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코끼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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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코끼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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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코끼리 이야기
2023.05.16.
휘잉.
휘이잉.
살을 에는 칼바람이 적막한 공간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 한가운데 서 있는 세 사람.
도혁과 재인 그리고 차 회장은 동시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겨울의 야외 동물원에는 동물도 사람도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도혁이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리며 말했다.
“할아버지, 날을 잘못 잡은 것 같은데요? 꼭 구경하셔야겠어요?”
“그래도 이왕 온 거, 들어가 보자꾸나.”
차 회장은 패딩 지퍼를 턱까지 끌어 올리며 앞장을 섰다.
재인도 패딩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뒤를 따랐다.
“팀장님, 혹시 모르니까 한번 가봐요.”
도혁은 할 수 없이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 아침, 차 회장이 꼭 가고 싶다고 말했던 곳은 동물원이었다.
「코끼리가 보고 싶어.」
순수한 어린아이 같은 차 회장의 눈빛에 재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겨울이라는 계절의 장벽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그리하여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도착한 코끼리 우리는 역시나 텅 비어 있었다.
우리 앞에는 ‘기온이 낮아서 코끼리가 실외로 나올 수 없습니다’라는 안내 문구만 덩그러니 붙어 있었다.
“할아버지, 이제 됐죠? 날도 추운데 그만 돌아가요.”
도혁이 무심히 말했다.
우리에 매달린 차 회장은 못내 아쉬운 듯 쉽사리 발을 떼지 못했다.
“좀 있으면 나오는 거 아니냐?”
“여기에 추워서 못 나온다고 쓰여 있잖아요.”
재인도 바들바들 떨며 거들었다.
“그래요, 할아버님. 그러지 마시고 실내 동물관에 가요. 거기에는 동물도 많이 있을 거예요.”
“코끼리가 아니면 안 되는데…….”
도혁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할아버지, 애도 아니고 왜 그러세요?”
“뭐야, 이 녀석아?”
“암튼 전 실내관으로 갈 테니까 알아서 하세요.”
도혁은 휙 돌아서서 실내 동물관으로 향했다.
재인은 차 회장의 팔을 붙들며 방긋 웃었다.
“다음에 날 좀 따뜻해지면 다시 와요.”
“다시? 나랑 여길 또 오겠다고?”
“그럼요.”
재인이 흔쾌히 대답하자 차 회장은 덜컥 그녀에게 미안해졌다.
‘내가 그렇게 심하게 굴었는데 아침에도 나랑 같이 나가자고 먼저 챙기고……. 참 마음씨가 고운 아가씨네.’
어제 재인의 안색이 어둡고 멍해 있어서 내심 걱정했던 차 회장이었다.
오늘은 재인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아서 안심이 되었다.
그때, 재인이 신이 난 목소리로 외쳤다.
“어? 추로스다!”
재인은 기념품 가게 옆에 붙어 있는 간식 코너를 가리키며 눈빛을 반짝였다.
“할아버님, 추로스 드실래요? 제가 사 갈 테니까 회장님은 먼저 들어가 계세요.”
“글쎄, 나는 단 건 별로…….”
하지만 이미 재인은 경쾌한 발걸음으로 추로스 가게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추로스를 참 많이 좋아하나 보군.’
차 회장은 재인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왜 이래? 세정 양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해놓고 어쩌려고 그래?’
그렇다고 재인에게 일부러 심하게 굴자니 양심에 찔리고.
차 회장은 복잡한 심경으로 걸음을 뗐다.
실내 동물관 안에 들어가니 사막여우 우리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도혁이 보였다.
차 회장은 그 옆에 가만히 섰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흐른 뒤, 도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저 사막여우, 서재인 씨 좀 닮지 않았나요?”
“뭐? 가만…… 조금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뜰 때 너무 깜찍한 게 서재인 씨 놀랐을 때 표정이랑 비슷해요.”
“이런 얼빠진 놈!”
차 회장의 핀잔에 도혁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서재인 씨가 그렇게 좋냐?”
“당연한 건 굳이 묻지 마세요.”
“으이구, 아주 푹 빠졌구만.”
“할아버지, 서재인 씨 겪어보니 어떠세요?”
도혁이 넌지시 묻는 말에 차 회장은 무심한 척 답했다.
“흠흠. 뭐, 심성은 고운 것 같더구나.”
“서재인 씨는 얼굴도 곱고, 손도 곱고, 모든 게 죄다 고와요. 그러니까 허락해주세요.”
막간의 틈을 노려 차 회장을 찔러보는 도혁이었다.
“단단히 홀렸네! 네 눈엔 내가 사사로운 정에 호락호락 넘어갈 사람 같더냐?”
“네. 곧 그렇게 되실 거예요.”
도혁은 차 회장에게 최면을 걸듯 단호하게 말했다.
‘이 녀석이 정말 내 손자 차도혁이 맞아?’
차 회장은 능글맞기까지 한 도혁의 달라진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두 분 여기 계셨어요?”
갑자기 나타난 재인이 생긋 웃으며 두 사람에게 추로스를 내밀었다.
“역시 놀이공원에 오면 추로스를 먹어줘야죠?”
“난 단 건 별론데…….”
도혁은 구시렁대면서도 순순히 추로스를 받아 들었다.
덩달아 차 회장도.
차 회장이 마지못해 추로스를 한입 베어 물자 재인이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대답을 기다렸다.
“뭐…… 먹을 만은 하네.”
“그렇죠? 엄청 맛있죠?”
재인은 아이처럼 기뻐했다.
언제나 먹을 것에 진심인 재인이었다.
그 모습을 도혁이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참, 할아버님 드릴 게 하나 더 있어요.”
재인은 쇼핑백 안에서 코끼리 인형을 꺼내 차 회장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
“오늘 코끼리 보고 싶으셨는데 못 봐서 아쉬우셨잖아요. 그래서 이거라도 위안으로 삼으시라고요.”
“뭐?”
차 회장은 코끼리 인형을 받아 껴안고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재인 씨, 그렇다고 지금 80대 노인한테 인형을 선물한 건가?”
“나이가 무슨 상관이에요. 아, 이렇게 온 것도 기념인데 다 같이 사진 찍어요! 팀장님도 이리 오세요.”
그렇게 재인에게 떠밀려 세 사람은 코끼리 인형을 가운데 두고 오붓하게 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 두 남자의 웃는 얼굴이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어느덧 점심시간.
세 사람은 동물원에 있는 한식당에 들어갔다.
도혁이 화장실을 가자, 갑자기 대화가 뚝 끊겼다.
재인은 뻘쭘한 분위기를 깨려고 차 회장에게 할 말을 찾았다.
“아까 많이 아쉬워하시던데…… 코끼리를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흠흠. 그런 건 아니고…….”
갑자기 차 회장이 무언가를 떠올린 듯 눈을 끔벅거렸다.
“아니에요?”
“그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아, 그러셨군요. 뭔지 여쭤봐도 돼요?”
차 회장은 잠시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실은 도혁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쯤이었나, 나한테 코끼리 보러 가자고 졸랐는데 일이 바빠서 다음에, 다음에, 하고 미루다 결국 못 갔거든. 나중에 들으니 제 엄마 아빠도 바쁘다는 핑계로 비서한테 시켜서 보냈다더군.”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차 회장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더니 그 뒤로는 코끼리 얘기를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어. 그땐 일에 정신이 없어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는데, 지나고 보니 그게 가장 마음에 걸리더라고.”
“…….”
재인은 도혁을 생각하는 차 회장의 마음이 느껴져 가슴이 먹먹해졌다.
“뭐, 이제 와서 다 큰 애를 데리고 와봤자 아무 소용 없지만. 도혁이한테는 말하지 말게. 그냥 도혁이랑 외출할 일이 없어서 내친김에 한번 와본 거니까.”
“할아버님!”
갑자기 재인이 두 손을 모아 차 회장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날 따뜻해지면 우리 코끼리 보러 다시 와요! 꼭!”
“우리?”
“네!”
“그, 그러지.”
차 회장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두 분 뭐 하시는 겁니까?”
언제 왔는지 도혁이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아, 배고파! 음식은 언제 나오지?”
“그러게. 도혁아, 언제 나오는지 좀 물어봐라.”
딴청을 부리는 재인과 차 회장의 모습에 도혁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 * *
그 시각, 진혁은 아버지 차정환 대표 그리고 세정과 함께 DS호텔 스카이라운지 레스토랑의 특실에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벌컥 문이 열리고 세정의 아버지인 윤문식 회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윤문식은 화가 단단히 났는지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진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윤문식에게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윤 회장님, 오셨습니까. 갑자기 이렇게 모셔서 죄송합니다.”
“윤 회장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차정환이 악수를 청하자 윤문식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손을 잡았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죄송합니다. 일단 앉아서 말씀 나누시죠.”
자리에 앉은 윤문식은 세정을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넌 대체 처신을 어떻게 하고 다니는 거냐! 남사스러워서, 원.”
“죄송해요, 아버지.”
세정은 호랑이 같은 아버지의 기세에 눌려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진혁이 세정을 감싸고 나섰다.
“윤 회장님, 다 제 잘못입니다. 세정 씨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됐고, 내가 납득이 가게 설명해보게.”
“회장님, 차도혁이 여자 부하 직원과 동거하는 거 아십니까?”
“뭐야?”
윤문식이 눈을 부릅떴다.
“한 달 전부터 같이 살고 있습니다. 세정 씨와 혼담이 진행 중인데도요.”
“감히 어디서 그런 짓을!”
쾅!
윤문식이 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진혁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실은 저와 세정 씨, 1년 전 유학할 때 사귀었었습니다. 헤어지고 나서도 계속 못 잊고 있었고요. 그러다 세정 씨가 차도혁 때문에 속상해하는 걸 알고 가만히 지켜만 볼 수 없어서 그만. 어찌 됐든 일이 이렇게 된 건 전부 다 제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윤문식이 진혁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세정 씨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결혼?”
“네. 저 세정 씨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세정 씨도 같은 마음이고요.”
윤문식은 세정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정말이냐?”
“네, 맞아요. 저, 진혁 씨 사랑해요.”
세정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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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
진혁은 빈껍데기인 차도혁과 억지로 결혼하지 말고 자신과 결혼해 대산을 차지하자고 세정을 설득했다.
미치게 손에 넣고 싶었던 차도혁은 물 건너갔지만, 대산의 안주인이 된다는 건 포기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사실 진혁과 결혼해 차도혁을 밀어내는 건 세정의 최후의 보루이기도 했다.
이제는 거기에 차도혁에 대한 분노가 더해져 완전히 무너뜨리고 싶은 복수심에 불타오른 세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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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문식은 딸의 입에서 진혁을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의 속내를 읽었는지 차정환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윤 회장님, 이렇게 서로 사랑한다는데 결혼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도혁이와 결혼이 확정된 것도 아닌데 망설일 게 뭐가 있겠습니다.”
“그래도 이건 좀…….”
“게다가 윤 회장님만 힘을 실어주시면, 우리 진혁이가 대산그룹을 이어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서로 좋지 않겠습니까?”
순간 윤문식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윤문식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좋습니다. 그럼, 차도혁은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