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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방으로 갈까? (95/129)


94화. 방으로 갈까?
2023.04.25.



 
탁자 위에 놓인 것은 바로, 선명한 색감을 자랑하는 화투였다.

조금 전, 재인이 조용히 빠져나가 편의점에서 사온 것이었다.

차 회장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아니, 이게 뭔가?”

“화투요.”

“그걸 누가 몰라서 물어?”

“전 그냥, 물어보시길래…….”

“대체 무슨 의도냐고! 지금 날 놀리는 건가? 내가 고스톱 좀 치다 걸렸다고 꼬투리라도 잡았다 싶은 거야?”

대외적으로는 늘 카리스마 넘치고 중후한 이미지로 각인된 차 회장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강하고 위협적으로 보여야만 하는 재인에게 고스톱 치는 모습을 들켜버리다니.

치부를 보인 것만 같아 찜찜하던 차에, 재인이 불편한 심기를 제대로 건드린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

“듣기 싫어. 당장 갖다 버려!”

“죄, 죄송합니다.”

당황한 재인은 화투를 집어 들고 잽싸게 휴지통이 있는 주방으로 걸어갔다.

차 회장은 제풀에 찔려 일부러 더 인상을 찌푸린 채 재인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회장님.”

재인이 휴지통에 화투를 버리려다 말고 갑자기 돌아서서 차 회장을 불렀다.


“왜?”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뭔데?”

“괜찮으시면 저…… 고스톱 좀 가르쳐주시면 안 될까요?”

“뭐?”

차 회장이 기가 막힌 얼굴로 재인을 쳐다봤다.

이 아가씨가 끝까지 날 놀리는 건가?

재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실은 제가 고스톱을 한 번도 안 쳐봤는데 친구가 엄청 재밌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참에 배워볼까 하고요.”

“그걸 왜 나한테 가르쳐달라고 해? 나도 어쩌다 한 번 쳐본 거라니까.”

“그래도 저보다는 잘 아시는 것 같아서요.”

재인이 큼지막한 눈을 깜박거렸다.

정말 고스톱을 배워보겠다는 건가?

차 회장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적어도 눈앞에 있는 젊은 처자가 자신을 우롱하는 게 아닌 건 확실해 보였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건지.

차 회장이 미간을 찌푸린 채 말이 없자, 재인이 조심스레 덧붙였다.


“가르쳐주시면…… 안 될까요?”

“…….”

“이왕 사 온 거 그냥 버리긴 아깝잖아요. 요새 쓰레기 문제도 엄청 심각해서 지구가 많이 아프다던데…….”

순간 차 회장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흠칫 놀란 재인은 황급히 수습에 나섰다.


“아, 죄송해요! 제가 또 괜한 말을……. 지금 바로 버리겠습니다.”

그때였다.

허둥지둥 돌아선 재인의 등에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날아와 꽂혔다.


“잔돈은 있나?”

“네?”

재인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차 회장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모름지기 고스톱 판에는 돈이 오가야 재밌는 법이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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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할아버지랑 별일 없었어?”

그날 밤, 도혁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슬쩍 재인에게 물었다.


“네. 그럭저럭 괜찮았어요.”

“다행이군. 할아버지가 또 심하게 군 건 아니지?”

“아니요. 식사도 잘하시고 별말 없으셨어요.”

“그래?”

그냥 넘어가실 분이 아닌데.

도혁이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자, 거실에 앉아 있는 차 회장이 퉁명스레 말했다.


“이 녀석이 왔으면 인사부터 해야지, 왜 사람을 빤히 쳐다만 보고 있어?”

“아, 다녀왔습니다.”

“오냐. 많이 늦었구나.”

“네.”

필요한 말을 하고 나니 둘 사이에는 언제나처럼 말이 뚝 끊겼다.

하아암.

차 회장이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했다.


“할아버지, 많이 피곤해 보이시네요?”

“흠흠. 오늘 따라 졸리네. 이만 들어가 보마. 너도 피곤할 텐데 어서 들어가 쉬어라.”

차 회장은 무심히 방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이게 다야?’

할아버지가 무슨 생트집을 잡으실까 신경이 곤두서 있었는데, 이렇게 싱겁게 끝나버리다니.

도혁은 얼떨떨한 얼굴로 재인에게 물었다.


“할아버지가 뭔가 달라지신 것 같은데?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

“일은 무슨 일이요.”

재인이 생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미치도록 사랑스럽긴 한데,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도혁은 이때다 싶어 재인을 와락 끌어안았다.

재인이 휘둥그런 눈으로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팀장님, 왜 이러세요!”

“뭐가 문제야? 내 여자친구 내가 좀 안겠다는데?”

도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재인의 목에 얼굴을 파묻으며 달콤한 향기를 쭈욱 들이마셨다.

하루 동안 쌓인 피로가 말끔하게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회장님 나오시면 어쩌려고요?”

“조금 전에 졸리다고 들어가셨으니 괜찮아. 회사에 있을 때부터 안고 싶어서 혼났단 말이야.”

재인은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차 회장에게 들킬까 봐 조마조마한 것보다 도혁의 품에 계속 안겨 있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그래도 불안해서 안 돼요. 빨리 놔주세요.”

“그렇게 신경 쓰이면 차라리 서재인 씨 방으로 갈까?”

도혁은 재인의 어깨를 붙잡고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이미 그의 숨소리는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져 있었다.

그냥 놔두면 이대로 정말 재인의 방으로 쳐들어갈 기세였다.


“아우, 팀장님! 시도 때도 없이 정말 이러실 거예요?”

“당연하지.”

기회가 왔을 때 미리미리 해둬야 하니까.

도혁은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있는 힘껏 재인을 끌어안았다.

재인은 도혁의 품 안에서 버둥거리며 말했다.


“안 돼요! 그러다 들키기라도 하면…….”

돌연 도혁의 등 뒤에서 날아온 서늘한 목소리에 재인의 목소리가 묻혀버렸다.


“민망하겠지, 뭐.”

두 사람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차 회장이 팔짱을 낀 채 실눈을 뜨고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꺄아악!”

순간 괴력이 솟구친 재인은 도혁을 밀치고 방으로 뛰어들어 갔다.

그 바람에 도혁은 벽에 등을 세게 부딪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쯧.

할 일을 다한 차 회장은 짧게 혀를 차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뜨거운 열기를 식힐 길 없는 도혁만 덩그러니 남겨두고.


 


‘이러다 정말 미쳐버릴지도 몰라. 그냥 확 집을 나가버릴까?’

중학생 때 할아버지와 사사건건 부딪치다 홧김에 가출했을 때 이후.

실로 오랜만에 그때와 같은 반항심이 불쑥 솟아오른 도혁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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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우우우! 창피해!’

재인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도리질을 쳤다.

아침에 회사에서 연지에게 키스하다 들킨 것만으로도 이미 치사량의 창피함을 맛본 재인이었다.

앞으로가 더 걱정이었다.

제어장치가 고장 나버린 차도혁.

그리고 눈에 불을 켜고 막으려는 차 회장.

두 사람 사이에 끼인 서재인.

그 사이에서 잘 대처하기는커녕 창피한 일들만 줄줄이 이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왔다.


‘그나저나 회장님은 내가 그렇게까지 못마땅하신 건가……?’

차 회장의 허락을 받아내는 것이 아직은 까마득하게 먼일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오늘 고스톱 덕분에 조금은 물꼬를 튼 것 같아 다행이었다.

재인은 사뭇 진지하게 고스톱에 임하던 차 회장을 떠올렸다.

짝, 짝, 화투장을 내리칠 때마다 차 회장의 표정도 점점 티 나게 밝아졌었더랬다.


‘일부러 모른 척한 보람이 있었어.’

사실 재인은 엄마 아빠와 고등학생 때부터 양로원 봉사를 다니면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서 직접 고스톱을 전수받은 나름 실력자였다.

양로원 봉사를 하면서 어르신들의 허전함과 무료함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접했기에, 차 회장의 심정을 금세 눈치챌 수 있었던 것이었다.

차 회장은 열변을 토하며 재인에게 고스톱을 가르쳤다.

그러고는 실전 연습으로 1시간 넘게 신나게 고스톱을 치다 도혁이 곧 도착한다는 전화를 받고 나서야 아쉬운 표정으로 자리를 정리했다.

시작할 때부터 몇 번이나 재인에게 다짐을 받았던 말을 거듭 당부하면서.


「도혁이한테는 절대 비밀이야.」

경고의 말도 잊지 않았다.


「이걸로 점수 땄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내 기준에 아가씨는 턱도 없으니까 일찌감치 꿈 깨!」

차 회장이 일부러 으름장을 놓는 것 같은데 별로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재인은 조금, 아주 조금 차 회장과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 * *



“아니, 먹을 것도 없는데 쌍피를 내면 어떡하나?”

차 회장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재인과 차 회장은 벌써 3일 연속 고스톱을 치는 중이었다.

도혁이 야근을 핑계로 둘만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는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아, 죄송해요! 쌍피인 줄 몰랐어요.”

“몇 번을 가르쳐줘도 까먹니, 원. 서재인 씨, 우리 회사 뒷문으로 들어온 거 아닌가?”

“저, 그럼 다른 거 낼게요.”

재인이 냈던 패를 가져가려 하자 차 회장이 찰싹, 재인의 손등을 쳤다.


“허허, 낙장불입! 한 번 내놓은 패는 무를 수 없는 법이야.”

“아, 네에…….”

“그럼 잘 먹겠네.”

차 회장은 신이 나서 더 크게 착! 하는 소리를 내며 쌍피를 가져갔다.

벌써 몇 번이나 연거푸 이긴 차 회장의 앞에는 동전과 1,000원짜리 지폐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차 회장이 껄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거, 내가 초보를 상대로 이러면 안 되는데…….”

“괜찮습니다.”

“어쩌겠나, 승부의 세계는 냉혹한 것을. 다 깨지면서 배우는 거지.”

“그럼요. 가르쳐주셔서 감사하죠.”

어느덧 게임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5점을 낸 차 회장이 시원하게 ‘쓰리고!’까지 외친 상황.

재인은 점수 날 구석이 없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패를 뒤집었다.

그런데.


“어? 멍따다!”

“뭐?”

재인이 크게 소리치자 차 회장의 눈이 툭 튀어나왔다.


“서재인 씨, 고스톱을 한 번도 안 쳐봤다면서 어떻게 그 전문 용어를 알고 있지?”

“아, 그게…….”

재인은 아차, 하는 얼굴로 식은땀을 흘렸다.

멍따는 멍텅구리 패를 일곱 장 모으면 점수가 두 배를 되는 것으로, 초보자는 알기 힘든 용어였다.

쓰리고에, 광박에, 피박까지 된통 뒤집어쓸 뻔한 게임을 역전한 극적인 순간이라 저도 모르게 티를 내고 만 재인이었다.

차 회장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서재인 씨, 솔직히 말해봐. 진짜 고스톱 처음 치는 거 맞아?”

“그, 그럼요.”

“허허. 누굴 속이려고?”

“실은…… 칠 수 있는데 일부러 모르는 척했어요. 죄송합니다.”

재인이 꾸벅 고개를 숙이자, 차 회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야? 나 참, 속일 걸 속여야지! 지금 사람을 가지고 노는 건가?”

“그럴 리가요! 어떻게 제가 감히 회장님을. 전 그냥 회장님과 사이좋게 잘 지내보고 싶어서…….”

차 회장이 몹시 불쾌한 표정으로 받아쳤다.


“내가 아가씨랑 뭘 사이좋게 지내? 내가 친구야?”

“죄송합니다.”

차 회장이 괜한 트집을 잡는데도 재인은 군말 없이 사과했다.


“됐어! 기분 나빠서 더는 못 하겠네. 사람을 놀려도 유분수지!”

차 회장이 금방이라도 판을 엎어버릴 기세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인은 황급히 따라 일어나 차 회장을 붙잡았다.


“회장님, 그만 노여움 푸세요. 속여서 정말 죄송합니다.”

“알면 됐어!”

“근데요, 회장님…….”

재인이 차 회장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죄송하지만, 가실 때 가시더라도 마무리는 하고 가셔야…….”

순간 차 회장의 눈썹이 움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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