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기다려, 자지 말고 (2) (99/129)


98화. 기다려, 자지 말고 (2)
2023.05.09.



 


‘어떻게 자기랑 결혼할 남자가 다른 여자와 동거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저렇게 태연하게 할 수가 있지?’

재인은 전혀 동요하지 않는 것 같은 세정의 반응에 당황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서재인 씨는 차 회장님이 그 집에 왜 들어가셨다고 생각해요?”

“그건…… 절 시험하신다고…….”

세정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순진하게 그걸 믿었어요? 당연히 도혁 씨랑 서재인 씨를 갈라놓기 위해서죠.”

“……!”

“어제 차 회장님이 저한테 간곡히 부탁하시더라고요.”

“……뭘요?”

“어떻게든 도혁 씨를 설득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요. 막상 결혼하면 도혁 씨도 잘할 거라면서.”

재인은 제 귀로 똑똑히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


“할아버님이…… 정말 그러셨다고요?”

“거짓말 같아요? 차 회장님께 지금 전화해서 확인시켜줄까요?”

순간, 재인은 차 회장이 한 달간 자신에게 기회를 준 것에만 신경 쓰고 있느라 정작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바로 혼담을 파기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는 것.


‘그럼 뒤에서는 여전히 혼담이 진행 중이었다는 거야?’

그렇다는 것은 애초에 차 회장은 재인을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얘기였다.

재인은 충격으로 할 말을 잃었다.

곧이어 제어할 새도 없이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세정은 흔들리는 재인의 눈빛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결혼은 사랑만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특히나 이쪽 세계에서는요, 집안끼리 격을 맞추는 게 중요하거든요. 이제라도 정신 차리고 차도혁 씨는 포기해요.”

“…….”

“설마 정말 도혁 씨랑 끝까지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죠? 서재인 씨는 그냥 결혼 전 일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에요.”

그건 당신 생각이고.

도혁의 마음이 진심인 것만큼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힘이 솟는 재인이었다.

재인은 두 손을 꼭 쥐고 길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세정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윤세정 씨, 차도혁 씨를 사랑해요?”

“……!”

갑작스러운 질문에 세정은 말문이 막혔다.


“다른 여자와 살고 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런 경우에는 비아냥거릴 게 아니라 가슴이 아파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건 결혼 전 일탈이니까…….”

“그렇지 않다는 건 윤세정 씨가 더 잘 알고 있잖아요. 기분 나쁜 건 알겠지만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재인이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차도혁 씨는 저를 사랑해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차 회장님이 두 사람 사이를 순순히 허락하실 것 같아요?”

“반대하셔도 상관없어요. 차도혁 씨와 제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니까요.”

주눅이 들 줄 알았는데 너무나도 당당한 재인의 태도에 세정은 바짝 약이 올랐다.


“내가 순순히 도혁 씨를 놔줄 것 같아요?”

“윤세정 씨, 왜 자신의 삶을 헛되게 낭비하려고 해요?”

“뭐라고요?”

세정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 모습이 오히려 안타깝게 느껴지는 재인이었다.

재인은 차분하게 세정을 설득했다.


“세정 씨 괜찮은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간 남자를 붙들려고 해요?”

“뭐라고요?”

“그건 집착일 뿐이에요. 세정 씨도 세정 씨만 사랑해줄 남자를 만나야죠.”

“날 좋아하는 사람 널리고 널렸어요!”

“그중에 세정 씨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나요?”

“……!”

세정이 입을 꾹 다물자 재인이 말을 이었다.


“그 세계에서는 집안끼리 맞춰 결혼한다는 게 당연할지 모르겠지만, 내 삶은 내가 결정해야 하는 거잖아요.”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요?”

“이제 그만 윤세정 씨 마음속에서 차도혁 씨를 놓아주세요. 주제 넘는 말이지만, 세정 씨도 부디 운명의 짝을 만났으면 좋겠어요. 저처럼요.”

재인은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저 먼저 일어날게요. 할아버님이 절 기다리고 계실 거라서요.”

홀로 남겨진 세정은 아랫입술을 깨문 채 총총히 사라지는 재인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 * *



“아니, 왜 이렇게 늦었어?”

재인이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차 회장이 다그치듯 말했다.

하루 종일 텅 빈 집에서 무료하게 지낸 터라 재인이 오기를 내심 기다리고 있었던 차 회장이었다.

재인은 신발을 벗지도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차 회장을 빤히 쳐다봤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세정에게서 들었던 말들이 가득 차 있었다.


‘저를 그렇게 떼어내고 싶으신 거예요?’

차 회장의 속내를 알고 난 지금, 재인은 차 회장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상태였다.

그걸 알 리 없는 차 회장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당연히 죄송하다고 할 줄 알았던 재인이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쳐다만 보고 있어서.


‘이 아가씨가 갑자기 왜 이래? 심각한 얼굴을 하고서는.’

차 회장은 일부러 더 세게 재인을 자극했다.


“아, 왜 말이 없어? 배고픈 거 안 보여? 날 굶겨서 죽일 셈이야?”

재인은 그제야 기운이 쪽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게요. 제가 할아버님을 굶겨서 죽일 셈인가 보네요.”

“뭐야?”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차려드릴게요.”

재인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차 회장은 황당한 얼굴로 생각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
.
.



“식사하세요.”

“어이구, 깜짝이야!”

저녁을 차리는 동안 소파에서 졸린 눈으로 책을 보고 있던 차 회장은 불쑥 나타난 재인 때문에 간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 인기척 좀 하고 다녀! 심장마비로 저세상 보내려고 그래?”

“그러게요. 제가 할아버님을 심장마비로 저세상 보내려고 그랬나 보네요.”

재인은 영혼 없는 말투로 툭 내뱉고는 주방으로 돌아갔다.

어깨가 축 처진 것이, 그동안 차 회장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잡초처럼 꿋꿋하게 일어섰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뭐야? 오늘따라 왜 저러는 거야?’

차 회장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식탁으로 갔다.

재인의 행동이 신경 쓰이는 것도 잠시, 언제나처럼 맛깔스럽게 차려진 음식을 보자 참을 수 없는 허기가 밀려왔다.

차 회장은 군침을 꿀꺽 삼키며 젓가락질을 서둘렀다.

하지만.

음식 맛을 본 차 회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탁, 하고 젓가락을 내려놨다.


“서재인 씨, 이게 뭐야? 간이 하나도 안 돼 있잖아!”

“그러게요. 어제 짜게 했다고 하도 뭐라고 하셔서 간을 하나도 안 했어요.”

“아니, 내가 어제는 조금 짜서 그랬던 건데 그렇다고 간을 아예 안 해버리면 어떻게 먹으라는 건가?”

“분명 오늘도 짜다고 하실 것 같아서 그랬는데요. 뭐, 어떻게든 드셔야죠.”

뜨끔.

차 회장은 정곡이 찔려 움찔했다.

오늘도 트집을 잡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터라, 양심에 찔려 오히려 더 큰소리를 쳤다.


“이 아가씨가! 내가 어제 뭐라고 좀 했다고 지금 일부러 엿 먹이려는 거야?”

“그러게요. 제가 할아버님을 일부러 엿 먹이려고 그랬나 보네요.”

차 회장은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혔다.


‘뭐지, 이 남 일처럼 말하는 화법은? 굉장히 공손한 말투로 뒤통수를 치네?’

차 회장은 제 말을 고대로 되돌려 주는 재인 때문에 다음 말을 꺼내기가 무서워졌다.

재인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간이 하나도 안 된 음식을 무심히 먹고 있었다.


‘뭘 잘못 먹은 사람처럼 넋이 나간 게 아무래도 이상해.’

이쯤 되니 차 회장은 재인이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차 회장은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서재인 씨, 혹시 오늘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

“뭔지 한번 얘기나 해봐. 내가 해결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할아버님.”

재인은 고개를 들어 차 회장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고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어, 그래. 무슨 일인지 말해봐.”

“……아니에요.”

재인은 다시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을 닫았다.

그 모습이 몹시도 신경이 쓰이는 차 회장이었다.


‘내가 요즘 너무 심했나?’

차 회장은 미안한 마음이 들어 곁눈질로 재인의 안색을 살폈다.

진짜로 그 원인이, 자신이 세정에게 한 말 때문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재인은 차 회장이 뭘 해도 트집 잡을 것을 알기에 이젠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다.

조금 전 차 회장이 무슨 일인지 말해 보라고 했을 때, 하마터면 세정과 만났던 일을 얘기할 뻔했다.

하지만 얘기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이미 세정과 결혼시키기 위해 도혁을 설득하고 재인을 내쫓으려고 작정한 차 회장이다.

차 회장이 한 달이라는 기회를 준 것은 자신이 직접 도혁의 인생에서 재인을 제거하기 위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함이리라.

지금 섣불리 세정의 일을 꺼냈다가는 관계가 더 껄끄러워질 것 같았다.

그러다 차 회장이 다 알게 됐으니 아예 대놓고 나가라고 한다면?

도혁과 함께할 수 있는 남은 시간마저 빼앗기게 될지도 모른다.

재인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명쾌한 해답을 찾지 못해 머리만 아프던 그때.

때마침 도혁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저,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요.”

재인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차 회장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미끄러지듯 제 방으로 들어가 전화를 받았다.


“팀장님!”

―서재인 씨, 저녁은 잘 먹었어?

언제 들어도 감미로운 중저음.

재인은 도혁의 목소리를 들으니 세정 때문에 생긴 불쾌한 기분이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지금 먹고 있었어요. 팀장님은 언제 오세요?”

―미안해. 오늘도 늦겠는데.

“또요?”

―방금 김 실장님 만났는데 처리해야 할 일이 생각보다 많아서 저녁 먹으면서 얘기하려고. 미안.

“……네. 알았어요.”

재인은 갑자기 기운이 쭉 빠졌다.


―서재인 씨, 오늘따라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닌 것 같은데…….

도혁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나 있었다.


‘팀장님한테는 윤세정 씨 만난 일을 얘기해야겠지?’

하지만 막상 이야기를 꺼내려니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도혁이 알게 되면 분명 차 회장님과 한바탕 난리가 날 게 뻔하니까.

겉으로는 퉁명스러워 보여도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도혁이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재인은 자신 때문에 혹시라도 둘 사이가 틀어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가족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재인이기에.

재인이 말이 없자 갑자기 도혁의 목소리가 조급해졌다.


―혹시, 할아버지가 또 힘들게 한 거야? 안 되겠다. 내가 가서…….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고 일 보고 오세요.”

―정말이야?

“그럼요.”

재인은 애써 밝게 대답했다.


 


―알았어. 참, 나 오늘 많이 늦을 것 같으니까 기다려, 자지 말고.

“왜요?”

―보고 싶으니까.

역시 차도혁답네.

재인은 문득, 도혁의 집에 처음 왔던 날이 기억났다.

그때도 도혁은 전화로 재인에게 자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었다.


「잘 도착했나?」

「네.」

「나 오늘 많이 늦을 거야.」

「네.」

「기다려, 자지 말고.」

「네?」

그때나 지금이나 묻고 싶은 말이 하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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