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회장님의 은밀한 취미 생활 (94/129)


93화. 회장님의 은밀한 취미 생활
2023.04.22.



 


“없던 일로 하자고요?”

재인은 제 귀를 의심했다.

뜻밖의 제안에 머리가 멍해졌다.


“네. 괜히 알려져 봤자 좋을 거 없잖아요. 말만 많지.”

“그렇긴 하죠.”

“나도 서 주임이 팀장님이랑 사귀는 거 비밀로 할 테니까, 서 주임도 내가 우진 씨랑 만났다 헤어진 거 비밀 지켜주기로 해요. 어때요?”

그거야말로 재인이 바라는 바였다.

각오는 했지만, 그래도 도혁과 사내 연애로 소문이 나면 구설수에 오르고 피곤해질 게 뻔했다.

그런데 나희가 먼저 비밀을 제안하다니!

재인으로서는 이보다 더 반가운 일이 없었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서 주임, 약속 꼭 지켜야 해요!”

“그럼요. 강 대리님이나 약속 꼭 지켜요.”

두 사람은 다짐하는 의미로 힘차게 손을 맞잡았다.

때마침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나왔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재인은 즐겁게 식사를 시작했다.


“너무 맛있어요! 잘 먹을게요, 강 대리님.”

“다행이다. 많이 먹어요.”

나희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서재인, 내가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이런 굴욕을 참고 있지만, 언젠가는 되 갚아 주고 말 거야!’

괜한 앙심으로 가득 찬 나희의 입에는 뭘 먹든 죄다 쓰기만 했다.

* * *

그 시각, 도혁은 언제나처럼 25층의 비밀 회의실에서 점심식사를 하며 성준의 브리핑을 받고 있었다.


“차정환 대표님 측과 MF파트너스 장문수 대표님의 유대 관계가 흔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소문으로는 혼사가 틀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다행이군요. 근데 이유가 뭡니까?”

“무슨 이유에선지 진혁 도련님이 약혼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고 합니다.”

도혁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흠.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요. 어차피 정략결혼 할 거, 그 전에 마음껏 놀겠다고 작정한 녀석이 갑자기 그러는 거 보면.”

“그럴지도요. 조금 더 알아보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세요. 김 실장님, 시급한 일이 더 없으면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할까요?”

“네, 알겠습니다.”

성준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도혁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도련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제가 정초에 회장님을 찾아뵌 것 기억하시죠?”

“통화할 때 말씀하셨잖아요.”

“실은 그때 회장님께 사직서를 드렸습니다.”

“뭐라고요?”

도혁은 깜짝 놀라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김 실장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 전날 회장님의 지시였긴 하지만 서재인 씨를 지켜드리지 못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더는 회장님의 뜻을 거스를 수도, 그렇다고 따를 수도 없어서 고심 끝에 내린 결정입니다.”

“그건 김 실장님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니,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이렇게…….”

도혁의 목소리에서 답답함이 느껴졌다.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직접 얼굴 뵙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김 실장님 없으면 제가 곤란합니다. 지금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 잘 아시잖아요!”

“걱정 마세요. 그만두더라도 도련님 곁에서 일은 계속할 거니까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도혁이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성준이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주주총회까지 한 달 남았습니다. 시간도 촉박한 데다, 제가 그만두면 도련님에게 타격이 클 테지요.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차 대표 측에서 지금보다 더 과감하게 움직일 게 분명합니다. 그때 저는, 뒤에서 조용히 움직이다 결정적인 증거를 잡아낼 생각입니다.”

“휴, 그런 거였군요. 간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비로소 도혁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스쳤다.


“그럼 서재인 씨 때문에 관둔다는 것도 다 핑계였습니까?”

“그건 사실입니다. 공식적인 의무를 벗어던지고 도련님과 서재인 씨 사이를 마음껏 응원하고 싶었거든요.”

“김 실장님…….”

“제가 어떻게 도련님을 떠나겠습니까. 외람되지만 친동생 같은데요.”

성준의 눈빛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도혁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저도…… 늘 마음속 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멋쩍게 웃었다.


“참, 제가 듣기로는 차 회장님이 도련님 댁에 계신다면서요?”

“어떻게 아셨어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상의하려던 참이었는데…….”

“유라 씨한테서 들었습니다.”

재인이 유라에게 하소연한 게 성준에게까지 전달된 모양이었다.

이미 도혁에게 들킨 거, 굳이 유라와의 사이를 숨기려 하지 않는 성준이었다.

도혁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서재인 씨를 쫓아내려고 작정을 하신 것 같은데, 뭘 하든 트집만 잡으시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흠…….”

성준은 턱을 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참 만에 성준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도련님, 회장님이 요즘 어떤 상태이신지 아십니까?”

“상태라니요?”

뜬금없는 질문에 도혁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회장님은 요즘, 심심하십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요.”

“네?”

그게 뭐 어떻다는 거지?

도혁이 얼떨떨한 얼굴로 성준을 바라봤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세요. 연세도 많으신 데다, 심장에 무리가 가니 운동도 못 하셔, 술은 원래 못 드시니 술자리도 잘 안 나가셔, 오로지 일만 알고 살아오신 분이라 친구도 많이 없어, 그나마도 반은 저세상에 계셔, 그 넓은 집에 종일 혼자 계셔…….”

“아…….”

“회장님이 어떤 심정이시겠습니까?”

도혁은 심장이 조금 욱신거렸다.

한 번도 할아버지의 입장을 헤아려보지 못했던 그였기에.


“……심심하시겠네요. 무척.”

“그래서 더 회장님의 관심이 도련님의 결혼에 집중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시간이 남아도니 잔걱정도 많아지시고요.”

과연. 납득이 가는 해석이었다.


“지금 도련님댁에 계신 것도 파고 들어가 보면 도련님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표출된 것일 수도 있죠.”

“그래서요?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조급해하는 도혁에게 성준이 차분하게 말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한 발짝 물러나 계세요.”

“네?”

“회장님을 더 심심하게 만드는 겁니다. 나머지는 서재인 씨에게 맡기세요. 서재인 씨라면 충분히 알아서 잘하실 겁니다.”

“아……!”

그 말의 의도를 간파한 도혁은 성준의 혜안에 감탄했다.


“감사합니다. 역시 김 실장님이 없으면 곤란합니다.”

“별말씀을요.”

성준이 흐뭇하게 웃었다.

도혁도 씩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김 실장님, 요즘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신 것 같아 참 보기 좋습니다.”

“도련님도 마찬가지십니다.”

다 알고 있는 이유, 굳이 묻지 않는 두 사람이었다.

* * *



―서재인 씨, 어쩌지? 갑자기 일이 생겨서 저녁 같이 못 먹겠는데.

도혁의 갑작스러운 통보에 재인은 간이 철렁했다.


“네? 그 일, 집에서 하시면 안 될까요?”

―미안. 그럴 수 없는 일이라 밤늦게나 들어갈 것 같아.

“팀장님, 그래도…….”

―아, 가봐야겠어. 이따 집에서 봐.

“……네에.”

재인은 마지못해 전화를 끊었다.

그녀의 눈에 거실 소파에서 돋보기를 끼고 책을 보고 있는 차 회장이 들어왔다.

차 회장은 책에 푹 빠졌는지 재인이 저녁을 차리는 내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지금 회장님과 단둘이 밥을 먹어야 하는 상황인 거야? 아아, 진짜 회사에라도 도망가고 싶다!’

재인은 식탁 위에 먹음직스럽게 차려진 음식들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퇴근하고 피로를 풀기는커녕 재인은 잠시도 쉬지 못했다.

퇴근 직전에 차 회장이 불쑥 재인에게 메시지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오늘 저녁은 왠지 잡채랑 소불고기가 먹고 싶다네.]

누굴 전담 쉐프로 아시나!

도혁이 발끈하며 차 회장에게 따지려 걸 재인이 간신히 뜯어말렸다.

오늘까지는 일단 맞춰드리고, 앞으로는 집에서 일도 해야 하니 잘 얘기해보자고.

아무튼 재인은 허겁지겁 마트에서 장을 봐 와 그 손 많이 가는 음식을 두 가지나 하느라 혼이 쏙 빠졌다.

시계를 보니 8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회장님 시장하시겠네.’

재인은 긴장된 목소리로 차 회장을 불렀다.


“회장님, 식사하세요.”

“…….”

“회장님, 저녁 준비 다 됐는데요?”

“…….”

차 회장은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재인은 할 수 없이 차 회장에게 다가갔다.

‘회장님, 식사하세요’라는 말을 꺼내려는 순간.

재인은 보고야 말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고스톱?”

“으아아!”

차 회장이 기겁하며 휴대전화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휴대전화 화면에서는 신나게 화투장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차 회장이 시뻘게진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왜 인기척도 없이 와서 사람을 놀라게 만드나? 나 심장마비로 보낼 속셈이야?”

“아니요! 죄송해요. 식사하시라고 몇 번을 말씀드려도 모르시길래.”

“흠흠. 그냥 책보다 휴대전화에 광고가 떴길래 뭔가 싶어서 잠깐 해본 것뿐이야. 별로 재미도 없네.”

“아아, 그러셨군요.”

풋.

안 물어봤는데 굳이 장황한 변명까지.

재인은 속으로 웃음이 터졌다.

어쩐지 예전 도혁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차 회장이 조금 덜 무섭게 느껴졌다.


“회장님, 시장하시죠? 식사하세요.”

“도혁이는?”

“팀장님은 급한 일이 있어서 늦는대요.”

“그래? 아무튼, 내가 심장이 약하니까 다음부터는 절대 놀라게 하지 말게.”

“네. 죄송합니다.”

차 회장은 그제야 식탁에 앉아 젓가락을 들었다.

정갈하게 차려낸 잡채와 소불고기를 보자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잡채를 한 젓가락 입에 넣는데, 당면도 탱글탱글하고 뭘로 간을 했는지 풍미가 아주 그만이었다.

소불고기도 부드러워서 입안에서 살살 녹는 것 같았다.


‘음식 솜씨가 제법이네?’

차 회장이 흡족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자, 재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입에 맞으세요?”

“흠흠. 우리 집에서 먹던 거랑은 비교가 안 되지만 배가 고파서 그런지 먹을 만은 하네.”

“다행이다! 회장님, 많이 많이 드세요.”

재인이 환하게 웃자 차 회장은 조금 미안해졌다.

일부러 힘들게 하려고 작정하고 왔는데, 재인은 자신이 잘 먹는 것만으로도 순수하게 기뻐하는 것 같아서.


‘아니야! 분명 나한테 잘 보이려고 가식 떠는 걸 거야. 아가씨, 그래 봤자야. 내가 허락할 것 같아?’

차 회장은 마음을 다잡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먹을 만하다는 거지, 맛있다는 건 아니니까. 이걸로 점수 땄다고 생각하진 말고.”

“네, 네, 그런 생각 안 하니까 마음 편히 드세요.”

재인은 말은 그렇게 해도 부지런히 식탁 위를 오가는 차 회장의 젓가락을 보며 생각했다.


‘하긴. 하루 종일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계시느라 회장님도 심심하셨겠네.’

갑자기 안쓰러움이 밀려들었다.

화투를 치다 걸렸다고 당황해하던 차 회장의 모습이 계속 마음에 걸리는 재인이었다.

.
.
.

뒷정리를 마친 재인은 거실에 앉아 있는 차 회장에게 다가갔다.

재인을 불편하게 하려고 거실을 지키고 있던 차 회장은 그새 책을 쥔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재인은 차 회장의 어깨를 살살 흔들었다.


“회장님, 잠은 들어가서 주무셔야죠.”

“어?”

흠칫 놀란 차 회장이 게슴츠레 눈을 뜨며 말했다.


“누가 잤다 그래? 나 안 잤어.”

“아, 죄송해요.”

“흠흠. 이만 들어가 봐야겠구만.”

차 회장은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똑같이 무료한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차 회장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려는 그때였다.


“회장님,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

재인이 차 회장을 붙잡았다.


“왜 그러나?”

탁.

재인은 대답 대신 탁자 위에 무언가를 내려놨다.

차 회장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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