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제가 여기 있는 게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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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제가 여기 있는 게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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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제가 여기 있는 게 싫어요?
2023.05.20.
윤문식이 생각보다 쉽게 넘어오자 차정환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웃음이 걸렸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도혁이 문제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다 생각해둔 시나리오가 있으니까요.”
“그게 뭡니까?”
윤문식이 미심쩍은 말투로 물었다.
그때 마침 문이 열리고 미리 주문해둔 식사가 들어왔다.
“얘기가 길어질 테니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세정 양이 윤 회장님 좋아하시는 걸로 미리 주문해뒀었는데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죠.”
윤문식은 차정환의 권유에 마지못해 개운치 않은 표정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일이 술술 풀리는군. 차도혁 그 잘난 얼굴이 어떻게 일그러질지 벌써 기대가 되는걸?’
진혁은 도혁을 엿 먹일 생각에 입꼬리가 한껏 치켜 올라갔다.
어렸을 때부터 도혁과 끊임없이 비교당하며 자라, 늘 열등감에 시달리며 이를 갈았던 진혁이었다.
드디어 도혁에게 그 수모를 갚아줄 기회가 생겨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 진혁을 지켜보는 세정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하룻밤 사이에 운명이 바뀌어버렸다.
‘돌이키기엔 이미 늦었어. 이젠 끝까지 가는 수밖에…….’
세정은 차도혁과 서재인을 떠올리며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내가 받은 모멸감, 반드시 되돌려 주겠어!’
* * *
“곤히 잠드셨네요.”
재인은 뒷좌석에서 세상모르고 잠든 차 회장을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세 사람은 저녁으로 차 회장이 좋아하는 해물찜을 먹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차까지 마시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도혁이 백미러로 뒷좌석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최근에 이렇게 밖에 오래 계신 적이 없으니 피곤하실 만도 하지.”
“근데 오늘 회장님…… 기분은 괜찮으셨던 거죠?”
차 회장이 워낙 무뚝뚝해서 기분이 좋은지 아닌지 알쏭달쏭한 재인이었다.
“응. 굉장히 즐거워하셨어.”
“그걸 어떻게 아세요?”
“할아버지 얼굴에 대문짝만하게 써 있었잖아.”
“정말요?”
대체 언제? 어디에서?
재인은 사진첩을 뒤적거리듯 오늘 차 회장과 함께했던 순간들을 되짚어 봤다.
그러나 오늘도 차 회장은 다른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무심한 표정이었다.
흐음. 차도혁 씨가 그렇다니 그런 걸로.
“암튼 다행이에요. 차 회장님이 코끼리를 못 봐서 아쉬워하셨던 게 마음에 걸렸었는데.”
“애들처럼 코끼리 타령은 무슨.”
도혁이 콧방귀를 뀌며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가자고 할 땐 안 가시더니 새삼스럽게…….”
“네?”
재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설마, 왜 코끼리 보러 가자고 하셨는지 알고 있었어요?”
“뭐…….”
도혁이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재인은 그만 풋, 하고 웃음이 터졌다.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시네.
“팀장님, 보면 볼수록 회장님이랑 똑같은 거 아세요?”
“어디가?”
“성격이 정말 비슷하다고요.”
“내가 저렇게 자기중심적인 데다 괴팍하고 고집이 세다고?”
도혁이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정말 자각을 못 하는 건가?
재인은 ‘네!’ 하고 크게 외치고 싶었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자고로 운전대 잡은 자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되는 법이다.
재인은 못 들은 척 딴청을 부렸다.
“회장님이랑 얼굴도 정말 많이 닮았어요.”
“닮긴 뭐가 닮아? 어딜 보나 내가 월등히 잘생겼는데.”
도혁이 진심으로 발끈했다.
일백 번 고쳐 생각해도 맞는 말이긴 한데 왠지 지금은 인정해주기 싫은 재인이었다.
“그건 팀장님 생각이고요. 회장님 젊었을 때 엄청 미남이셨을 것 같은데요.”
“그렇긴 했지. 물론 나보다는 한참 못 하셨지만.”
나 참, 유치하긴.
굳이 토를 다는 도혁의 모습조차 사랑스러웠지만, 재인은 짐짓 무심한 척 다시 물었다.
“팀장님, 할아버님을 꼭 그렇게 이겨야겠어요?”
“당연하지. 서재인 씨한테는 무조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생겨 보여야 해.”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안 그럼 내가 너무 억울하잖아. 내 눈엔 서재인 씨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데.”
꺅!
재인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진정시키려 손으로 볼을 감쌌다.
어쩜! 이런 닭살 돋는 멘트를 날리는 것조차 무지막지하게 멋질 수가!
도혁을 바라보는 재인의 두 눈에 큼지막한 하트가 두둥 떠올랐다.
도혁은 제게 넋이 나가 있는 재인을 힐끗 쳐다보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왜? 역시 차도혁이 세상에서 제일 잘생겼다 싶어?”
“네.”
결국 순순히 백기를 들고 만 재인이었다.
그제야 도혁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참, 팀장님이 전에 하셨던 말, 정말이었어요.”
“무슨 말?”
“알고 보면 회장님 꽤 좋은 분이라는 거요.”
“서재인 씨…….”
도혁은 할아버지 때문에 힘들었을 텐데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재인이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고마워. 그렇게 생각해줘서.”
“뭘요.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요.”
재인이 코끝을 찡긋하며 웃어 보였다.
갑자기 굳게 다물고 있던 도혁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뚱한 얼굴로 코끼리 인형을 들고 있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나서였다.
오늘 도혁은 그동안 매사에 삐걱거렸던 할아버지와 조금 더 가까워진 느낌을 받았다.
이게 다 재인이 윤활유 역할을 해준 덕분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때 대산그룹을 호령하던 회장님한테 코끼리 인형을 안고 사진을 찍게 만들다니. 도대체 서재인의 매력에 출구가 있긴 한 거야?’
재인을 알면 알수록 그녀에게 점점 더 깊이 빠져드는 도혁이었다.
도혁은 평생 서재인이라는 늪 속에 푹 빠져 살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 * *
한편, 그날 밤.
성준과 유라는 재인이 살던 옥탑방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두 사람이 이곳에 있는 건 정식으로 사귄 뒤로 처음이었다.
유라와 사귀기로 한 다음 날.
성준은 다시 옥탑방으로 이사를 왔다.
어머니의 눈치를 보지 않고 유라와 자유롭게 만나기 위해서였다.
유라가 방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재인이가 여기 살 때 자주 와서 자고 갔었는데, 이렇게 성준 오빠랑 둘이 있게 되다니 생각할수록 웃겨요.”
“그러게요.”
성준이 빙긋 웃으며 유라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재인이가 은인이에요. 택배 찾아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으면 우리 못 만날 뻔했잖아요.”
“서재인 씨한테는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성준의 진심이었다.
그날이 없었더라면, 자신은 지금쯤 아주 황량하고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었을 테니까.
성준은 아기 고양이처럼 제 팔에 착 달라붙어 있는 유라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유라와 비밀연애를 시작한 지도 벌써 2주가 지났다.
도혁에게 딱 걸렸으니 비밀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아직 재인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성격상 먼저 시시콜콜 떠들고 다닐 도혁도 아니었으니.
두 사람은 도혁의 후계자 승계가 무사히 끝날 때까지 교제 사실을 재인에게 밝히지 않기로 했다.
혹시라도 성준이 재인의 옥탑방에 사는 게 알려지면 괜한 긁어 부스럼이 될 테니까.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요.”
갑자기 고개를 든 유라가 성준을 바라보며 사랑스럽게 눈을 깜박였다.
“오빠도 저, 처음 봤을 때부터 반했죠?”
“네?”
처음엔 그냥 독특한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 솔직하게 얘기했다가는 대역죄인이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애초에 모범답안이 하나밖에 없는 꽉 막힌 질문이었다.
“다, 당연하죠.”
“그럴 줄 알았어요! 저한테 막 끌리는데 재인이 친구라서 들킬까 봐 일부러 밀어내려고 했던 거잖아요, 맞죠?”
“……그렇죠.”
“역시! 처음부터 저한테 호감이 있다는 게 팍팍 느껴졌다니까요.”
귀엽다.
성준은 행복한 착각에 빠져 해맑게 웃고 있는 유라를 보며 얼굴을 붉혔다.
“근데요, 오빠는 언제까지 저한테 존댓말 할 거예요?”
불만 섞인 유라의 목소리에 성준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직은 좀……. 갑자기 말을 놓으려니 영 어색해서요.”
“성지훈일 때는 잘만 하더니?”
“그거야, 유라 씨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어쩔 수 없이 연기했던 거죠.”
성준이 멋쩍게 웃자, 유라가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남우주연상급 연기였긴 했어요. 휴우, 그때가 좋았는데…….”
“네?”
성준은 흠칫 놀라 유라를 쳐다봤다.
지금 나한테 불만이 있다는 건가?
“유라 씨, 제가 뭐 잘못했습니까?”
“아뇨. 성준 오빠야, 워낙 젠틀하고 멋진 데다 배려심까지 넘치는 완벽한 남자죠.”
“그런데요?”
“그게 너무 과해서 문제지만. 전 가끔 성지훈의 거칠고 거리낌 없던 모습이 그리워요.”
유라가 촉촉한 눈망울로 성준을 빤히 쳐다봤다.
아주 많은 의미가 담긴 눈빛이었다.
흠흠.
곧장 그 의미를 눈치챈 성준은 헛기침을 하며 황급히 눈길을 피했다.
그랬다.
사실 유라는 성준과 여전히 키스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재인에게 도혁과 아직이냐며 도혁의 귓가에 목탁 소리가 들리겠다고 핀잔을 줬던 그 유라가!
매번 어떤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너무나도 절도 있게 딱 키스에서 끊는 젠틀 성준 때문에!
“이런. 벌써 10시가 넘었군요. 유라 씨, 피곤하실 텐데 그만 일어나시죠.”
대놓고 등을 떠미는 성준의 말에 유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일 일요일인데 벌써요?”
“우리 조조 영화 보러 아침 일찍 만났잖아요. 밖에 너무 오래 나와 있었어요. 유라 씨 부모님께서 걱정하시겠습니다.”
“저희 엄마 아빠는 그런 거 하나도 신경 안 쓰세요! 아직 모르시는구나, 저 집에서 내놓은 거.”
정색하며 둘러대는 유라 때문에 성준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유라 씨,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집에 가야죠.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좀 더 같이 있고 싶은데…….”
“내일도 일찍 만나면 되죠.”
그 순간, 유라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그럼…… 어차피 내일 일찍 만날 거, 왔다 갔다 하기 귀찮은데 그냥 여기서 잘까 봐요.”
“……!”
성준은 유라의 폭탄선언에 움찔 놀랐다.
성준의 머릿속에는 ‘이 좁은 방에 유라와 단둘이 있다’라는 사실만이 화려한 네온사인처럼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성준이 돌처럼 굳은 채 말이 없자 유라가 입술을 삐죽였다.
“왜요? 제가 여기 있는 게…… 싫어요?”
꿀꺽.
성준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럴 리가 없잖아!’
눈앞에 있는 생기발랄하고 사랑스러운 존재 때문에 성준의 심장박동 수는 이미 하늘 높이 치솟아 있었다.
가슴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이 들끓었다.
지금 이대로 유라를 와락 끌어안고 쓰러지고 싶었다.
하지만,
유라를 좋아한다는 걸 자각한 순간부터 그녀를 소중히 여기겠다고 다짐해온 성준이었다.
아무리 뜨겁게 불이 붙었다고 해도, 아직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섣불리 욕망에 따라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유라는 재인의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닌가.
그로서는 더더욱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정신 차려, 김성준! 아직은 때가 아니야.’
성준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고는 어색한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일부러 어린애 달래듯 농담을 던졌다.
“최유라 씨, 일단 집에 가서 부모님 허락부터 받고 오세요, 알았죠?”
“이미 허락 받았는데요?”
“네?”
유라가 얼빠진 성준을 향해 배시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