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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차 서방, 우리 차 서방 (89/129)


88화. 차 서방, 우리 차 서방
2023.04.04.



 


“팀장님, 이쪽은 저희 할머니,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세요. 그 옆은 사촌 오빠고요.”

어차피 나희에게 들켜버린 거, 재인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도혁에게 가족들을 소개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서재인 씨 남자친구 차도혁입니다.”

도혁은 할머니와 우진의 식구들에게도 인사를 건네고 재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할머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우리 재인 씨가 누굴 닮아 미인인가 했더니, 할머님을 뵈니 알겠네요.”

닮긴 어디가 닮아?

되지도 않는 말에 재인은 화들짝 놀라 도혁을 쳐다봤다.

이분이 갑자기 왜 이러시나?

도혁은 슬쩍 재인에게 눈길을 주더니 말을 이었다.


“미모가 집안 전통인가요? 팔순 잔치라고 들었는데 할머님 뵙고 회갑 잔치인 줄 알았습니다.”

“아니, 뭐……. 흠흠. 내가 소싯적엔 한 미모 하긴 했지. 동네 총각들이 아주 난리가 났었다니까.”

“그럴 만도 하죠. 얼마나 미인이셨을지 상상이 갑니다.”

재인과 닮았다는 말에 떨떠름한 표정을 짓던 할머니는 미인이고 젊어 보인다는 말에 하늘 높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했다.


‘와, 저런 느끼한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

재인은 능글맞기 그지없는 도혁을 보면서 속으로 감탄사를 연발했다.

지금 도혁은 철저한 ‘비즈니스 모드’였다.

도혁이 할머니에게 걱정스레 물었다.


“그런데 할머님, 혹시 오늘 언짢은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아닌데. 내 생일 잔칫날에 그럴 일이 뭐가 있겠어.”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조금 전에 보니 말도 안 되는 생떼를 쓰시는 것 같아서요.”

“생떼라니?”

“재인 씨에게 몰상식하게 함부로 대하셔서요. 기분이 언짢으실 만한 안 좋은 일이 있으셨던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 그만.”

“뭐, 몰상식?”

할머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연이은 도혁의 폭탄 발언에 식구들 모두 입이 쩍 벌어졌다.

도혁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오해를 했군요. 딱 봐도 우아하고 고상하신 할머님이 손녀한테 그러실 리가 없는데, 그렇죠?”

“다, 당연하지. 내가 그런 뜻으로 한 게 아니야. 그냥 목이 말라서…….”

“그러셨군요. 그럼, 앞으로도 우리 재인 씨한테 잘 대해주시리라 믿고 있겠습니다. 우아하고 고상하게.”

도혁은 환한 미소에 은근한 경고를 실어 보냈다.

그의 강렬한 카리스마와 미모에 압도된 할머니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이거.”

도혁이 재킷 주머니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할머니에게 공손히 건넸다.


“급히 오느라 따로 선물을 준비 못 해서 조금 넣었습니다. 다시 한번 팔순 축하드립니다.”

딱 보기에도 두툼한 봉투 안을 슬쩍 들여다본 할머니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럼, 그럼. 걱정 말게. 내 손녀를 내가 안 챙기면 누가 챙기겠나.”

“저기, 어머님?”

아주 홀라당 넘어가셨네.

작은엄마는 할머니를 구워삶은 도혁을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봤다.

당연히 존재 자체가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던 재인의 남자친구였다.

누가 봐도 재인의 엄마가 급히 둘러대는 게 확실했는데.

아무리 팔은 안으로 굽는다지만, 그럼에도 객관적으로 아들인 우진보다 월등히 멋진 도혁을 보자 배알이 단단히 꼬여버린 작은엄마였다.

엄마는 작은엄마가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자 고소해하며 말했다.


“동서, 이제 속이 시원해? 왜 사람 말을 못 믿고 그래?”

“제가 뭘요? 그냥 좀 마음에 걸렸던 거지.”

본인 엄마의 타는 속도 모르고 우진은 도혁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서우진이에요. 제일대학병원 정형외과 전문의고요. 그쪽은……?”

“대산F&G 상품기획팀 팀장, 차도혁입니다.”

“아아, 그렇군요.”

우진의 얼굴에 자부심 가득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렴, 내 아들이 누군데.

갑자기 작은엄마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근데 요새 대기업 정년이 40대 초반이라면서요? 조직에서 살아남기가 쉽지 않겠네. 우리 우진이는 전문직이라 그럴 걱정이 없는데.”

“네. 그래서 일찌감치 가업을 물려받으려고 생각 중입니다.”

도혁은 작은엄마의 무례한 말에 침착하게 대응했다.


“가업? 뭘 하시는데요?”

“조그만 사업체를 운영하십니다.”

“조그만 사업체면, 아아, 중소기업? 뉴스에 요새 경기가 안 좋아서 중소기업들이 많이 힘들다고 나오던데.”

“그렇죠, 뭐. 힘들지 않은 사업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니까. 역시 의사 같은 전문직이 안정적이고 좋지.”

이제 그만하세요, 작은엄마.

이거 팀장님이 대산그룹 후계자라고 밝힐 수도 없고.

듣고 있는 재인은 민망해서 쥐구멍에 숨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그만둘 생각이 없는 작은엄마는 일부러 주위 사람들도 들리게 큰 소리로 말했다.


“병원장님이 우리 우진이 능력을 어찌나 높이 사시는지, 어디 갈까 봐 붙잡으려고 안달이 났어요. 혹시 병원 갈 일 있으면 연락해요. 미리 연락해줄 테니까.”

“괜찮습니다. 저희는 한세병원 원장님과 친분이 있어서 그쪽으로만 다녀서요.”

도혁의 말에 우진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한세병원 조 원장님을 안다고요?”

“네. 저희 할아버지와 각별한 사이라 종종 뵙습니다.”

“저기, 그럼 언제 조 원장님과 식사 자리를 마련해줄 수 없을까요? 실은 그쪽으로 옮기고 싶은데, 몇 번이나 떨어져서…….”

“우진이, 너!”

작은엄마가 시뻘게진 얼굴로 우진의 옆구리를 찔렀다.

풋.

엄마가 웃음이 터지려는 걸 참느라 입을 틀어막았다.

도혁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건 좀 힘들겠는데요. 공정하지 못한 건 제 원칙과 어긋나서요.”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만나게 도와주시면…….”

“이거 곤란한데…….”

잠깐 뜸을 들인 도혁이 말을 이었다.


“휴, 할 수 없죠. 재인 씨 사촌 오빠시니까 특별히, 재인 씨 얼굴 봐서 자리를 한번 마련해보겠습니다.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시고요.”

“아우, 정말 고맙습니다!”

“감사는 제가 아니라 재인 씨한테 하셔야죠.”

그러자 우진이 처음 듣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재인에게 말했다.


“재인아, 네 덕분이야. 고맙다.”

“……으응.”

재인은 신이 난 우진의 옆에 썩은 사과 같은 얼굴로 앉아 있는 작은엄마를 보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속없는 아들 때문에 KO패를 당한 작은엄마는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아아, 어서 빨리 끝내고 집에 가서 쉬고 싶다.’

재인은 괜스레 속이 타서 벌컥벌컥 찬물을 마셨다.

그때 엄마가 도혁에게 말했다.


“차 서방, 오늘은 늦었으니까 우리 집에서 묵고 가게.”

 

 
켁. 켁.

재인은 물을 뿜으려는 걸 참느라 된통 사레가 걸렸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재인은 황급히 엄마를 뜯어말렸다.


“엄마, 아직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차 서방이에요! 갑자기 집에는 또 왜!”

“결혼 전제로 만나는 거니까 상관없지, 뭐. 그죠, 여보?”

“아무래도 너무 이른 것 같은데……. 그러다 헤어지…… 아얏!”

엄마가 아빠의 허벅지를 꼬집으며 도혁에게 거듭 당부했다.


“암튼 차 서방, 우리 집으로 가는 거야, 알았지?”

도혁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에 하트가 한가득 떠 있었다.

그 말에 도혁이 몹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 어쩌죠. 이미 숙소를 예약해버렸는데. 결제도 다 해버렸고.”

“그래? 어딘데?”

“썩 맘에 들진 않지만 하룻밤 묵긴 그럭저럭 괜찮아 보여서 이 호텔 스위트룸을 잡았거든요.”

우진이 눈을 똥그랗게 뜨며 물었다.


“여기 스위트룸이면 300만 원이 넘는데 거길 예약했다고요?”

“네.”

나희가 머물 객실을 손수 예약해서 가격대를 알고 있는 우진이었다.

스위트룸이면 우진이 예약한 디럭스룸보다 20배는 비싼 객실이었다.

우진의 얼굴에 ‘이 자식 대체 뭐야?’ 하는 표정이 스쳤다.

나희는 가뜩이나 우진이 도혁에게 밀려서 분하고 창피한데, 도혁이 재력까지 겸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충격에 충격이 더해졌다.

도혁은 빙긋 웃으며 재인의 엄마에게 말했다.


“그래도 어머님이 오라고 하시는데 당연히 어머님 댁에서 자야죠.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그렇게 비싼 방을 예약했는데 아까워서 어쩌려고?”

“상관없습니다. 제게는 재인 씨가 자랐던 어머님 댁이 훨씬 좋은 걸요.”

“그래도…….”

엄마가 마음에 걸려 하자, 이때다 싶었는지 우진이 얼른 끼어들었다.


“그럼 그 스위트룸에 우리가 대신 묵어도 될까요? 나희 씨가 여기 숙소를 잡아놨는데, 이왕이면 더 좋은 데서 자고 가면 좋잖아요.”

순간 나희와 재인의 눈이 딱 마주쳤다.

나희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시뻘게졌다.

도혁은 대답 대신 실눈을 뜨고 우진을 바라봤다.

나희는 다급히 우진에게 귓속말을 했다.


“우진 씨, 그만해요. 전 예약한 방이면 돼요.”

“왜요? 아깝잖아요. 언제 그런 좋은 방에 묵어보겠어요?”

아우, 쪽팔려!

가뜩이나 서재인한테 밀려서 속 쓰려 죽겠는데 이런 모지리가!

지금 이 상황에서 그 방을 쓰고 싶니? 어?

우진에게 오만정이 뚝 떨어져버린 나희였다.

그러나.

그런 줄 꿈에도 생각지 못한 우진이 도혁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물었다.


“……괜찮죠?”

도혁은 그제야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럼 그러시든가요.”

“고맙습니다!”

우진은 신이 나서 나희에게 말했다.


“나희 씨, 이게 웬 횡재예요? 오늘 운이 아주 좋은데요?”

“…….”

이미 우진의 머릿속은 스위트룸에서 나희와 보낼 뜨거운 하룻밤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희는 결심했다.


‘이놈의 쓰레기 같은 보험, 확 깨버릴 거야!’

 

* * *

그날 밤, 재인과 도혁은 부모님과 작지만 따뜻한 거실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시원하게 맥주잔을 비운 엄마가 웃음을 터뜨렸다.


“재인아, 너도 봤지? 네 작은엄마 똥 씹은 표정 짓는 거.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꼴좋다.”

“엄마, 너무 그러지 마세요. 막상 작은엄마 그러고 있는 거 보니까 좀 안쓰럽던 데요.”

“안쓰럽긴! 그동안 당한 게 얼만데. 암튼 내가 오늘 차 서방 덕분에 30년을 얹혀 있던 게 쑥 내려갔어. 고맙네, 고마워!”

“별말씀을요.”

“엄마, 그 차 서방이라는 말 좀 그만해요. 민망하게 참.”

재인은 얼굴을 붉히며 도혁을 힐끔 쳐다봤다.

도혁은 아빠에게 빌려 입은 촌스러운 트레이닝복을 명품으로 승화시키며 자체발광하고 있었다.

도혁이 제 집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는 재인이었다.


“뭐 어때? 입에 착착 달라붙고 좋구만. 그렇지, 차 서방?”

“네, 어머님. 저도 참 듣기 좋습니다.”

도혁이 넉살 좋게 웃었다.

만난 지 몇 시간 되지 않았는데도 쿵짝이 잘 맞는 두 사람이었다.

시원섭섭한 표정으로 묵묵히 듣고만 있던 아빠가 입을 열었다.


“여보, 적당히 하고 잡시다. 애들도 피곤할 텐데.”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네. 차 서방, 많이 피곤하지?”

“전혀요. 어머님이랑 얘기 나누는 게 즐거워서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어머, 말도 참 예쁘게 하지. 재인아, 어디서 이렇게 멋진 사람을 다 만났니? 잘했다, 잘했어.”

계략에 넘어가서요.

재인은 그저 멋쩍게 웃어 보였다.

한 달 전, 홧김에 사표를 던지러 가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도혁과 계약으로 얽힐 일도 없었더라면.

그랬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자, 자, 남은 얘기는 내일 하기로 하고 그만 자야지.”

엄마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머님, 저는 어디서 자면 될까요?”

도혁이 묻자 엄마가 화장실 오른편에 있는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재인이 방에서 자면 되지.”

“재인 씨 방에서요?”

재인과 도혁은 흠칫 놀라 서로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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