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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아무도 안 와 (93/129)


92화. 아무도 안 와
2023.04.18.


도혁은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봤다.

어두운 복도 저쪽에 차 회장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하, 할아버지! 깜짝 놀랐잖아요.”

“누가 할 소리를. 물 마시러 나왔는데, 누가 도둑고양이처럼 어슬렁거리길래 도둑이라도 든 줄 알았다.”

“아니, 저기, 잠깐 얼굴만 보려고…….”

차 회장은 당황해하는 도혁에게 손가락을 까닥했다.


“잔말 말고 이쪽으로 오너라.”

“……네.”

그토록 힘겹게 몰래 걸어온 길을 눈 깜짝할 새에 되돌아가게 된 도혁이었다.

도혁이 옆으로 다가오자 차 회장이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도혁아, 포기할 건 빨리 포기하자.”

“…….”

정말 너무하십니다.

도혁은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차 회장을 쳐다봤다.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다음 날, 월요일 아침부터 한파가 불어닥쳤다.

평소보다 1시간이나 일찍 출근한 재인의 마음에도 칼바람이 쌩쌩 불었다.

재인은 자리에 앉자마자 책상 위에 젖은 빨래처럼 널브러졌다.


“휴우우우. 하루 사이에 폭삭 늙은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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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인은 차 회장이 새벽부터 온갖 티를 내며 돌아다니는 통에 5시가 되기도 전에 눈을 떴다.

가뜩이나 신경이 쓰이는데, 차 회장은 그녀가 아침을 준비하는 내내 식탁에 앉아 있었다.

죄수를 감독하는 교도관 같은 눈빛에 재인은 등줄기가 서늘했다.

도혁과 둘이 있을 때는 간단하게 먹고 갔던 아침을 7첩 반상으로 차려내고 나니 기운이 쪽 빠졌다.

그런데도 시간은 7시.

잠시 쉬고 싶었지만, 차 회장과 있는 게 불편해서 차라리 일찍 출근하는 것을 선택한 재인이었다.

사실 어제저녁, 도혁이 차 회장을 위해 요리해줄 사람을 따로 부르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차 회장이 극구 거부하며, 재인이 해준 것만 먹고 싶다고 밀어붙이는 바람에 큰소리가 오갔었다.

재인을 시험에 들게 하려는 차 회장의 의도야 뻔한 것을.

재인은 한 달뿐이니 제가 하겠다며 도혁을 뜯어말린 것이었는데.


‘그냥 한판 붙게 놔둘 걸 그랬나?’

재인은 괜한 고생을 사서 한 것 같아, 후회가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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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인 씨, 괜찮아?”

뒤늦게 도착한 도혁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커피를 내밀었다.

재인은 겨우 몸을 일으키고는 커피를 입에 가져갔다.


“아아, 따뜻해. 날이 추워서 으슬으슬했었는데 이제 좀 살겠어요.”

“그러게 내 차 같이 타고 출근하자니까…….”

오늘 아침, 재인은 어차피 나희에게 들켰으니 이제부터는 같이 출근하자는 도혁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그러다 같이 사는 거 들키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연애와 동거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요!”

“어차피 결혼할 건데 뭐 어때?”

“팀장님은 그러실지 몰라도 전 엄청 곤란하거든요. 혹시라도 들키면 낯 뜨거워서 회사 못 다녀요.”

“알았어.”

도혁은 옆자리에 앉아 재인의 볼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미안해. 할아버지가 힘들게 해서…….”

“괜찮아요. 그래도 한 달 동안 기회를 주신 게 감사하죠. 저 열심히 해서 꼭 할아버님의 허락을 받아낼 거예요.”

“당연히 그렇게 될 거야.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재인이 볼을 붉히자 도혁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서재인 씨, 나 믿지?”

“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나만 믿고 따라와.”

재인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도혁과 함께라면 어떤 어려움이라도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재인 씨, 잠시만.”

지그시 재인을 바라보던 도혁이 그녀의 손에서 커피를 빼내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몸을 기울여 재인에게 다가갔다.

몹시 갈구하는 눈빛으로.

히익!

재인은 흠칫 놀라 몸을 뒤로 뺐다.


“티, 팀장님, 뭐 하시는 거예요! 여기 회사잖아요.”

“알아.”

“누가 오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도혁이 한쪽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이렇게 일찍? 적어도 10분 내로는 아무도 안 올걸? 그거면 충분해.”

“아이, 그래도 회사에선 안 돼요!”

재인이 가슴을 밀쳐내자 도혁이 컬컬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재인 씨, 그럼 대체 어디서 하겠다는 거야? 집에는 할아버지가 계시잖아.”

“그렇긴 하죠.”

“생각해봐. 어제 우리, 눈치 보여서 손도 제대로 못 잡았어. 사귀는 사이인데 그게 말이 돼?”

“……안 되죠.”

“이러다간 한 달 내내 입에 거미줄만 치게 생겼어. 그러니까, 기회가 왔을 때 미리미리 해둬야 한다고!”

꽤 설득력 있네.

도혁의 합리적인 주장에 반쯤 넘어가 버린 재인이었다.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짧은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5분.”

“콜!”

 

 
도혁은 명을 받들어 재인의 보드라운 입술을 힘껏 머금었다.

어젯밤 할아버지의 방해로 불발된 굿나잇 키스까지 더한 진한 입맞춤이었다.

재인도 어제 도혁이 그립긴 마찬가지였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한집 안에서 하루 종일 떨어져 있었던 게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그렇게 달콤한 키스에 푹 빠진 두 사람이 암묵적인 합의하에 연장전으로 넘어가려는 찰나였다.

드르륵.

갑자기 사무실 자동문이 활짝 열렸다.

재인과 도혁은 소스라치게 놀라 후다닥 떨어졌다.

문 앞에는 연지가 툭 튀어나온 눈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꺅!”

재인이 기겁하자 연지가 황급히 등을 돌리며 말했다.


“아, 아무것도 못 봤어요.”

봤네. 100퍼센트 봤어.

재인의 얼굴에 화르륵 불이 붙었다.

재인은 도혁에게 레이저를 쏘며 눈짓을 했다.


‘제가 회사에서는 안 된다고 했잖아요! 이제 어떡할 거예요!’

‘누가 이럴 줄 알았나?’

도혁은 애써 의연한 척 연지에게 물었다.


“흠흠. 이연지 씨, 이렇게 일찍 무슨 일입니까?”

연지가 슬그머니 뒤로 돌아서며 대답했다.


“박 과장님이 부탁하신 게 있는데 지난주에 다 못 끝내서요. 두 분도 일찍 오신 걸 보니 할 일이 참 많으신가 봐요?”

“마, 맞아요. 이연지 씨, 그럼 어서 업무 보도록 해요.”

도혁이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사무적으로 대하자, 연지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일단 제 자리부터 비워주시죠, 팀장님?”

“아……!”

도혁은 그제야 자신이 연지의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허둥지둥 팀장실로 걸어가는 도혁의 등에 대고 연지가 외쳤다.


“팀장님, 거울도 좀 보셔야겠어요!”

순간 도혁의 어깨가 움찔하더니 몸을 돌려 쏜살같이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제야 도혁의 입술에 립스틱 자국이 묻어 있다는 걸 눈치챈 재인도 발딱 일어나 화장실로 뛰어갔다.


‘내가 못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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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재인과 도혁, 연지는 팀장실에서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그러니까, 지금 할아버지가 오빠 집에 계신다는 거야?”

자초지종을 들은 연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재인과 도혁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서 아까 회사에서…….”

연지가 다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재인과 도혁을 번갈아 쳐다봤다.

동시에 얼굴이 화악 붉어진 두 사람은 황급히 시선을 떨궜다.

도혁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흠. 암튼 연지 네가 어떻게 좀 해봐.”

“내가?”

“응. 할아버지가 널 제일 예뻐하시잖아.”

“할아버지 황소고집을 누가 꺾어. 그건 나도 무리야.”

“하아. 진짜 할아버지랑 한 달을 같이 살아야 한단 말인가…….”

도혁의 얼굴에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러다가는 한 달을 다 채우기도 전에 욕구불만으로 화병이 생길 것만 같았다.

연지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재인의 손을 꼭 쥐었다.


“그나저나 재인 언니가 힘들겠어요. 울 할아버지 까탈스러운 분이라 쉽지 않을 텐데…….”

“괜찮아. 시간이 지나면 할아버님도 마음이 좀 풀리시겠지, 뭐.”

“아주 작정을 하신 것 같은데…….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으실걸요?”

지금까지보다 더 할 거라고?

희망의 싹을 사뿐히 지르밟는 연지의 발언에 재인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오늘은 일이 있어서 안 되고, 제가 조만간 지원 나갈게요. 암튼 재인 언니, 힘내세요!”

연지가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아, 집에 가기가 두렵다.

그래도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연지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위안해보는 재인이었다.

* * *

강나희가 이상하다.

재인은 오전 내내 심각한 표정으로 일만 하는 나희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렇게 잠잠하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재인은 도혁과 사귀는 걸 나희에게 들켰으니, 회사에 소문이 쫙 퍼질 거라고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희는 소문을 내기는커녕 입도 뻥긋하지 않고 재인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더 찜찜한 재인이었다.


‘이상해. 평소 같으면 벌써 여기저기 소문을 내고 다닐 텐데…….’

하긴.

나희도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재인을 쳐다보긴 했다.

주간 회의가 시작돼 말할 타이밍을 놓쳤지만.

어느덧 시간은 흘러 흘러 점심때가 되었다.

나희가 재인의 옆으로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서 주임, 할 얘기가 좀 있는데 같이 점심 먹을래요?”

“네? 단둘이요?”

“네. 내가 밥 살게요.”

“강 대리님이요?”

왜 생전 안 하던 짓을?

더 오싹해진 재인이었다.

옆에 앉아 있던 연지마저 휘둥그런 눈으로 나희를 쳐다봤다.


“그래요. 그럼 지금 나가죠.”

어차피 한번은 얘기해야 하니까.

재인은 마음을 다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재인과 나희는 근처 브런치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주문을 끝내놓고도 나희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새해 첫날부터 서로 기절할 뻔했네요.”

“그러게요. 강 대리님이 만난다는 의사가 우진 오빠였을 줄이야. 세상이 참 좁아요.”

나희는 재인의 말에 속이 쓰려 물 한 컵을 단숨에 들이마셨다.


“나도 서 주임이 정말 팀장님과 사귀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렇게 딱 잡아떼더니…….”

“아, 어쩌다 보니…….”

올 게 왔구나.

재인은 나희가 도혁에 대해 캐물을까 봐 잔뜩 긴장이 되었다.

나희가 주저하며 물었다.


“저기 혹시…… 우리 팔순 잔치에서 만났던 거, 팀장님 말고 얘기한 사람 있어요? 연지 씨나…….”

“아니요.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요.”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희는 재인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서 주임, 혹시…… 우진 씨한테 뭐 들은 얘기 없어요?”

“우진 오빠한테서요? 그런 거 없는데요.”

“아, 그렇구나. 우진 씨랑은 연락 자주 안 하나 봐요?”

“네. 번호는 알지만 따로 연락한 적 없어요. 갑자기 그건 왜요?”

순간 나희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스쳤다.

주말 내내 어이없게 문자로 까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나희였다.

충격도 충격이지만, 혹시라도 우진이 그 사실을 재인에게 말했을까 봐 걱정돼 잠까지 설쳤었다.

그렇게 회사에서 의사가 결혼하자며 매달린다고 자랑을 했는데, 문자메시지로 차였다는 게 소문이라도 나면?

게다가 그 사람이 서재인의 사촌 오빠라는 게 밝혀진다면?

가뜩이나 서재인이 잘생기고 능력까지 갖춘 도혁을 채간 게 분해 죽겠는데, 그런 굴욕까지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끔찍했다.

그래서 나희는 열심히 머리를 굴린 끝에 재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실은 우진 씨랑 나, 그만 만나기로 했거든요. 둘이 합의하에.”

“갑자기 왜요?”

“성격이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서요. 아니다 싶으면 빨리 정리하는 게 서로를 위해서도 좋으니까.”

“아, 그랬군요.”

재인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희와 자칫 가족으로 엮여서 피곤할 뻔했는데 천만다행이었다.

나희가 부담스럽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팔순 잔치에서 만난 거, 서로 없던 일로 하면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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