려, 차도혁!”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걸음을 옮긴 도혁은 한참 만에 재인의 방문 앞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도혁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내쉬며 호흡을 고른 뒤, 두 손으로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렸다.

드디어,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무드등이 켜진 침대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도혁은 살며시 다가가 그녀의 옆에 누웠다.

그러고는 재인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서재인 씨, 나 왔어. 일어나 봐.”

“으음.”

재인은 잠결에 이리저리 뒤척이다 도혁이 누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오목조목한 이목구비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심장이 버텨내지 못할 정도로 두근거렸다.


“서재인 씨…….”

다시 재인을 깨워 보려던 도혁은 피식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관두자.’

기분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재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도혁은 선홍빛 입술에 살며시 입을 맞추고는 나직이 읊조렸다.


“……잘 자.”

그 뒤로도 한참을 넋이 나간 듯 재인을 바라보다 잠이 든 도혁이었다.

.
.
.

한편.

방 밖에서는 차 회장이 복잡한 심경으로 재인의 방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전, 도혁이 재인의 방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도 잠자코 있었던 그였다.

차 회장은 발길을 돌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얼빠진 놈 같으니라고!”

기껏 도혁과 재인을 갈라놓으려고 다잡았던 마음이 마구 흔들려 당혹스러웠다.

갈 길은 이미 정해져 있는데도 도무지 씁쓸함이 가시지 않았다.

차 회장 자신도 어떤 선택을 해야 도혁이 진정으로 행복할지 잘 알고 있기에.

* * *

찌뿌둥한 몸.

카페인을 갈구하는 멍한 머리.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월요일 아침이었다.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 화장실에 들른 재인은 두 팔을 쭉 뻗어 크게 스트레칭을 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몸이 더 무거웠다.


‘힘내자, 힘! 주주총회 때까지 한 달 남았잖아. 일정 맞추려면 프로젝트도 부지런히 진행해야지.’

재인은 다이어트 라인이 부디 성공해서 도혁이 무탈하게 후계자 자리에 오르기를 바랐다.

다행히 프로젝트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고 다음 달에 무사히 출시될 예정이었다.

동물원에 다녀온 이후로 차 회장의 태도도 한결 누그러졌다.

도혁과는 매 순간이 행복한 꿈을 꾸는 것처럼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감사하게도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부디 이 행복이 깨지지 않기를…….’

재인이 간절히 기도하던 그때, 누군가 소란스레 화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말도 안 돼! 정말?”

“그렇다니까. 순진한 줄 알았더니 그런 내숭 덩어리일 줄이야.”

인사만 나누는 옆 팀 여직원들이었다.

재인은 언제나처럼 밝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 네…….”

여직원들은 재인을 보자 언제 떠들었냐는 듯 입을 딱 닫고 눈길을 피했다.

평소와는 다른 반응에 재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밖으로 나갔다.


‘왜들 저러지?’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재인의 사무실도 어쩐 일인지 복도까지 들릴 정도로 시끌시끌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재인이 들어가자 사무실 안이 갑자기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인사받는 이 하나 없이, 팀원들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심각한 표정으로 재인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당황한 재인은 쭈뼛쭈뼛 자리에 앉았다.


“연지 씨, 무슨 일 있었어? 사무실 분위기가 왜 이래?”

“그게…….”

연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박 과장이 다짜고짜 재인에게 물었다.


“서 주임, 팀장님이랑 동거한다는 게 사실이야?”

“네에?”

재인은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가,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 대산그룹 인트라넷 익명 게시판에 팀장님이랑 서 주임이 같이 산다고 올라왔어. 회사가 이것 때문에 아주 난리라고!”

“뭐라고요?”

재인은 온몸이 덜덜 떨리고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충격을 받아 머릿속이 새하얗게 된 재인에게 연지가 제 모니터 화면을 보여줬다.

[대산F&G 상품기획1팀 팀장 차도혁의 실체를 밝힌다!]

차도혁은 12월 초부터 같은 부서의 부하 직원인 서재인 주임과 동거를 하고 있다.

차도혁은 평소 집착해왔던 서재인을 회유해 강압적으로 동거를 강요했다.

평소에도 서재인은 차도혁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가스라이팅을 당해왔다.

차도혁은 서재인의 업무 역량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프로젝트 리더를 맡기고, 추가 수당을 제공하는 등 부당한 특혜를 제공했다.

이는 다른 직원들에게 해를 끼치는 차별 행위이며…….

이 같은 행위는 명백한 직권남용으로 근로기준법에 위반되는 월권행위 및 직장 내 괴롭힘 행위이며 나아가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폭력 행위에 해당한다.

차도혁은 법적으로 처벌받아야 마땅하다.

깨알 같은 글씨로 화면을 가득 채운 글에는 도혁을 범죄자급으로 매도하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글을…….”

재인은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동거 사실이 알려진 것만으로도 충격인데, 대놓고 도혁을 깎아내리려는 악의적인 비방이라니.

재인은 도혁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지 걱정이 되었다.


“연지 씨, 팀장님은 어디 계셔?”

“출근하자마자 이사님 방에 불려 가셨어요.”

인트라넷 글이 이미 상부까지 쫙 퍼진 모양이었다.


‘대체 누가 쓴 거지?’

회사에서 재인과 도혁이 사귀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딱 네 명.

민우와 규민, 연지, 나희뿐이었다.


‘연지 씨는 당연히 아니고, 민우 선배나 규민이가 그랬을 리도 없고…… 설마?’

모니터 화면을 쳐다보는 나희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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