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잠깐만 문 좀 열어봐 (90/129)


89화. 잠깐만 문 좀 열어봐
2023.04.08.



 
재인과 도혁은 동시에 꿀꺽, 침을 삼켰다.

지난밤의 뜨거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두 사람이었다.

제풀에 찔린 재인이 정색하며 말했다.


“어, 엄마! 어떻게 제 방에서 둘이 같이 자요?”

“얘는, 누가 같이 자래?”

엄마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당연히 네 방은 차 서방한테 주고, 넌 맞은편 방에서 자야지. 손님한테 어떻게 서재 방에서 자라고 하니?”

“아, 그 얘기였구나…….”

괜히 오바했네.

재인은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사이 아빠가 안방에서 이부자리를 들고 나와 서재 방에 깔아주고는, 재인에게 신신당부했다.


“재인아, 잘 때 문 꼭 잘 잠그고 자야 한다, 알았지?”

“네?”

“남자는 다 늑대야. 무조건 조심해야 해.”

“아빠아아!”

아빠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도혁을 쳐다보더니, 토라진 표정으로 안방에 쏙 들어가 버렸다.

민망함은 재인의 몫으로 남겨두고.


“저 사람이, 차 서방 불편하게 왜 저래? 계속 꽁해 있고. 차 서방, 재인이 아빠가 딸 뺏기는 것 같아서 섭섭한가 보니 이해하게.”

“아무렴요. 전 괜찮습니다.”

“그럼 잘 자게, 차 서방. 재인이 너도 잘 자고.”

엄마마저 방으로 들어가고 둘만 남게 되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 방 보여드릴게요.”

재인은 허둥지둥 방문을 열었다.

원목 책상과 책장, 작은 옷장과 침대뿐인 소박한 방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 서재인 씨다운 방이네?”

“아기자기한 맛이 없죠? 제가 꾸미는 걸 잘 못 해서요.”

“그래서 더 좋은데? 스위트룸보다 훨씬 더.”

재인은 도혁의 애정이 듬뿍 담긴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도혁은 방을 두리번거리다 침대에 걸터앉았다.


“서재인 씨가 여기서 잤었단 말이지?”

“……그렇죠. 제 침대니까요.”

서재인, 너 왜 긴장하고 그래?

팀장님은 그냥 사실 확인을 한 것뿐인데.

재인은 도혁이 제 침대에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매트리스를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에 자꾸만 눈이 갔다.

얼마나 부드럽고 뜨거운지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러다가는 도혁에게 속내를 들킬 것만 같아 재인은 황급히 말을 돌렸다.


“팀장님, 근데 정말, 제가 보고 싶다고 해서 내려오신 거예요?”

“당연하지.”

“설마 진짜 헬기 타고 오신 건 아니죠?”

“응. 연지한테 얘기했다 돈 낭비라고 욕먹어서 그냥 기차 탔어.”

그나마 이성적인 연지 씨가 옆에 붙어 있어서 다행이네.

재인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장소는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할머니 팔순 잔치라고 얘기도 안 했는데.”

“서재인 씨가 하도 연락이 안 돼서 김 실장님한테 물어봤지.”

“아, 맞다! 부재중 전화가 많이 와 있던데, 죄송해요. 답답하셨죠?”

팔순 잔치에서 이러 저리 뛰어다니느라 휴대전화를 확인할 새가 없었다.

그래도 아직 의문이 남아 있었다.


“어? 김 실장님한테도 얘기한 적 없는데?”

“그래서, 김 실장님이 유라 씨한테 물어봐 줬어.”

“아, 그런 거였구나.”

비로소 의문이 풀렸다……가,

또 다른 의문이 생겼다.


“근데 김 실장님과 유라, 요즘 두 사람 연락을 자주 하네요? 언제 그렇게 친해졌지?”

“글쎄.”

역시.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군.

도혁은 지난번 떡볶이집에서 만났을 때 김 실장과 유라가 사귀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

자세한 건 묻지 않았지만, 아마도 술 취한 유라를 성준이 데려다준 날이 결정적이었으리라.


“오늘 정말 여러 번 놀라네요. 우진 오빠가 강나희 대리 데리고 왔을 땐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어요.”

“세상 참 좁아.”

“그러니까요.”

재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팀장님, 근데 이제 강 대리가 알게 됐으니 어떡해요?”

“사내 연애한다고 소문이 나겠지.”

“괜찮으세요?”

“응. 좀 피곤하긴 하겠지만 정체가 발각된 건 아니니까 괜찮아.”

“그렇다면 다행인데……. 다들 놀라서 기절하겠죠?”

남들 눈에는 재인이 늘 차도혁에게 혹사당하고 깨지는 걸로만 보였을 테니까.


“그러지 말고 이참에 확 결혼해버릴까? ‘차 서방’ 소리도 듣기 좋은데?”

“돼, 됐거든요! 저 일본 다녀와야 하는 거 아시잖아요.”

“결혼하고 가면 되지. 책임진다며?”

“책임질 거예요. ……언젠가는.”

도혁의 눈썹이 꿈틀했다.


“뭐? 설마 늙어 꼬부라질 때까지 끌 건 아니지?”

“그거야 팀장님 하기 나름이죠.”

“서재인 씨, 너무하네.”

도혁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그러든가 말든가, 재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팀장님, 그럼 편히 쉬세요.”

“가려고?”

재인이 나가려고 하자 도혁의 눈빛이 돌변했다.

도혁은 꿀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눈으로 지그시 재인을 바라봤다.


“서재인 씨?”

착 휘어 감기는 부드러운 음성에 재인은 심장이 간질거렸다.

두근두근.

재인은 혹시라도 엄마 아빠에게 들릴까 봐 작게 속삭였다.


“왜, 왜 그러세요?”

“서재인 씨가 보고 싶다고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는 건 너무하지 않아?”

“전 분명 참아보겠다고 했거든요.”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돼? 바빠서 얘기할 새도 없었잖아, 우리.”

그러고 보니.

둘만 있을 시간이 없어서 말 한 마디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할아버님과 만난 얘기도 듣고 싶긴 한데.

하지만 적절한 타이밍이 아닌 것 같다.

그러기엔 도혁의 눈빛이 그윽해도 너무 그윽해서.


“이, 이러다 엄마 아빠 깨시겠어요. 얘기는 내일 하고, 안녕히 주무세요!”

“저기, 잠깐만…….”

도혁의 안타까운 목소리를 뒤로 하고 재인은 잽싸게 방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도망치듯 나온 보람도 없이 잠자리에 누워도 도혁 생각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미쳤어! 엄마 아빠도 계신데…….’

빨리 잠이 들려고 하면 할수록 정신이 점점 더 또렷해졌다.

정신없는 하루를 지나오느라 깊이 의식하지 못했던 일들이 자연스레 하나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재인의 어깨를 잡았던 그의 듬직한 손길.

자리에 앉자마자 테이블 아래에서 슬그머니 재인의 손에 깍지를 꼈던 그의 손.

무례한 이들을 꼼짝 못 하게 만든 그의 카리스마.

시종일관 재인을 든든하게 지켜봐 주던 그의 따스한 눈빛.

아, 정말이지!

재인은 심장이 미친 듯이 떨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똑. 똑.

노크 소리에 이어 문밖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재인 씨, 자?”

도혁의 목소리에 재인의 심장이 쿵쾅쿵쾅 반응을 했다.

재인은 문으로 다가가 말했다.


“……왜요?”

“깜박 잊은 게 있어서.”

“뭐, 뭔데요?”

“줄 게 있어. 잠깐만 문 좀 열어봐.”

두근.

재인은 못 이기는 척 문을 빼꼼 열었다.

어두운 복도에 거대한 산처럼 도혁이 서 있었다.

방에 불도 켜지 않아 주위는 온통 어둠뿐이었다.

그런데도 도혁의 조각 같은 이목구비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재인은 설레는 마음을 숨긴 채 조심스레 물었다.


“줄 게…… 뭔데요?”

“이거.”

말과 동시에 도혁은 좁은 틈으로 손을 뻗어 살며시 그녀의 두 볼을 감쌌다.

재인이 뭐라 할 새도 없이 도혁은 고개를 숙여 새초롬한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아주 진하게.

아주 깊숙하게.

어느 순간, 숨 막히게 이어지던 키스가 잦아들고 도혁의 입술이 떨어졌다.

파르르 열린 재인의 눈동자에 잔뜩 상기된 그의 얼굴이 가득 찼다.

도혁이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동자가 위태롭게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하아.

재인은 더는 참지 못하고 도혁의 어깨를 힘껏 끌어당겼다.

그리고.

재인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바닥에 깔린 이부자리 위에서 도혁과 한 몸처럼 부둥켜안고 있었다.


 
고요한 가운데 누구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숨소리들이 뒤엉켜 허공을 배회했다.

두 사람은 지난밤의 황홀했던 기억을 더듬기라도 하듯 정신없이 서로를 어루만졌다.

아직은 낯설기만 한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재인은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참느라 입술을 꼭 감쳐물었다.

이윽고 성마른 도혁의 손길이 재인의 옷 속으로 파고들려는 찰나였다.

난데없이 문밖에서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 서방, 자나?”

엄마가 도혁이 자고 있어야 할 재인의 방 앞에서 노크를 하고 있었다.

꺄아아아아아아악!

재인과 도혁은 누가 먼저라고 할 새도 없이 빛의 속도로 떨어졌다.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 숨죽이고 있을 때였다.

이번에는 엄마가 두 사람이 있는 서재 방의 문을 두드렸다.


“재인아, 자니?”

흡!

재인은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심장은 벌렁거리다 못해 튀어나올 기세로 가슴을 두드려댔다.

도혁은 도혁대로 식은땀을 비 오듯 흘렸다.

엄마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얘가 벌써 자나? 아직 10분도 안 지났는데…….”

이러다 엄마가 문을 열기라도 하면?

안 돼!

재인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도혁에게 숨으라고 손짓을 보냈다.

도혁은 눈치 빠르게 문 뒤 벽에 바짝 붙어 섰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돈한 재인은 마지막으로 가쁜 숨을 골랐다.

준비 완료.

재인은 눈을 비비며 문을 열었다.


“아…… 엄마 왜요?”

“어머, 자고 있었구나. 내가 괜히 깨웠네.”

엄마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스쳤다.

재인은 보란 듯이 하품을 크게 했다.


“하암……. 무슨 일이신데요?”

“아니, 생각해보니까 너네 베개 커버를 안 갈았지 뭐야?”

“베개 커버요?”

엄마가 하얀 베개 커버를 들어 보였다.

재인은 황망히 베개 커버를 쳐다봤다.

고작 이것 때문에 팀장님이랑 나랑 간 떨어질 뻔한 거야?


“너는 그렇다 치고 차 서방 베개는 갈아줬어야 했는데. 영 마음에 걸려서 잠이 안 오지, 뭐야.”

“엄마아! 그런 것까지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얘는, 그래도 네가 데려온 유일무이한 남자친구인데 잘해줘야지. 그래서 말인데, 차 서방 잠든 것 같으니까 지금이라도 네가 살짝 갈아주고 나올래?”

엄마의 얼굴에 베개 커버를 갈고야 말겠다는 굳건한 의지가 엿보였다.

휴. 재인은 할 수 없이 베개 커버를 받아 들었다.


“알았어요. 갈아줄 테니까 걱정 말고 주무세요.”

“그래, 고맙다. 아휴, 이제 발 뻗고 잘 수 있겠네. 잘 자라.”

“네. 안녕히 주무세요.”

엄마가 후련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엄마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재인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데.

꺄아아악!

갑자기 엄마가 뒤돌아 다시 걸어왔다.

재인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참, 재인아”

“또 뭔데요!”

“차 서방은 무슨 음식 좋아해?”

“그건 왜요?”

“내일 아침에 해 주려고.”

“아, 아침이요…….”

뭘 먹어도 별 반응이 없는 도혁이라 딱히 떠오르는 음식이 없었다.

겨우 생각해낸 한 가지.


“……북엇국?”

“그래? 잘됐네. 오늘 술도 마셨으니 내일 콩나물 넣고 시원하게 끓여줘야겠다.”

“네. 짜지 않게요.”

첫 회식 다음 날.

도혁이 자신이 끓인 북엇국을 먹고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짜다고 했던 걸 마음에 담아둔 재인이었다.

풋.

문 뒤에서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방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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