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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다른 본능도 책임져 줘야겠는데? (91/129)


90화. 다른 본능도 책임져 줘야겠는데?
2023.04.11.



 
재인은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다.


“아, 아니요! 아무것도 못 들었는데요.”

“아우, 귀청 떨어지겠다.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위층에서 나는 소리였나?”

“그, 그런가 봐요. 엄마 어서 들어가서 주무세요. 이러다 밤새우겠어요.”

1분 1초가 피가 마른 재인은 다급히 엄마의 등을 떠밀었다.


“알았어. 나 진짜 간다. 차 서방 베개 커버 꼭 갈아주고!”

“네! 걱정하지 마세요.”

“차 서방한테 잘해. 그렇게 멋진 사람이 사윗감이라니, 아주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녀야겠어.”

말린다고 안 할 엄마가 아니었다.

에라, 모르겠다.


“네, 마음껏 하세요.”

재인은 엄마가 안방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방 안으로 들어왔다.

딸깍.

전등 스위치를 켜자 방이 환해지면서, 그때까지도 계속 벽에 바짝 붙어 서 있는 도혁이 보였다.


“팀장님, 거기서 웃으시면 어떡해요!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요.”

“갑자기 북엇국 얘기가 나와서 그만. 내가 짜다고 한 게 많이 신경 쓰였나 봐?”

킥킥.

웃고 있는 도혁의 얼굴에 ‘귀여워 죽겠네’라고 쓰여 있었다.


“당연하죠. 이제라도 정정하지만 제가 짜게 끓인 게 아니고, 팀장님이 너무 싱겁게 드시는 거예요.”

“실은 그때, 북엇국 하나도 안 짰는데?”

“네? 근데 왜 짜다고 하셨어요?”

“한 과장 견제하느라고. 한 과장이 눈치가 빨라서 바로 알아채더군.”

“네?”

재인은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회식 다음 날, 회의 시간.

재인이 해장한다고 북엇국을 먹었다고 하자, 규민이 재인이 끓인 북엇국을 먹고 싶다고 했었다.

재인이 농담으로 인스턴트 북엇국을 사주겠다고 대답했더니, 도혁이 생수통을 비우며 아침에 먹은 북엇국이 짰다고 티를 냈던 것이었다.

북엇국도 직접 끓일 줄 아냐는 규민의 물음에 도혁이 이렇게 말했었다.


「인스턴트는 영 입맛에 안 맞아서요.」

와, 그런 거였어?

질투의 화신, 그의 이름은 차도혁이네.


“아우, 유치하게 그게 뭐예요!”

“맞아. 나도 내가 그렇게 유치해질 수 있는 사람인지 처음 알았어. 서재인 씨가 날 이렇게 만든 거니까 책임져.”

“남 탓하시긴. 내재된 본능이 뒤늦게 눈을 뜬 거겠죠.”

순간 도혁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서재인 씨, 말 나온 김에 다른 본능도 책임져 줘야겠는데?”

“다른 본능이요?”

재인은 흠칫 놀라 도혁을 쳐다봤다.

도혁의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재인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사인이었다.

바닥에는 두 사람이 뒤엉켜 있던 이부자리가 마구 흐트러져 있었다.

도혁은 잠시 식어 있던 열기가 다시 후끈 달아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밝게 불을 켠 동시에 이미 이성을 되찾고 만 재인이었다.


“팀장님, 잠깐만요!”

“왜?”

“더는 안 돼요!”

“왜?”

“그게…… 뭔가 굉장히 잘못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지금 재인의 솔직한 기분이었다.

엄마 아빠 집이라서 그럴지도.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거 있잖아요. 수업 시간에 화장실 간다고 빠져나가서 나쁜 짓 하다가 학생 주임한테 된통 걸린 것 같은 기분이랄까? 아, 제가 진짜 수업 시간에 도망다녔다는 건 아니고요.”

하. 도혁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서? 어깨를 잡아끌 땐 언제고, 나보고 그냥 가라고?”

“우리 엄마 예민하셔서 조그만 소리에도 깨신단 말이에요.”

“정말?”

도혁의 눈동자에 지진이 일었다.

사실 엄마는 머리만 대면 아침까지 절대 안 일어나시지만.

재인은 팔을 감싸며 부들부들 떠는 시늉을 했다.


“정말이에요. 불안해 죽겠다니까요. 이제 어서 가세요. 베개 커버 꼭 갈아 끼우시고요.”

재인은 베개 커버를 도혁의 손에 꼭 쥐여 주며 등을 떠밀었다.

시무룩해진 도혁이 방 밖으로 나가며 중얼거렸다.


“뭐,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까…….”

“……!”

재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도혁이 말이 시도 때도 없이 공격하겠다는 선전포고처럼 느껴져서.

* * *

그날 밤, 막 서울역에 도착한 마지막 기차에서 나희가 내렸다.

나희는 오만 정이 뚝 떨어진 우진과 잠시도 같이 있고 싶지 않아서 집안에 일이 생겼다는 핑계로 올라오는 길이었다.

꼭 가야 하는 거냐며 질기게 매달리는 우진을 억지로 떼어놓느라 기운이 쪽 빠진 나희였다.

몸이 천근만근이었지만 기차를 타고 오는 내내 단 한숨도 잘 수 없었다.

팔순 잔치에서 겪었던 굴욕적인 순간들이 계속 떠올라서.

그토록 손에 넣고 싶어서 안달했던 차도혁과 눈엣가시 같은 서재인이 눈앞에서 하하호호 웃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내가 서재인 따위에게 질 수가 있냐고!’

게다가 제 파트너인 우진의 눈치 없고 구차한 행동까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분하고 수치스러웠다.

그동안 상상으로만 겹쳐 보았던 도혁과 우진의 얼굴을 나란히 놓고 보니 그 차이가 남신과 건어물 수준이었다.

나희가 끝까지 거절하자, 우진은 혼자서라도 스위트룸에 묵겠다며 쌩한 얼굴로 가버렸다.


‘아우, 짜증 나! 내일 아침에 뻥 차버려야지!’

나희가 분노의 킥을 날리려고 마음먹은 그때였다.

띠링.

그녀의 휴대전화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누구야, 이 시간에!”

신경질적으로 메시지를 확인한 나희는 휴대전화를 부술 듯 쥐고 바들바들 떨었다.

메시지는 우진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나희 씨가 이렇게 보수적이고 답답한 사람인 줄 몰랐습니다. 아무래도 나희 씨랑은 잘 맞지 않는 것 같으니 이쯤에서 그만두죠. 나희 씨 연락처는 수신차단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아우우우우우!”

인적 드문 플랫폼에 나희의 괴성이 울려 퍼졌다.

서우진은 끝까지 진상이었다.

* * *

재인과 도혁이 집에 돌아온 것은 다음 날 해 질 무렵이었다.

엄마가 점심까지 먹고 가라고 붙잡는 바람에 예상보다 출발이 늦어졌다.

재인은 테이블에 짐을 내려놓고 겉옷을 벗었다.


“아우, 피곤해. 역시 집이 편하네요.”

“다행이야.”

“뭐가요?”

“자연스럽게 집이 편하다는 얘기가 나오는 걸 보니, 이제 여기가 자기 집처럼 느껴지나 싶어서. 처음에는 잔뜩 얼어 있었잖아. 옷도 여러 겹 껴입고.”

도혁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자, 재인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 그건 추위를 많이 타서 그런 거라니까요…….”

이게 서재인의 매력이지.

도무지 질리지가 않아.

도혁은 쿡쿡 웃으며 재인을 번쩍 들어 안았다.


“꺅! 뭐 하시는 거예요?”

“어제 다 못 한 일.”

달리 뭐가 있겠어?

라는 얼굴로 도혁이 씩 웃었다.

아아아!

재인은 너무 놀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젯밤 덕분에 잠을 설쳤단 말이야.”

도혁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건 재인도 마찬가지였지만.

농담이 1도 섞이지 않은 진지한 눈빛으로 도혁이 말을 이었다.


“첫날밤은 서재인 씨 방에서 보냈으니, 이번에는 내 방으로 갈까?”

어젯밤 재인의 불길한 예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동안 참고, 참고, 또 참아왔던 도혁이었다.

도혁은 품에 안은 이 사랑스러운 존재에게 시도 때도 없이, 틈만 나면 덤벼들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재인은 벌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다급히 외쳤다.


“팀장님, 잠깐만요!”

“안 돼! 생각할 틈 안 줄 거야.”

“이제 막 도착했잖아요. 아직 씻지도 않았는데!”

“아, 내친김에 같이 씻을까?”

꺄아아아아아악!

재인은 상상만으로도 너무 충격적이라 머릿속이 먹통이 되어버렸다.


“팀장님, 제가요. 팀장님이 너어어무 빨라서 못 따라가겠거든요. 좀 천천히 해주시면 안 될까요?”

“뭘 천천히 하라는 거야?”

도혁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 그걸 꼭 말로 해야 해요?”

“당연하지. 난 구체적으로 콕콕 집어서 얘기하지 않으면 이해를 못 하거든.”

“아…….”

재인이 입을 딱 다문 채 얼굴만 붉히고 있자, 도혁이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


“알았어. 서재인 씨 놀라지 않게 천천히 할게.”

“팀장님…….”

재인이 사랑스러운 눈망울로 도혁을 올려다봤다.


‘이런. 이건 못 참겠다!’

도혁은 뜨거운 콧김을 훅 뿜으며 말했다.


“일단 오늘은 하던 거 마저 하고 내일부터!”

“티, 팀장님!”

재인이 눈이 주먹만 해지자 그의 팔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도혁은 힘찬 걸음으로 제 방으로 들어가 재인을 침대에 내려놓았다.

살짝 입을 맞추고 몸을 일으키더니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 헤치며 중얼거렸다.


 


“내가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렸는지 상상도 못 할걸?”

그의 목소리에서 지독한 갈증이 느껴졌다.

도혁은 침대에 무방비 상태로 누워 있는 그녀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스윽 훑었다.

강렬한 그의 눈빛에 재인은 온몸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차도혁의 침대 위에 누워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재인은 떨리는 눈빛으로 도혁을 올려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도혁이 질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갑자기 와이셔츠 단추를 풀어 내리는 그의 손이 빨라졌다.

이윽고 마지막 단추가 풀린 순간.

흡!

재인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몇 번을 봐도 가슴 설레게 만드는 완벽한 몸이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뿐인데도 손바닥에 탄탄한 복근의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듯해 재인은 얼굴을 붉혔다.

이윽고 도혁이 거추장스러운 와이셔츠를 홱 벗어 던졌다.

그리고 지체 없이 그토록 닿고 싶었던 목적지를 향해 몸을 숙였다.

새하얀 목덜미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자 재인이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앗, 간지러워…….”

아!

도혁의 입술이 뜨겁게 덮쳐오는 바람에 재인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머릿속이 순식간에 텅 비어버렸다.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살짝 틈을 보이자 그가 거침없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뜨거운 열기가 입안 구석구석을 휘저었다.

도혁은 흠칫 놀라 움츠러든 그녀를 깊숙이 쫓아와 거칠게 휘감았다.

턱을 매만지던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슬며시 재인의 손에 깍지를 낀 도혁은 두 손을 머리맡으로 치켜올렸다.

깜짝 놀란 재인이 눈을 크게 떴다.


“아, 잠깐……!”

앗, 하는 사이에 그녀의 니트 티셔츠가 날아가 바닥에 떨어졌다.

재인은 밀려드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눈을 질끈 감았다.

거울에 비춰 보지 않아도 제 얼굴이 불덩이처럼 빨갛게 달아올라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때, 그녀의 귓가에 달콤한 목소리가 와닿았다.


“서재인 씨, 사랑해.”

열정적인 키스를 받기라도 한 것처럼 재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살며시 눈을 뜬 재인은 도혁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도요.”

도혁이 피식 웃더니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다시 재인에게 돌진했다.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한 열기가 불이 번지듯 두 사람의 온몸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갔다.

재인은 눈을 감은 채 몸을 파르르 떨었다.

사고는 이미 멎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저 천천히, 강하지만 부드럽게 점령해 들어오는 도혁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 * *

다음 날인 일요일 아침, 재인은 도혁의 침대에서 눈을 떴다.

도혁은 아직 꿈속을 헤매고 있는 듯했다.

물끄러미 도혁을 바라보던 재인은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난밤의 뜨거운 열기가 아직도 몸에 남아 있는 것 같아서.


‘설마 매일 그러는 건 않겠지?’

꺄악!

재인은 두 볼을 감싸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였다.

방 밖에서 익숙한 클래식이 들려왔다.

인터폰 알림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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