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키스해주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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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키스해주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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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키스해주면 안 돼?
2023.05.02.
[차진혁]
하필이면 지금!
세정은 황급히 전화를 끊고 휴대전화 화면을 아래로 엎어놨다.
혹시라도 차 회장이 진혁의 이름을 봤을까 봐 간이 철렁했다.
“끊지 않아도 되는데. 세정 양, 난 괜찮으니 편히 통화해요.”
“아니에요! 안 받아도 되는 전화였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세정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차 회장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서 받아봐요. 난 신경 쓰지 말고.”
“괜찮아요, 회장님.”
“그럼 내가 더 신경 쓰여요. 나야말로 괜찮으니 편히 받아요.”
더는 거절하기 힘든 상황.
세정은 어쩔 수 없이 휴대전화를 들었다.
“여보세요.”
―윤세정, 생각보다 빨리 받았네? 받을 때까지 전화할 생각이었는데.
“지금 밖이어서요.”
―잘 지냈어? 오빠 보고 싶진 않았고?
질척거리기는.
세정은 차 회장이 눈치챌까 봐 애써 나긋나긋하게 물었다.
“그런데 무슨 용건이세요?”
세정의 딱딱한 반응에 진혁이 코웃음을 쳤다.
―말투가 왜 그래? 누구랑 같이 있어?
“네.”
―누구길래 그렇게 바짝 얼어 있어? 대낮부터 숨겨둔 애인과 밀회라도 즐기는 중인가?
진혁의 시답잖은 농담에 세정은 짜증이 솟구쳤다.
“죄송하지만 지금 식사 중이라 전화 받기가 곤란해요.”
―농담이야. 화났어?
“네.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세정이 전화를 끊으려 하자 진혁이 다급히 붙잡았다.
―세정아, 끊지 마! 충격적인 일이 있어.
“이만 끊을게요.”
―도혁이 형에 대한 얘기야.
세정은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다 멈칫했다.
“그게…… 뭔데요?”
―예쁜 얼굴도 보고 싶으니 만나서 얘기해. 오늘 밤에 지난번 만났던 바에서 술 한잔하면서, 어때?
“알았어요.”
―8시에 봐. 올 때까지 기다릴 거니까 꼭 와야 해.
“네. 그럼 이만.”
도혁에 관한 얘기라는 말에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덥석 미끼를 물고 만 세정이었다.
차 회장이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세정 양, 괜히 나 때문에 일찍 끊은 거 아니에요? 난 괜찮은데, 허허.”
“아니에요. 옷을 맞췄는데 문제가 있다고 다시 들러달라고 해서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럼 다행이고. 음식이 다 맛있네. 세정 양도 어서 들어요.”
“네.”
다행히 차 회장이 이상한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세정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진혁의 말을 곱씹었다.
‘충격적인 일? 차진혁, 뭔가 알아낸 거야?’
분명 고속도로 휴게소와 병원에서 도혁과 같이 있었던 그 여자에 관련된 일일 거라는 직감이 왔다.
세정은 갑자기 입안에 든 음식이 쓰디쓰게 느껴져 뱉고 싶어졌다.
* * *
그날 저녁, 도혁의 집이 왁자지껄 소란스러웠다.
여느 때보다 일찍 퇴근한 도혁의 등 뒤에서 연지가 짜잔, 하고 튀어나온 것이었다.
“연지 씨?”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던 재인은 갑작스러운 연지의 등장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혁이 눈썹을 끌어 올리며 말했다.
“갑자기 따라오겠다고 난리를 쳐서.”
“오빠는, 좋으면서 괜히 그래.”
연지는 도혁에게 눈을 흘기고는 두 손 가득 들고 온 후식을 재인에게 건넸다.
“재인 언니, 언니를 위해 특별히 준비했어요.”
“어머, 맛있겠다!”
연지가 재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언니 힘든 것 같아서 지원 나왔어요. 전 언니 편이니까요, 힘내세요!”
“연지 씨, 와줘서 고마워.”
재인은 진심을 담아 연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는 연지가 구세주처럼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퇴근하고부터 지금까지 계속 차 회장에게 시달리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오늘 차 회장은 무엇 때문인지 내내 날이 잔뜩 서 있었다. 재인이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있는 대로 심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불 빨래를 하라면서 사계절 이불을 산더미처럼 내놓지 않나, 집 안 곳곳을 다니면서 지나다니는 곳마다 엉망진창 흔적을 남기지 않나, 심지어 요리할 때는 옆에 바짝 붙어 지켜보면서 잔소리를 늘어놓기까지…….
차 회장은 재인에게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아주 피를 말리기로 작정을 한 사람처럼 굴었다.
게다가 그동안 고스톱을 가르쳐주겠다고 차 회장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낼 때는 언제고, 오늘은 재인이 이따 또 하실 거냐고 묻자 기다렸다는 듯이 버럭 무안을 줬다.
「아가씨 눈에는 내가 한가하게 그딴 거나 할 사람으로 보여? 그리고 내가 아가씨 친구야? 어디 버르장머리 없이!」
요 며칠 고스톱으로 차 회장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어졌나 싶었는데 말짱 도루묵이 된 순간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된통 당한 재인은 억울함을 느낄 새도 없이 정신없이 굴림을 당했다.
그렇게 목이 빠져라, 도혁만 기다리고 있던 차에 연지까지 나타나 한시름 놓게 된 것이었다.
“아니, 연지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뜻밖의 손님에 놀란 건 차 회장도 마찬가지였다.
연지는 잽싸게 차 회장에게 달려가 팔짱을 꼈다.
“할아버지이이이! 저 보고 싶으셨죠?”
“우리 공주님이야 매일같이 보고 싶지.”
“그래서, 할아버지가 오빠 집에 계신다는 소식 듣고 냉큼 찾아왔어요.”
“그랬구나. 잘 왔다, 잘 왔어.”
차 회장의 얼굴에 금세 함박웃음이 피었다.
유일한 손녀인 연지에게 한없이 약한 차 회장이었다.
“재인 언니, 제가 뭐 할 일 없어요?”
연지는 팔을 걷어붙이고 서툰 손놀림이지만 싹싹하게 재인이 요리하는 것을 도왔다.
그사이 옷을 갈아입고 나온 도혁도 슬그머니 주방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재인은 차 회장을 흘낏거리며 도혁에게 나가라는 눈짓을 했다.
“그래도…….”
도혁은 미간을 좁혔다.
사실 차 회장이 쳐들어오기 전까지는 나름대로 재인을 거들어왔던 도혁이었다.
흠뻑 젖은 행주로 상을 닦는다든가, 음식을 뒤집다 떨어뜨린다든가.
결국 재인이 두 번 손 가게 만드는 일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재인은 손 하나 까딱 않고 살아왔던 도혁이 도와주려고 하는 마음이 고마워서 매번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차 회장이 눈치를 줘서 결국 재인은 도혁에게 ‘주방 접근금지’를 선언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오기가 생겨서라도 혼자 힘으로 차 회장을 감당해내리라 다짐한 재인이었다.
그 내막을 알 리 없는 연지는 도혁을 반기며 말했다.
“오빠, 숟가락 젓가락 좀 놔줄래? 밥도 뜨고.”
“흐흠. 흠.”
차 회장이 못마땅한 듯 헛기침을 했다.
“괜찮아, 연지 씨. 내가 할게.”
연지는 말리는 재인에게 생긋 웃어 보이고는 차 회장에게 말했다.
“할아버지, 목이 안 좋으세요? 목감기는 아니죠?”
“목감기는 무슨. 도혁아, 잠깐 이리 와서 앉아봐라.”
마지못해 거실로 가려고 하는 도혁을 연지가 붙들었다.
“할아버지 많이 배고프시겠다. 오빠 뭐 해? 숟가락이랑 젓가락 놓고, 밥도 좀 뜨라니까.”
“어어. 알았어.”
차 회장은 도혁이 오지는 않고 순순히 밥까지 뜨자 못마땅한 듯 중얼거렸다.
“쯧쯧. 얼빠진 놈 같으니라고.”
“정말 괜찮은데…….”
차 회장의 눈치를 보는 재인에게 연지가 작게 말했다.
“언니, 할아버지가 옛날 분이니 이해해주세요. 맞추다 보면 끝이 없으니까 앞으로는 적당히 무시하고 오빠한테 일 팍팍 시키시고요.”
“으응.”
연지 덕분에 마음이 한결 든든하고 편안해진 재인이었다.
잠시 후, 정갈한 상이 차려지고 네 사람은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았다.
메인인 갈치조림 맛을 본 차 회장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재인이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입맛에 맞지 않으세요?”
“아니, 나보고 이걸 먹으라고 한 건가? 왜 이리 짜?”
“어머, 짜지 않게 한다고 했는데…….”
아예 간을 안 했어도 짜다고 뒤엎기로 마음먹은 차 회장이었다.
차 회장은 다른 음식들도 한입씩 맛보고는 투덜거렸다.
“된장찌개도 짜고, 전도 짜고, 무침도 짜고, 대체 뭘 먹으라는 건지.”
“그러세요? 죄송해요.”
차 회장의 생트집을 듣다못해 도혁이 끼어들었다.
“할아버지, 또 왜 그러세요? 간 딱 적당한데.”
“네 녀석은 나한테 전혀 관심이 없지? 나 심장이 안 좋아서 짜게 먹으면 안 되는 거 몰라?”
“할아버지, 그래도…….”
그때, 연지가 박수를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할아버지, 이제 짜게 드시지 않기로 결심하셨어요? 새해 첫날 가족 식사 때 김 여사님이 걱정하던데 잘하셨어요!”
김 여사는 10년 넘게 차 회장의 집에서 요리를 도맡아 하는 일류 쉐프였다.
비록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였지만, 차 회장에게 허물없이 매일 잔소리를 해대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했다.
순간 재인과 눈이 마주친 차 회장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누, 누가 짜게 먹었다고 그래?”
“뭘요, 김 여사님이 저한테 할아버지가 지병도 있는데 자꾸 맵고 짠 자극적인 음식만 찾으셔서 큰일이라고 하셨는데.”
“…….”
연지의 팩트 공격에 차 회장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낮에 세정을 만난 뒤, 재인을 내쫓기 위해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은 차 회장이었다.
그런 마당에 ‘이연지’라는 뜻밖의 난관에 봉착한 것이었으니.
연지는 활짝 웃으며 차 회장에게 연타를 날렸다.
“할아버지, 근데 집에는 언제 가실 거예요? 재인 언니가 너무 불편하잖아요.”
“왜? 이 아가씨가 너한테 불평하든? 날 쫓아내 달라고 부탁이라도 한 거야?”
차 회장이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자 재인이 펄쩍 뛰었다.
“아, 아니에요, 할아버님! 연지 씨, 난 괜찮아.”
“할아버지, 요새 누가 재인 언니처럼 정성껏 밥을 해 드리고 수발을 들어요? 저 같으면 벌써 도망갔어요.”
도망가라고 이러고 있는 건데 잘됐네.
차 회장이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던 찰나, 연지의 진지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재인 언니 도망가면 저, 할아버지 원망할 거예요.”
“뭐야?”
“전 재인 언니 진짜 좋아한단 말이에요. 그리고 오빠한테 딱 맞는 사람은 재인 언니밖에 없어요.”
“연지 씨…….”
연지의 진심 어린 말에 재인은 가슴이 뭉클했다.
잘했어, 이연지!
도혁은 연지에게 넌지시 칭찬의 눈빛을 보냈다.
어린애 같기만 했던 귀여운 막내 손녀가 재인을 두둔하며 대차게 경고를 날리자 차 회장은 기가 막혔다.
김 실장이고, 연지고, 왜 다들 서재인 편만 드는 거지?
“연지 네가 뭘 알아? 암튼 그 얘긴 더 듣기 싫다.”
“할아버지, 서운하셨어요?”
연지는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 차 회장의 어깨를 주물렀다.
“됐다. 원망할 거라니, 그게 할애비한테 할 소리냐?”
“말이 그렇다는 거죠. 죄송해요. 제가 세상에서 할아버지 제일 사랑하는 거 아시면서.”
“됐어! 몰라!”
퉁퉁거리면서도 차 회장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안 되겠다. 우리 할아버지 기분 좀 풀어드려야겠네.”
연지가 방긋 웃으며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할아버지, 저녁 먹고 나서 오랜만에 고스톱 한판 어때요?”
풉.
재인은 하마터면 식탁에 밥풀을 시원하게 뿜을 뻔했다.
연지 씨도 회장님과 고스톱을?
재인이 티 나게 동요하자, 차 회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도혁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할아버지랑 연지가 고스톱을 쳤다고?”
“응. 나 대학교 때 할아버지 서재에서 자주 같이 쳤었는데? 할아버지 고스톱 엄청 좋아하시잖아.”
“그랬었구나…….”
도혁은 뜻밖의 사실에 놀라 말끝을 흐렸다.
서재에서 책만 보시는 줄 알았더니.
입을 꾹 다문 차 회장의 얼굴에는 짙은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었다.
이윽고 차 회장이 힘없이 말했다.
“연지 너, 집에 언제 갈 거냐?”
* * *
그즈음, 진혁은 지난번 연말 파티가 열렸었던 호텔 스카이라운지의 고급 다이닝바에서 세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8시가 되자, 딱 맞춰 세정이 바 안으로 들어왔다.
진혁이 손을 들어 반겼다.
“윤세정, 보고 싶었어.”
“누가 볼지도 모르니까 룸으로 들어가.”
세정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새 더 예뻐진 것 같은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어서 들어가, 빨리.”
“알았어, 알았어.”
진혁은 능글맞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룸에 들어가자마자 세정이 물었다.
“차도혁과 관련된 충격적인 일이란 게 뭐야?”
“성미 급하긴. 일단 여기 앉아봐.”
소파에 드러눕듯 기대어 앉은 진혁이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세정은 마지못해 옆에 가서 앉았다.
“뭔데? 빨리 말해줘.”
“싫은데? 그냥 말해주긴 내가 너무 아쉬워서 말이지.”
진혁이 세정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끈적한 목소리로 말했다.
“키스해주면 안 돼? 예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