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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그렇게 쳐다보는 거 금지! (98/129)


97화. 그렇게 쳐다보는 거 금지!
2023.05.06.


키스?

진혁의 말에 세정의 눈빛이 싸늘하게 돌변했다.

어디서 개수작을.

세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헛소리할 거면 이만 갈래.”

“알았어, 알았어. 그냥 한번 해본 말인데 쌀쌀맞긴.”

진혁은 세정을 붙잡아 도로 자리에 앉히고는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뒤로 좀 알아봤거든? 세정이 네 말대로 도혁이 형 여자 있는 거 맞더라.”

세정은 예상했던 결과를 직접 확인하자 속이 쓰렸다.


“역시 그랬구나. 같은 회사에 다니는 직원이지?”

“맞아. 같은 부서에 있는 서재인 주임이라더군.”

“그래?”

고작 그런 여자한테 홀랑 넘어가서 나를 퇴짜 놔?

세정은 터지려는 분노를 참느라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그러고는 애써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차도혁도 시시하네. 사내 연애에 빠져서 물불을 못 가리다니.”

“꽤 깊은 관계던데? 같이 동거한 지 한 달도 넘었대.”

“동거를 한다고?”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는데.

다른 여자랑 만나는 것도 모자라 버젓이 한집에 살고 있다니.

도혁과 그 여자의 관계가 가볍게 스치는 바람이 아님이 확실해진 지금, 세정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혹시 차 회장님께는 말씀드렸어?”

“할아버지야 이미 알고 계시지. 무슨 생각이신지 며칠 전부터는 아예 도혁이 형 집에 들어가서 같이 살고 계셔, 셋이 한집에서.”

“뭐라고?”

세정은 뒤통수에 번개를 후려 맞은 기분이었다.

낮에 만날 때만 해도 도혁을 설득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녀를 안심시켰던 차 회장이었는데.

그런 차 회장이 그 여자의 존재를 아는 것도 모자라 아예 같이 살고 있다고?

세정은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에 주먹 쥔 양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의 반응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진혁이 넌지시 말했다.


“그 여자 연락처, 궁금하지 않아?”

진혁은 반으로 접은 작은 쪽지를 슬그머니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세정이 쪽지를 집으려 하자 진혁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낚아채 손등에 입을 맞췄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글쎄.”

“장난치지 마.”

세정이 정색하는데도 진혁은 놀리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싫은데. 이거야말로 키스 한 번…….”

진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정이 그의 입술을 덮어버렸다.

세정은 차도혁에게 무시당한 분풀이라도 하듯 진혁의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인상을 찌푸린 진혁은 이내 세정을 와락 끌어안고 그대로 소파로 엎어졌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된 두 사람은 거침없는 손길로 서로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익숙한 무게감.

낯설지 않은 향기.

녹아들어 갈 것 같은 감각.

1년이 넘게 흘렀는데도 지난날의 뜨거웠던 순간을 두 사람의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분노와 욕망이 뒤섞인 거친 몸짓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폭주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마저.

진혁의 목을 감고 있는 세정의 손에는 꾸깃꾸깃 구겨진 하얀 쪽지가 꼭 쥐어져 있었다.

* * *

다음 날인 금요일 아침.

재인은 출근하자마자 커피를 내리러 휴게실에 들렀다.

그녀의 얼굴에는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와 있었다.

차 회장과 지낸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1년은 시달린 기분이었다.


‘그동안 좀 풀리신 것 같더니 어제부터 왜 더 심해지신 거지?’

몇 번을 생각해봐도 이유를 모르겠어서 답답했다.


‘내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시나?’

역시 조건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재인은 씁쓸해졌다.

그것만큼은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어차피 결론은 패배로 정해져 있는 게임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건 아닐지.

덜컥 불안이 밀려왔다.


“서재인 씨,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

언제 왔는지 휴게실 입구에 도혁이 서 있었다.


“아, 팀장님. 아무것도 아니에요.”

“할아버지 때문에 힘들지? 미안해.”

“아니에요. 팀장님 할아버지시니까, 더 잘해드리고 싶은걸요.”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마워.”

부드럽게 미소 짓는 도혁을 보자 재인은 피로가 단번에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래, 무려 차도혁이잖아! 아무리 맨땅에 헤딩일지라도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지.’

어쩜 이 얼굴은 봐도 봐도 매일매일 더 잘생겨지는 건지.


 
재인은 하트가 가득한 눈으로 물끄러미 도혁을 올려다봤다.

그러자 도혁이 입술을 꾹 감쳐물며 미간을 좁혔다.


“팀장님, 왜 그러세요?”

“서재인 씨…… 그렇게 쳐다보는 거 금지!”

“왜요?”

“하마터면 못 참고 키스할 뻔했단 말이야.”

“네에?”

재인은 심장이 철렁했다.

도혁이 이마를 짚은 채 중얼거렸다.


“아아, 진짜 위험했어.”

재인은 혹시 누가 들었을까 걱정돼 목을 빼고 휴게실 밖을 확인했다.

다행히 복도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눈에 띄지 않았다.


“팀장님, 그런 말을 하시면 어떡해요.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뭐, 어때? 둘이 사귀나 보다, 하겠지.”

팔순 잔치에서 나희와 마주쳤을 때 이미 마음의 준비가 끝난 도혁이었다.

나희가 잠자코 있어서 오히려 김이 샌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까.

내가 못 살아!

재인은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회사에서 이러시면 곤란해요. 공과 사 구분은 철저히 부탁드립니다, 팀장님.”

“나도 곤란하다고. 요즘은 회사가 집보다 더 나은 것 같아.”

촉촉한 눈으로 재인을 바라보던 도혁은 갑자기 그녀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러고는 작고 가녀린 손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서재인 씨는…… 정말 괜찮은 거야?”

“괜찮아요. 회장님 마음도 이해하니까 버틸 만해요.”

“아니, 그거 말고…….”

“그럼 뭐요?”

재인이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도혁이 그녀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내가 그립진 않아? 밤에.”

꺄악!

재인은 순식간에 귀까지 새빨개졌다.

누가 우리 팀장님 좀 말려주세요.

도혁이 이글이글 타는 눈빛으로 덧붙였다.


“난 매일 밤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단 말이야.”

“저, 전 잘만 자는데요.”

“정말?”

“네. 머리만 대면 자요.”

진짜였다.

차도혁이 전혀 그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차 회장한테 하도 시달린 탓에 매일 밤 기절하듯 잠든 재인이었다.


“……그랬구나. 하긴. 방문도 꼭 잠그고 잘 자더라.”

응?

재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설마 밤에 열어보셨어요?”

“어. 할아버지 오신 첫날 서재인 씨 방문 앞까지 갔다가 할아버지한테 걸려서 실패했어.”

아우, 창피해!

차 회장에게 들켰다는 말에 재인은 몸 둘 바를 모를 만큼 부끄러워졌다.

유라가 밤에 방문 잘 잠그라고 한 게 신의 한 수였네.


“팀장님, 회장님도 계신데 왜 그러셨어요! 회장님이 뭐라고 생각하셨겠어요.”

“그냥 잠깐 얼굴만 보려는 거였다고 했어.”

“회장님이 퍽이나 아, 그랬구나, 하고 믿으셨겠네요.”

“그야, 뭐…….”

도혁의 목소리가 푹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재인에게 꽂힌 눈빛은 여전히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러다 누가 오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일단 도망가자.’

재인은 도혁을 지나쳐 잽싸게 입구 쪽으로 빠져나갔다.


“암튼 팀장님, 이제 그러지 마세요.”

“서재인 씨, 잠깐만…….”

“그럼 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가차 없이 돌아선 재인에게 도혁이 시무룩한 투로 말했다.


“좀 섭섭하네. 난 늘 서재인 씨 생각뿐인데…….”

두근.

순간 재인의 잔잔한 가슴에 거센 파도가 일렁였다.

아아, 정말이지!

재인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휙 돌아섰다.


“팀장님.”

“응?”

도혁의 눈동자가 반짝, 하고 빛났다.

재인은 그에게 다가가 옷깃을 붙들고는 들릴 듯 말듯 속삭였다.


“앞으로는 밤에…… 방문 안 잠글게요.”

“……!”

도혁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재주껏 삼엄한 감시를 피해 열어보세요.

재인은 무언의 메시지를 담아 생긋 웃어 보였다.

* * *

퇴근 시간.

오늘도 재인은 차 회장의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걸음을 서둘렀다.

막 회사를 나선 그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누구지?

재인은 무심결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서재인 씨 맞죠?

휴대전화에서 생소한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제가 서재인인데,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저 윤세정이에요.

“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만났던 그 윤세정?

재인은 흠칫 놀라 휴대전화를 떨어뜨릴 뻔했다.


―우리 만난 적 있는데, 기억해요?

“……네.”

―잘됐네요. 제가 왜 전화했는지는 잘 알고 있을 테고, 지금 좀 만날까요?

“네? 지금은 좀 곤란한데요.”

―잠깐이면 돼요. 바로 눈앞에 있으니까.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재인의 앞에 세정이 미소를 지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서재인 씨, 반가워요?”

 

* * *

잠시 후, 두 사람은 근처에 있는 조용한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말없이 재인을 쳐다만 보던 세정은 주문한 차가 나오자 그제야 말문을 열었다.


“서재인 씨, 제가 왜 보자고 했는지는 짐작하고 있죠?”

“네.”

차도혁과 사귄다는 걸 듣고 왔겠지.

재인은 차 회장이 집으로 들이닥쳤을 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봄에 후계자 승계가 마무리되면 바로 식을 올릴 거야. 서진물산 윤세정 양이라고, 도혁이에게 딱 어울리는 아가씨지.」

도혁의 흔들림 없는 애정 공세와 자신을 믿으라는 말에 그 중요한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재인은 도혁과 혼담이 오간 세정과 마주 보고 앉아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껄끄러웠다.

비록 도혁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집안 어른들끼리 밀어붙이는 것이긴 하지만, 왠지 훼방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윤세정 씨, 제 연락처는 어떻게 아셨어요? 뒷조사를 한 건가요?”

“누가 알려주더라고요. 도혁 씨가 뒤에서 딴짓을 하고 있다면서.”

세정의 입가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차도혁 씨랑 저, 곧 결혼할 거라는 거 알고 있죠?”

다른 여자의 입에서 도혁과 결혼한다는 얘기가 나오자, 재인은 일순 머리가 멍해졌다.

마치 진짜 청첩장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 차려! 팀장님이 무슨 일이 있어도 할아버지 허락을 받아낼 테니 기다려달라고 했잖아.’

게다가 차 회장도 재인에게 한 달 동안 자신을 설득할 기회를 주지 않았는가.

재인은 정신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듣긴…… 했어요.”

“알고 있었으면서 도혁 씨를 만나는 거예요? 서재인 씨, 참 뻔뻔한 사람이네요.”

“그건 확정된 게 아니잖아요. 차도혁 씨 의사와 상관없이 진행된 일이고요.”

“그래서, 떳떳하게 만나도 된다고 생각했다?”

“네. 서로 사랑하니까요.”

세정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사랑? 하, 기가 막혀서. 서재인 씨, 도혁 씨 집안이 어떤 집안인 줄은 알아요?”

“알고 있어요. 차도혁 씨가 대산그룹 후계자라는 것도.”

“그걸 알고도 감히 넘볼 수 있는 상대라고 생각했단 말이에요? 뻔뻔스러운 것도 정도가 있지!”

“이봐요, 윤세정 씨!”

재인이 울컥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정이 조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 어제 차 회장님 만났어요.”

“할아버님을요?”

재인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할아버님’이라는 말이 나오자 세정은 순간 속이 뒤집혔다.


‘난 아직도 차 회장님이라고 부르는데, 너 따위가 친한 척 할아버님이라고 불러?’

재인은 재인대로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제 회장님이 심하게 구신 거였구나.’

이제야 비로소 차 회장의 태도가 왜 돌변했는지 아귀가 딱 맞아떨어졌다.

재인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세정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지금 두 사람 같이 사는 것도 알고 있어요. 차 회장님까지 셋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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