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내가 어떻게 괴롭혔는데? (92/129)


91화. 내가 어떻게 괴롭혔는데?
2023.04.15.



‘아침부터 누구지?’

흠칫 놀란 재인은 황급히 도혁을 흔들어 깨웠다.


“팀장님, 좀 일어나 보세요.”

“으음……. 왜에……?”

도혁은 눈을 감은 채 잠에 취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누가 왔나 봐요.”

“올 사람 없는데. 누가 잘못 누른 거겠지.”

“인터폰이 울리고 있잖아요. 혹시 김 실장님 아니에요?”

그제야 도혁이 게슴츠레 눈을 떴다.


“방해꾼이면 더더욱 모른 척해야지.”

도혁은 말이 끝나자마자 재인의 팔을 홱 잡아당겼다.

중심을 잃은 재인은 그대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튕겨 나갈 것 같은 탄탄한 근육의 감촉이 느껴지자 재인은 솜털까지 쭈뼛 곤두섰다.


“그, 그래도 확인해봐야죠. 그만 자고 어서 일어나세요.”

“싫어.”

“계속 게으름 피우실 거예요? 벌써 10시예요.”

도혁은 재인을 더 꽉 끌어안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재인 씨가 밤새 나를 괴롭혀서 이러는 거잖아.”

“제가요?”

이런 적반하장이 다 있나.

기가 막힌 재인은 잽싸게 도혁의 품에서 빠져나와 따졌다.


“괴롭힌 건 팀장님이죠! 제 눈 밑에 다크서클 안 보이세요?”

“내가?”

도혁이 아무것도 몰라요, 라는 표정을 지었다.

와, 이 순진무구한 눈빛 좀 보게.


“팀장님이 아니면 여기 누가 있어요!”

“그래? 내가 어떻게 괴롭혔는데?”

“그러니까 팀장님이……!”

흡.

재인은 입을 딱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였지만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도혁이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또 당했다!’

어제에 이어 연타로 당한 재인은 억울해서 밤에 잠이 안 올 것 같았다.

그녀의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도혁이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서재인 씨가 많이 억울한 것 같으니 그냥 내가 괴롭힌 걸로 치지.”

그냥? 치지?

선심 쓰는 듯한 도혁의 말투에 재인은 바짝 약이 올랐다.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재인은 느닷없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팀장님, 괴롭혀서 죄송해요.”

“응?”

재인이 순순히 시인하자 도혁의 눈이 커졌다.

재인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제 괴로울 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절대?”

“팀장님 엄청 피곤해 보이세요. 저 좋자고 팀장님을 너무 힘들게 했나 봐요.”

도혁이 허겁지겁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아니야. 나 하나도 안 피곤해!”

“무리하지 마세요. 앞으로는 힘들어도 제가 꾸욱 참아볼게요. 숙면은 중요하니까요.”

“안 돼!”

 

 
재인은 도혁의 애타는 목소리를 튕겨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오늘 밤부터는 푹 주무세요. 혼. 자. 서.”

재인이 나가려고 하자 도혁이 다급히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잘못했어.”

그의 눈동자에 깊은 반성의 빛이 서려 있었다.

진작에 그랬어야지.

재인은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참느라 입술을 꾹 다물었다.

비로소 억울함이 풀린 그녀의 귓가에 잠시 잊고 있었던 인터폰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또 울리네요? 진짜 김 실장님인가 봐요.”

“그럴 리가 없는데…….”

“제가 나가 볼 테니 팀장님은 옷부터 챙겨 입으세요.”

재인은 흐트러진 옷과 머리를 매만지고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인터폰 화면을 확인한 순간,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다.

지금 현관문 앞에 서 있는 이는 바로.

* * *



“회장님, 안녕하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도혁의 할아버지인 차대산 회장이었다.


“아가씨가 보기엔 내가 지금 마음 편히 새해 복을 받게 생겼나?”

차 회장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재인은 심기 불편한 얼굴로 앉아 있는 차 회장에게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아……. 죄송합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지난번 차 회장에게 대차게 대들었던 건 사실이라 할 말이 없었다.


“죄송할 일은 애초부터 하지 말았어야지.”

“할아버지, 괜한 생트집 잡지 마세요. 대체 여긴 왜 오셨어요?”

도혁이 굳은 얼굴로 묻자 차 회장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네놈이 한 달 동안 이 아가씨를 지켜봐 달라고 했잖냐?”

“……그랬죠.”

도혁의 얼굴에 ‘대체 무슨 꿍꿍이지?’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재인도 광주에서 올라오는 동안 도혁에게서 들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한 달 동안 합심해서 할아버지의 마음을 돌려놓자고 다짐을 했었더랬다.

막상 차 회장과 마주치니 도망가고 싶은 생각만 굴뚝같았지만.

재인의 복잡한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차 회장의 입꼬리가 하늘 높이 치켜 올라갔다.

그리고 이어지는 폭탄선언.


“그래서 내가 한 달간 여기서 좀 살려고 왔다.”

“뭐라고요?”

“네?”

맙소사!

재인과 도혁은 소스라치게 놀라 서로를 쳐다봤다.

이거야말로 핵폭탄급 충격이라 재인은 다리가 다 후들거렸다.


“할아버지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세요! 안 됩니다!”

도혁이 발끈하자, 차 회장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네놈이 직접 겪어봐야 서재인 씨를 왜 좋아하는지 알 거라며? 그래서 직접 겪어보러 왔는데 왜, 불만이냐?”

“제가 말씀드린 건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자주 만나다 보면…….”

“도혁아, 한 달은 생각보다 짧아. 가끔 얼굴 비추는 걸로 날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나를 너무 만만하게 봤구나.”

“그런 거 아닙니다.”

도혁은 도혁 나름대로 계획이 있었다.

한 달을 제안한 것은 차 회장이 재인을 제대로 알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밥 먹듯이 본가에 출입하며 정을 쌓다 보면 분명 차 회장이 재인의 가치를 알아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계획을 실행하기도 전에 이렇게 차 회장에게 기습 공격을 당할 줄이야.

한집에 살면서 재인을 달달 볶아 쫓아낼 심산임이 분명했다.


“서재인 씨가 불편하잖아요. 억지 쓰지 말고 그만 돌아가세요.”

차 회장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재인에게 물었다.


“서재인 씨, 내가 여기 사는 게 불편한가?”

그걸 말이라고.

그렇다고 할아버지가 손자 집에 묵겠다는데 대놓고 싫다며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재인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아니에요. 저도 여기 얹혀살고 있는데요, 뭐.”

“그럼 문제없네. 도혁아, 들었지?”

“할아버지, 절대 안 돼요! 곤란합니다!”

도혁은 정말 곤란했다.

이제야 겨우 그토록 오매불망하던 재인과의 바람직한 연인 모드에 접어들었는데.

이 난데없는 훼방꾼이라니!


「그럼 오늘 밤부터는 푹 주무세요. 혼. 자. 서.」

아까 재인이 했던 그 말이 씨가 된 것일까.

자칫하다가는 한 달간 독수공방하게 될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반면, 차 회장의 입장에서는 혹시라도 발생할 수 있는 불미스러운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큰 그림이기도 했다.

둘 사이에 덜컥 애라도 생기게 되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니까.

차 회장은 도혁의 말을 무시하고 재인에게 말했다.


“아휴, 배고프다. 아침 일찍 짐 싸느라 바빠서 밥을 못 먹고 왔네. 서재인 씨, 밥은 할 줄 아나?”

“그, 그럼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재인은 빛의 속도로 일어나 주방으로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하나.


‘할아버님이 작전을 바꾸셨구나. 피를 말려 죽이는 것으로.’

재인은 앞으로 펼쳐질 버라이어티한 미래가 그려져 머리가 지끈거렸다.

도혁은 다시 한번 차 회장에게 말했다.


“할아버지, 식사만 하고 돌아가세요.”

“도혁아, 쉽게 무를 거였으면 애초에 시작도 안 했다. 내 성격 잘 알지 않니? 괜히 힘 빼지 마라.”

과연. 차 회장은 한 번 물고 늘어지면 끝장을 보는 인물이었다.

도혁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잠시 후, 자포자기한 도혁이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좋습니다. 그 대신 절대로 실수하시면 안 됩니다. 아시죠? 서재인 씨 모르게 하기로 한 거.”

“날 뭘로 보고. 알았다.”

어제 차 회장과 계약서를 쓰고 공증을 할 때 도혁은 이렇게 말했었다.


「서재인 씨에게는 이 계약에 대해 절대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도혁은 차 회장이 한 달 뒤에도 재인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그녀를 깨끗이 포기할 것이며, 만약 이를 어긴다면 후계자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약속을 했다.

이 승부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재인이 알게 되면 너무 긴장하고 신경 쓰느라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게 뻔했다.

도혁은 할아버지가 있는 그대로의 서재인을 봐주길 원했다.

그렇게만 되면 충분히 승산이 있는 게임이라고, 도혁은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할아버지가 끝까지 반대한다면?

도혁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
.
.

1시간 뒤, 차 회장과 도혁, 재인 세 사람은 처음으로 식탁에 둘러앉았다.

김치찌개와 계란찜, 가지볶음을 메인으로 한 소박한 밥상이었다.

식탁을 보자마자 차 회장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재인이 쭈뼛쭈뼛 말했다.


“회장님, 시장하시죠.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이걸 나보고 먹으라고 차린 겐가?”

늘 집에서도 한정식집 못지않은 으리으리한 밥상만 받아온 차 회장이었다.

재인은 식은땀이 주루룩 흘렀다.


“죄, 죄송해요. 있는 재료로 급히 차리느라…….

“할아버지, 다들 이렇게 먹고 삽니다. 전문 요리사랑 비교하시면 어떡합니까?”

도혁이 발끈하자 차 회장은 그제야 마지못해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김치찌개를 한입 맛본 순간.


‘맛있다.’

눈이 번쩍 뜨였다.

별로 든 것도 없는데, 맛있었다.

차 회장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도혁이 물었다.


“드셔보니 맛있죠?”

“흠흠. 먹을 만은 하네. 김치찌개야 김치만 맛있으면 발로 끓여도 맛있는 거지.”

“그 김치 서재인 씨 어머님이 담그신 겁니다. 서재인 씨도 같이요.”

차 회장은 못마땅한 얼굴로 가지볶음을 집어 입에 넣었다.

아니, 이럴 수가! 가지의 식감과 풍미가 살아 있는 게 여느 호텔 주방장의 요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대체 뭘 넣어서 볶았길래 가지가 이렇게 맛있지?’

계란찜은 또 어떻고.

입안에 넣자 걸리는 것 하나 없이 사르르 녹아 없어졌다.

이쯤 되니 재인의 요리 솜씨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차 회장이었다.

하지만.


“흠. 배가 고프면 아무거나 먹어도 다 맛있는 법이지, 뭐.”

솔직하지 못한, 절대 솔직할 수 없는 차 회장이었다.

못 말리겠군.

도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긴장했던 재인은 차 회장이 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우자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근데, 서재인 씨 방은 어디냐?”

차 회장이 소파에 앉아 후식으로 내온 과일을 먹으며 도혁에게 물었다.


“왼쪽 끝 방이요.”

“그럼 도혁이 네 방은?”

“반대쪽 끝이요. 그건 왜요?”

“그럼 내 방은 네 옆방으로 하면 되겠구나.”

“네? 손님방은 중간에 있는데…….”

도혁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자 차 회장이 씩 웃으며 말했다.


“도혁아, 괜히 밤에 나다니지 마라. 나 잠귀가 밝아서 조그만 소리에도 놀라서 깬다.”

“……!”

차도혁 독수공방 확정.

차 회장은 이미 철저한 감시 모드에 들어가 있었다.

* * *

그날 밤.

자정이 넘은 시각.

도혁의 방문이 슬그머니 열렸다.

도혁은 최대한 숨죽이며 방을 빠져나와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었다.

하루 종일 할아버지 때문에 재인의 손 한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했다.

그냥 자려니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잠깐 재인의 얼굴만 보고 올 생각이었다.

굿나잇 키스도 할 겸.

첩보 작전이라도 벌이는 것처럼 등줄기에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도혁은 슬로모션으로 간신히 재인의 방문 앞까지 도착했다.

드디어 문고리를 잡고 살며시 돌리는데 웬걸?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처음 도혁의 집에 왔을 때, 방문 꼭 잠그라는 유라의 조언을 재인이 충실히 이행해온 결과였다.

그렇다고 그냥 가기에는 아쉬워도 너무 아쉬웠다.

애가 탄 도혁은 살며시 방문을 두드리며 속삭였다.


“서재인 씨, 자?”

곤히 잠들었는지 묵묵부답이었다.

그래도 미련이 남은 도혁이 다시 한번 방문을 두드리려는 찰나에.


“도혁아?”

차 회장이 다정하게 손자의 이름을 불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