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몰래 도망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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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몰래 도망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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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몰래 도망갈까?
2023.05.13.
“팀장님, 보통 많이 늦을 것 같으면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고 하지 않나요?”
재인은 도혁이 뭐라고 대답할지 궁금했다.
―그래야 하는 거야? 보고 싶은데?
어린아이 같은 투정 섞인 말투에 재인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차도혁을 누가 말려.
“그럼 제가 처음 팀장님 집에 이사 왔던 날도, 저를 보고 싶어서 밤늦게까지 기다리라고 했던 거였어요?”
―응.
“근데 그날도 늦게까지 일만 시키셨잖아요?”
―그거야, 그렇게라도 같이 있고 싶어서…….
그런 거였구나.
뒤늦게 도혁의 마음을 눈치챈 재인은 가슴이 마구 설렜다.
“팀장님, 대체 절 얼마나 좋아하신 거예요?”
도혁이 일말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서재인 씨가 사표 던졌을 때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 같았을 만큼?
차분한 목소리를 타고 전해오는 그의 진심이 재인의 가슴에 제대로 꽂혔다.
다음 순간, 재인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불끈 힘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래, 팀장님과 함께하기 위해서 라면 못할 것이 없어. 다시 힘내자, 서재인!’
이 남자, 무려 차도혁이니까!
재인은 굳게 닫혀 있는 차 회장의 마음을 다시 두드려보기로 마음먹었다.
* * *
그날 밤, 세정은 친구 민혜와 지난번에 갔던 다이닝바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연거푸 술잔을 비우는 세정을 민혜가 뜯어말렸다.
“세정아, 천천히 마셔. 이러다 갑자기 쓰러진다.”
“이 정도쯤이야. 괜찮아, 괜찮아.”
“평소에는 잘 안 마시면서 오늘은 왜 그래?”
“그냥 금요일 밤이라 마음 편히 마시려는 거지.”
그러자 민혜가 세정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럼, 저기 테이블에서 같이 마실까? 얼마 전에 알게 된 오빠들인데 아까부터 자꾸 합석하자고 해서.”
“뭐?”
세정은 민혜가 가리키는 쪽을 쳐다봤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쫙 빼입은 남자 둘이서 느끼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순간 짜증이 확 치밀어 오른 세정은 민혜의 팔을 뿌리치며 말했다.
“가고 싶으면 너나 가.”
“아, 아니야. 내가 널 혼자 두고 어떻게 가?”
세정의 싸늘한 반응에 민혜가 주춤하며 눈치를 봤다.
“됐어, 가. 차라리 나 혼자 있는 게 낫겠어.”
“정말?”
“응. 제발 가줘. 부탁이야.”
“알았어, 그럼.”
민혜는 이때다, 하고 미련 없이 세정을 버리고 남자들이 있는 테이블로 가버렸다.
저런 눈치도 없고 의리도 없는 걸 친구라고.
세정은 민혜와 저녁을 먹을 때부터 재인과 만났던 일 때문에 내내 기분이 처져 있었다.
그런데 그런 세정의 마음을 알아주기는커녕 이 와중에도 남자랑 어울릴 생각을 하다니.
민혜에게 그나마 남아 있던 미운 정까지 뚝 떨어진 세정이었다.
“뭐? 왜 삶을 헛되게 낭비하려 하냐고? 내 삶은 내가 결정하는 거라고?”
세정은 코웃음을 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데 재인이 했던 말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서재인, 네깟 게 뭔데 감히 나한테 훈계질이야? 별것도 아닌 게…….”
생각할수록 기분이 더러웠다.
처음 재인을 찾아갔을 때는 따끔하게 자기 분수를 일깨워 주려는 생각이었다.
차 회장의 속내를 까발려서 상처를 주고 제풀에 떨어져 나가도록 하고 싶었다.
그런데, 우습게 여겼던 서재인이 잘난 척 입바른 말을 늘어놓았다.
그것도 차도혁과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당당하게 밝히면서.
그 사실이 너무나도 분한 세정이었다.
집착이든 뭐든, 그렇게 갖고 싶었던 차도혁을 가진 여자.
그 사실만으로도 세정은 재인이 부러워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두고 봐, 너희들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악담을 퍼부은 세정이 쓰린 속을 달래려 또다시 술잔을 비운 그때였다.
“윤세정, 나랑 할 얘기가 있지 않나?”
세정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반쯤 감긴 몽롱한 시야에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그는 바로, 세정이 미치게 가지고 싶어 했던 그 남자였다.
* * *
다음 날 아침, 아직 잠이 덜 깬 세정은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느껴져 인상을 찌푸렸다.
지난밤, 홧김에 이기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신 탓이었다.
세정은 머리를 꾹꾹 누르며 천천히 눈을 떴다.
천장에 붙은 전등이 낯설었다.
분명 제 방이 아니었다.
‘여기가 어디지?’
세정은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낯선 방, 낯선 가구들, 그리고…….
제 옆에 엎드려 잠들어 있는 남자의 뒤통수.
“꺄아악!”
세정은 기겁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음 순간, 옷을 입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허겁지겁 이불을 칭칭 감았다.
세정의 비명에 잠이 깼는지 남자의 등 근육이 움찔거렸다.
남자가 천천히 몸을 틀어 바로 누웠다.
그의 얼굴을 본 세정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차진혁? 어, 어떻게?”
“세정아, 잘 잤어?”
진혁은 씩 웃어 보이고는 여유롭게 속옷과 바지를 찾아 입었다.
황망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정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여긴 어디고?”
“어디긴? 내 집이지.”
“내가 왜 여기 있는 거냐고!”
“설마, 어젯밤 일 하나도 기억 안 나?”
“어젯밤?”
세정인 미간을 찌푸리며 어둑어둑한 기억을 더듬었다.
그 한가운데에 희미하게 차도혁의 얼굴이 떠올랐다.
‘분명 마지막에 차도혁을 본 것 같은데……. 설마?’
세정은 진혁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얼핏 보면 같은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비슷한 이목구비.
세정은 어젯밤 자신이 도혁이라고 착각했던 이가 진혁이었음을 곧바로 깨달았다.
‘맙소사! 어쩌자고 이런 일을 저지른 거야.’
자책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빨리 자리를 피하는 것이었다.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옷 좀 입게 나가줘.”
“뭘 내외하고 그래? 한두 번 본 사이도 아닌데.”
“헛소리 그만하고 나가!”
“성질머리하고는…….”
진혁이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밖으로 나가려는 그때였다.
쾅.
난데없이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와 소리쳤다.
“차진혁, 너 이 자식! 지금 뭐 하는 거야!”
“아버지?”
다짜고짜 쳐들어온 이는 진혁의 아버지이자 대산그룹 대표인 차정환이었다.
차정환은 속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진혁이 비협조적으로 나와서 MF파트너스 장문수 대표의 딸과 진행 중이던 혼사가 엎어질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어젯밤 진혁의 비서로부터 아들이 여자와 집에 묵었다는 얘기를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 현장을 잡기 위해 달려온 것이었다.
“결혼 안 하겠다고 뒤로 빼더니 고작 하는 짓이 이게 뭐냐!”
“아버지, 일단 진정하세요.”
“지금 내가 진정하게 됐어!”
차정환은 진혁에게 소파 쿠션을 집어 던졌다.
그러고는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이불을 감은 채 돌처럼 굳어 있는 세정을 보며 말했다.
“이 여자였어? 아가씨, 더 험한 꼴 보기 전에 빨리 나가!”
“아, 네!”
세정은 정신없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옷가지를 주웠다.
“진혁이 넌 맨날 도혁이한테 밀리는 거 분하지도 않냐? 못난 놈, 이렇게 막 놀 거면 걸리지나 말든가! MF 쪽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차정환의 말에 진혁은 코웃음을 치며 세정을 가리켰다.
“아버지, 인사하세요. 이쪽은 윤세정이에요. 서진물산 윤문식 회장님의 딸 아시죠?”
“뭐?”
차정환의 눈이 툭 불거졌다.
“이런 미친놈!”
윤세정이라면 아버지 차대산 회장이 도혁의 배우자로 점찍어 놓은 상대였다.
그런 윤세정과 아들 진혁이 하룻밤을 보냈다니.
차정환은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해졌다.
패닉인 것은 세정도 마찬가지였다.
조용히 현장에서 빠져나가 대책을 강구하려 했는데.
계획이 보기 좋게 무너진 것도 모자라, 오히려 빼도 박도 못하게 차정환에게 된통 걸려버린 것이었다.
‘미치겠네! 차 회장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세정은 가뜩이나 숙취로 지끈거리는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 가운데 진혁만이 유일하게 차분했다. 심지어 여유가 넘쳐 보이기까지 했다.
진혁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계획대로 잘됐군.’
이 모든 것은 어떻게든 세정을 잡고 싶었던 진혁이 계획한 일이었다.
1년 전 세정과의 짧은 만남 이후 아쉬움이 가시지 않아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던 진혁이었다.
사촌 형인 도혁과 세정의 혼담이 오가는 것을 알았을 때는 속이 뒤집혔었다.
그러다 우연히 연말 파티에서 세정의 속내를 듣고 다시 그녀와 잘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그렇게 세정과 좀 더 가까워질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차에 어젯밤 뜻밖에도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된 것이었다.
진혁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미리 구상해놨던 대로 판을 크게 벌였다.
세정을 얻는 것을 물론, 도혁을 밀어내고 대산그룹의 후계자 자리에 앉는 것으로.
아버지 차정환 대표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훨씬 더 유리할 것이라는 계산까지 있었다.
보유자금이 크긴 하지만 그래 봤자 일개 사모펀드인 MF파트너스보다는, 대산그룹의 2대 주주이자 자금력이 탄탄한 서진물산과 손을 잡는 것이 훨씬 좋으리라.
대산 계열사를 하나씩 팔아치우는 번거로움 없이, 그저 도혁에게서 후계자 자리를 뺏어버리면 간단하게 해결되니까.
“세정아, 우린 나가 있을게. 잠깐 쉬고 있어.”
진혁은 세정을 향해 밝게 웃어 보이고는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는 차정환에게 말했다.
“아버지, 잠깐 밖에서 저랑 얘기 좀 하시죠.”
* * *
같은 날 아침.
도혁은 재인을 도와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서재인 씨, 이거 뒤집으면 되는 건가?”
“아, 아직이요!”
재인이 말리기도 전에 도혁이 부침개를 뒤집었다.
덕분에 동그랗고 예뻤던 모양이 찢어지고 뭉개져 버렸다.
“아, 미안.”
“……그럴 수도 있죠.”
잘생겨서 봐드립니다.
어쩜 난처해하는 표정까지도 예술인지.
재인은 주방을 환하게 밝혀주는 도혁의 미모에 잠시 넋이 나갔다.
며칠 전 연지가 다녀간 이후, 도혁은 어설프게나마 뭔가를 더 적극적으로 하려는 듯 주방을 서성였다.
“가지볶음은 내가 뒤적거릴 테니 서재인 씨는 다른 거 해.”
“팀장님, 저번처럼 태우시면 안 돼요!”
“걱정 마. 날 믿어.”
그 말에 한두 번 속아야지.
재인은 불안함을 뒤로 하고 도혁에게 가지볶음을 넘겼다.
“서재인 씨, 우리 오늘 오랜만에 데이트나 할까?”
갑자기 도혁이 재인의 귓가에 속삭였다.
“좋긴 한데, 할아버님이 괜찮으실지……?”
“아…… 우리 몰래 도망갈까?”
농담이 1도 섞이지 않은 도혁의 순도 100퍼센트 진심이었다.
재인은 도혁의 옆구리를 찌르며 핀잔을 줬다.
“주말인데 어떻게 혼자 계시게 해요. 그리고 할아버님 마음 돌리려면 더더욱 같이 시간을 보내야죠.”
“……알았어.”
“다 같이 바람이나 쐬러 갈까요? 맛있는 것도 먹고.”
“어디로?”
“음……. 등산은 할아버님 심장에 무리가 가서 안 될 것 같고, 날이 추우니까 밖에 오래 계시는 것도 힘드실 테고…….”
재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땅한 장소를 생각하고 있는데, 차 회장이 불쑥 앞에 나타났다.
“저기, 내가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는데 말이지.”
재인은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물러섰다.
“아우, 깜짝이야! 할아버님, 언제부터 듣고 계셨어요?”
“도혁이 놈이 몰래 도망가자고 하는 부분부터.”
흠흠.
도혁은 괜한 헛기침을 하며 차 회장의 따가운 시선을 피했다.
이그.
재인은 도혁에게 살짝 눈을 흘기고는 차 회장에게 물었다.
“그게 어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