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따라와,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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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따라와, 지금 당장!
2023.04.29.
“무, 무슨 마무리?”
재인이 조곤조곤 상황을 정리했다.
“제가 마지막 패로 고도리까지 해서 총 9점으로 났는데, 멍따를 했으니까 두 배인 18점이잖아요.”
“…….”
“회장님, 설마…… 그냥 가시려던 건 아니죠?”
딱 걸렸네.
그냥 좀 넘어가 볼까, 했더니.
차 회장은 정곡을 제대로 찔려 식은땀이 다 났다.
“다, 당연히 아니지. 날 뭘로 보고?”
“저도 아닐 줄 알았어요. 승부의 세계는 냉혹하다고 가르쳐주신 회장님이 그러실 리가 있나요, 그죠?”
재인은 생긋 웃으며 조금 전 차 회장이 했던 말을 다시 되돌려 주었다.
게임 종료.
“어머, 벌써 팀장님 오실 때가 다 됐네요?”
막판에 짜릿한 역전승을 거둬 신이 났는지 재인이 콧노래를 부르며 뒷정리를 시작했다.
차 회장은 재인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생각했다.
‘이 아가씨, 대체 뭐지?’
평소에는 주눅 들어 있는 것 같은데 결정적일 때는 할 말 다 해,
예의 바른 것 같으면서도 맹랑해,
근데 그게 또 기분 나쁘기는커녕 묘하게 흥미로워.
‘아무튼 보통내기는 아니야. 도혁이가 이런 데 넘어간 건가?’
확실히 재인의 앞에서는 나사가 두어 개쯤 빠져 보이는 도혁이었다.
얼빠진 녀석.
차 회장의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 있는 것을 깨닫고 흠칫 놀랐다.
‘정신 차려! 지금 서진물산이랑 혼담이 오가는 상황인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사실 차 회장도 재인이 자신을 위해 일부러 고스톱을 칠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고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심성이 따뜻한 아가씨가 틀림없기에.
얼굴도 보면 볼수록 예쁘장하고.
하지만, 백번 고쳐 생각해봐도 대산의 후계자인 도혁에게는 걸맞은 상대가 아니었다.
‘아가씨, 미안하지만 더 상처받기 전에 포기해. 자기한테 맞는 짝은 다 따로 있는 법이야.’
차 회장은 씁쓸한 표정으로 재인을 바라봤다.
* * *
다음 날, 상품기획1팀의 아침은 여느 때처럼 분주했다.
도혁이 부장실에 보고하러 가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박 과장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근데 말이야, 요새 팀장님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요?”
연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지난번에 팀장실에 보고하러 들어갔었는데 날 보자마자 활짝 웃어주더라고.”
“아아, 난 또 뭐라고. 기분이 좋으셨나 보죠.”
심드렁한 연지의 반응에 박 과장이 부연 설명을 했다.
“그뿐만이 아니야. 나한테 요즘 일하기는 괜찮냐고, 뭐 힘든 일은 없냐고 물어봤다니까?”
“팀장님이요?”
지금까지의 도혁의 캐릭터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긴 했다.
하지만 적어도, 연지와 재인은 그 이유를 묻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나희까지도 알고 있는 그 이유.
당연히 재인 때문이리라.
갑자기 박 과장이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재인에게 물었다.
“서 주임, 뭐 좀 아는 거 없어?”
“제, 제가 뭘 알겠어요.”
재인은 가슴이 철렁했다.
연지와 규민, 나희에 이어 박 과장까지 도혁과 사귀는 걸 눈치챈 건가?
박 과장이 재인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서 주임, 팀장님 혹시……”
“혹시……?”
재인은 가슴을 졸이며 박 과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불치병이라도 걸린 건가?”
“네?”
어떻게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가 있지?
재인은 입이 딱 벌어졌다.
“아니, 옛말에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다 됐다고 하잖아.”
“……그건 아닐 걸요?”
재인의 말은 듣지도 않고 박 과장이 열변을 토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적 있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시한부 선고받은 주인공이 갑자기 주변 사람들한테 잘해주고 그러는 거. 팀장님 요새 안색도 어두운 게 뭔가 이상해.”
“그건 그냥 피곤해서 그러신 거 아닐까요?”
“아니야, 뭔가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것 같아.”
그렇게 박 과장이 도혁을 불치병 환자로 몰아가고 있던 때였다.
자동문이 열리더니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은 도혁이 불쑥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부장실에서 한 소리 들었는지 잔뜩 찌푸린 얼굴이었다.
도혁은 재인을 지나치며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 주임, 보고서 관련해서 할 말 있으니까 따라 들어와요. 지금 당장!”
“네? 알겠습니다.”
이번에 재인이 올린 보고서에 실수라도 있었는지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재인은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 팀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탁.
도혁은 두툼한 보고서를 탁자 위에 던지듯 내려놓고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제 옆자리를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서 주임, 잠깐 이리 와봐요.”
“아, 네.”
재인은 황급히 옆자리에 앉아 보고서를 넘겼다.
“팀장님,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이상하다,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
재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보고서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아무리 봐도 특별히 이상한 구석이 없었다.
“팀장님, 대체 어디가 문제예요?”
대답 대신 도혁의 손이 부드럽게 재인의 목 뒤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응?
재인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도혁이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듯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팀장님……?”
다음 순간.
놀랄 틈도 주지 않고 도혁의 입술이 재인의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갑자기 휘몰아친 키스에 재인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도혁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라도 발견한 것처럼 그녀의 안을 마음껏 휘젓고 다녔다.
쉴 새 없이 밀려드는 그를 상대하느라 재인은 그 어떤 생각도 할 겨를이 없었다.
쿵쾅쿵쾅.
쿵쾅쿵쾅.
맞닿은 가슴 너머로 미친 듯이 날뛰는 심장의 고동이 느껴졌다.
그의 뜨거운 손이 자그마한 그녀의 몸을 포근히 감싸 안았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다루듯 한없이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한참 동안 이곳저곳을 배회하던 도혁의 손이 재인의 등을 받치며 천천히 뒤로 기울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몸도 기울어져 소파 위에 눕혀졌다.
아!
깜짝 놀란 그녀의 얼굴에 도혁의 뜨거운 숨결이 훅 끼쳤다.
곧이어 정신없이 키스 세례가 쏟아졌다.
재인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점점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한바탕 폭풍이 몰아친 뒤, 그제야 갈증이 풀렸는지 도혁이 입술을 떼고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굳게 닫혀 있던 재인의 눈꺼풀이 파르르 열렸다.
흐릿한 그녀의 시야에 잔뜩 상기된 도혁이 얼굴이 들어왔다.
하아. 하아.
두 사람은 잠시 서로의 눈을 응시하며 가쁜 숨을 골랐다.
이윽고 도혁이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주 큰 문제가 있긴 하지. 우리 집에.”
풋.
재인은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렇긴 하지.
어제도 차 회장의 방해 공작 때문에 매우 건전하고 플라토닉한 하루를 보낸 두 사람이었다.
재인이 나무라듯 말했다.
“팀장님, 그렇게 공사 구분을 외치시던 분이 이러시면 어떡해요?”
“그딴 거 다 필요 없어. 이러다 정말 머리 깎고 절로 들어갈 것 같단 말이야.”
재인은 머리를 빡빡 민 도혁의 모습을 상상하며 킥킥 웃었다.
그마저도 잘생겨서 가슴이 설렜지만.
“참, 보고서는 괜찮은 거예요?”
“응. 아주 잘 썼던데?”
“기가 막혀서. 그럼, 정말 이러려고 불렀단 말이에요?”
“어.”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말투였다.
내가 못 살아.
재인은 도혁의 가슴을 밀치며 몸을 일으켰다.
“팀장님, 다음엔 이러지 마세요. 이러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겠어요.”
“아닐걸? 내가 생각해도 내 연기가 아주 그럴듯했거든.”
그건 인정.
재인 자신도 깜박 속았으니까.
“아무튼 앞으로는 안 돼요!”
“미안. 그건 나도 장담을 못 하겠네.”
도혁이 씩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짓궂게 웃었다.
* * *
같은 날 점심 무렵.
차 회장은 세정과 한정식집에서 단둘이 만나고 있었다.
아침에 갑작스럽게 세정의 연락을 받고 나온 것이었다.
“회장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죠?”
“세정 양도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이렇게 보니 또 반갑네.”
차 회장은 조신하면서도 우아한 세정의 모습에 내심 감탄했다.
‘역시 도혁이 짝으로 이만한 신붓감이 없어. 도혁이 녀석만 마음을 돌리면 되는데…….’
도혁과 세정이 나란히 서 있는 장면을 떠올리자 차 회장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절로 그려졌다.
뒤이어 머릿속에 툭 튀어나온 재인의 얼굴 때문에 움찔했지만.
‘왜 쓸데없이 그 아가씨 생각을 해? 괜찮은 아가씨인 건 인정하지만 도혁이 짝으로는 절대 아니올시다야!’
집 안에서 펑퍼짐한 라운지웨어를 입고 있는 재인과 눈앞에 조신하게 앉아 있는 세정을 자연스럽게 비교할 수밖에 없는 차 회장이었다.
외모는 둘째치고, 집안이면 집안, 학벌이면 학벌, 모든 조건이 세정이 훨씬 나았다.
그런데 왜 계속 마음 한구석이 찜찜한 건지.
차 회장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 되겠어.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지.’
세정이 차를 입에 가져가며 물었다.
“회장님, 도혁 씨는 잘 지내죠?”
“그럼, 잘 있고말고. 누가 워커홀릭 아니랄까 봐 여전히 일에만 푹 빠져서 살고 있어요.”
도혁과 재인의 동거가 밖으로 새어 나가면 안 되는데.
차 회장은 세정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세정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세정 양, 미안해요. 워낙 무심한 녀석이라. 그래도 결혼하면 괜찮을 거예요.”
“회장님, 전 그러고 싶은데요. 아마 결혼은 힘들 것 같아요.”
“세정 양, 갑자기 왜 그래요?”
차 회장이 깜짝 놀라 물었다.
“실은 지난번에 식사했을 때, 도혁 씨가 저한테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분명하게 말했거든요.”
“이 녀석이! 도혁이가 무례하게 굴었군요. 미안해요, 세정 양.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건만.
순순히 들을 녀석이 아니긴 했다.
차 회장은 세정의 마음을 어떻게 다독여 줘야 할지 머리가 아팠다.
세정은 눈시울을 닦는 시늉을 하며 말을 이었다.
“혹시…… 도혁 씨에게 여자가 있는 게 아닐까요?”
“여자?”
차 회장은 간이 철렁 내려앉았다.
“회사와 집 왔다 갔다 하는 게 전부인 녀석이 무슨.”
“죄송해요. 제가 너무 걱정이 돼서 그만……. 회장님, 저 도혁 씨 조금 더 기다려도 될까요?”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잘 얘기해볼 테니.”
“감사해요. 그럼 전 회장님만 믿고 있을게요.”
세정이 눈을 내리깔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차 회장은 묘하게 피어오르는 찜찜함을 애써 무시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재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역시 도혁에게는 윤세정이 더 걸맞은 상대였다.
든든한 뒷배가 되어줄 집안이 있고,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 누구보다 이 정글과도 같은 생태를 잘 이해하고 있는 세정이니까.
대산의 지분을 두 번째로 많이 가지고 있는 서진물산이 도혁에게 등 돌리는 상황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도혁이의 안정적인 미래를 위해서라도 역시 서진물산과의 혼사는 양보할 수 없어.’
차 회장은 빨리 도혁과 재인을 갈라놓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잘 먹힌 것 같은데?’
차 회장의 안색을 살피던 세정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세정은 지난번 진혁을 만났을 때, 도혁이 여자를 만난다고 의도적으로 흘렸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무런 변화도 소식도 없어서 내내 답답했었다.
‘차진혁, 당장 달려가서 차 회장님께 얘기할 줄 알았더니 대체 뭘 한 거야?’
진혁을 이용해서 도혁의 여자를 떼어내려는 시도는 보기 좋게 실패한 것 같았다.
자칫 일이 커져서 혼사가 틀어질까 봐 한발 물러나 있었는데,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세정 본인이 직접 나선 것이었다.
귀찮게시리.
“세정 양도 시장할 텐데 어서 들어요.”
“아, 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세정은 차 회장의 말에 정신이 돌아왔다.
지이잉.
지이잉.
타이밍 좋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세정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별생각 없이 휴대전화 화면을 확인한 세정은 소스라치게 놀라 젓가락을 떨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