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자체발광 차도혁
(87/129)
87화. 자체발광 차도혁
(87/129)
87화. 자체발광 차도혁
2023.04.01.
‘아우우우! 어떡하지?’
이러다가는 꼼짝없이 들키게 생겼다.
재인은 다급히 둘러댈 말을 찾았다.
“아, 강 대리님이랑 같은 극장에 갔던 그날, 소개팅했던 조현준 씨랑 같이 <프로젝트 M> 봤다고 했잖아요. 그 사람이에요.”
별 수 없이 또다시 BOC의 보컬 조현준을 소환하고 만 재인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나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머, 그 조현준 씨구나! 다행이다.”
“다행?”
“누군지 너무 궁금한데 저도 사진 좀 보여주면 안 돼요?”
나희가 순수하게 진실을 갈구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절대 사진을 보여줄 수 없는 재인은 난감하기만 했다.
그 남자친구가 도혁이라는 걸 나희가 알게 되면 하루도 안 돼서 회사에 소문이 쫙 퍼질 텐데.
그렇다고 보여주지 않으면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게 뻔하고.
재인은 고심 끝에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실은…… 남자친구가 사진 찍는 걸 워낙 싫어해서 사진이 없어요.”
“한 장도요?”
“네. 한 장도.”
돌연 나희가 의혹으로 가득 찬 눈빛을 뿜어냈다.
강나희, 그냥 좀 넘어가자.
나희가 더 캐물을까 봐 바짝 긴장하고 있는 재인에게 작은엄마가 돌직구를 날렸다.
“재인아, 너 혹시 남자친구 없는데 있는 척하는 건 아니니?”
그만 솔직하게 얘기하시지?
작은엄마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있긴 한데요…….”
아우, 답답해!
속이 터질 것 같은 재인 대신 엄마가 나섰다.
“동서, 왜 사람 말을 못 믿고 그래? 우리 재인이가 없는 얘길 할 사람으로 보여?”
“아니, 형님이 재인이 남자친구가 잘생기고 잘나가는 부자라고 하도 큰소리를 치셔서 궁금해서 그렇죠. 데리고 온다고 하더니 코빼기도 안 비치고, 그런데 사진도 안 보여줘. 누가 봐도 이상하잖아요. 안 그래요, 어머님?”
“내 애초에 그렇게 잘난 남자가 재인이를 만난다는 게 이상하긴 했다.”
할머니까지 작은엄마를 거들고 나서자 엄마의 분노 게이지가 솟구쳤다.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요! 우리 재인이가 얼마나 괜찮은 앤데!”
“엄마, 그만하세요.”
재인은 이러다 한판 붙겠다 싶어 엄마를 뜯어말렸다.
때마침 행사 진행자가 다가와 말했다.
“곧 잔치 시작하겠습니다. 하객분들은 미리 입장해주시고, 자녀분들만 남아 주세요.”
웅성웅성 사람들이 자리를 비우자, 곧장 진행자의 이런저런 지시가 이어졌다.
덕분에 재인의 남자친구에 관련된 화제는 쏙 묻히고 말았다.
재인은 그제야 비로소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 * *
시간은 흘러 흘러 어느덧 팔순 잔치가 중반을 넘기고 있었다.
장기자랑이 한창이라 흥겨운 노랫가락과 춤으로 연회장의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다.
나희는 우진과 함께 텅 빈 주빈석을 지키고 있었다.
재인의 부모님과 우진의 부모님은 잔치의 흥을 돋우느라 자리를 비웠고, 재인은 연회장 뒤편에서 잡일을 돕느라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나희는 옆에 앉은 우진에게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우진 씨, 재인 씨랑은 사촌이니까 많이 친하겠네요?”
“별로요.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같이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거든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나희는 재인의 말이 우진에게 먹히지 않을 확률이 높아져 조금 안심이 되었다.
“사촌인데 왜요?”
“실은…… 재인이, 큰어머니가 입양한 아이예요.”
“뭐라고요?”
나희의 눈이 주먹만 해졌다.
“뭐, 나희 씨도 우리 집안사람이 되면 알게 될 테니까. 재인이 보육원에서 자라다 여덟 살 때 입양됐어요. 큰아버지가 종손인데, 대를 끊는 것도 모자라 물을 흐린다고 집안에서 엄청 반대했었죠.”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재인 씨가 참 힘들었겠어요.”
“그랬겠죠. 지금까지도 다들 탐탁지 않아하니까요.”
어쩐지 친척들한테도 무시당하는 것 같더라니.
나희는 겉으로는 안타까운 척했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하루 종일 짜증이 나서 혼났는데 뜻밖에도 이런 큰 수확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지금까지 우진에게서 캐낸 서재인에 대한 정보를 종합하면 이랬다.
고아였고, 여덟 살 때 입양됨.
할머니는 단식투쟁까지 해가며 입양을 반대했고, 당시 온 집안이 발칵 뒤집어짐.
아직도 집안에서는 재인을 인정하지 않음.
부모님은 변두리 동네에서 오래된 제과점을 운영하고 있음.
그마저도 재건축으로 곧 가게가 쫓겨나기 직전인 상태임.
집에 모아둔 재산 없음.
한마디로 별 볼 일 없음.
거기에 비하면 우진은 집안에서 수재로 통하며 떠받들여지는 존재였다.
우진의 여자친구인 나희도 덩달아 주목을 받을 정도로.
교육자 집안인 우진의 집은 상대적으로 재인의 집보다 경제력이 있었다.
나름 알부자인 할머니의 재산도 우진이 전부 물려받기로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우진은 일등 신랑감으로 꼽히는 전문직 의사가 아닌가.
이만하면 남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뭐야, 서재인. 애초에 나랑 게임이 안 됐잖아?’
나희는 내적 우월감이 마구 샘솟았다.
그동안 재인 때문에 도혁에게 무시당했던 설움이 단번에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재인의 남자친구라는 조현준의 존재 유무가 의심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뭐, 차도혁이 아닌 건 확인했으니까 그걸로 됐다.
‘서재인이 무시당하는 장면을 평생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꽤 재밌겠는데?’
나희는 눈치 없는 마마보이처럼 보였던 우진에게 슬쩍 마음이 기울었다.
‘오늘 밤, 못 이기는 척 넘어가 줄까?’
입꼬리가 한껏 치켜 올라간 나희를 보며 우진이 물었다.
“나희 씨.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요?”
“아니에요. 좀 피곤해서 쉬고 싶어서요.”
“그, 그래요? 그럼 끝나고 바로 쉬러 갈까요? 저도 많이 피곤해서.”
“네. 그게 좋겠어요.”
나희가 눈웃음을 치자, 우진이 헤벌쭉 웃으며 의뭉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단순하긴. 살짝 건드렸더니 아예 대놓고 티를 팍팍 내네. 우진 씨 어머니가 걱정되긴 하지만, 결혼해서 우진 씨만 잘 요리하면 괜찮을지도 몰라.’
나희는 망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 * *
이윽고, 팔순 잔치의 막바지에 이르러 본격적인 식사 시간이 이어졌다.
맛깔스러운 요리가 테이블 가득 채워졌다.
재인의 가족과 우진의 가족은 주빈석에 둘러앉았다.
신나게 춤을 추며 노래를 연거푸 세 곡이나 불렀던 할머니는 자리에 앉자마자 앓는 소리를 했다.
“에고, 힘들다. 이 나이 되니까 노는 것도 힘들구나.”
“할머님, 옛날에 혹시 가수 하셨어요? 어쩜 그렇게 노래를 잘하세요?”
나희의 입에 발린 칭찬에 할머니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의사 선생님이 역시 눈썰미가 좋네. 이렇게 예쁘고 싹싹한 아가씨를 고르다니. 이름이 ‘나희’라고 했던가?”
“네. 강나희예요.”
“아가씨는 참 복도 많아. 어디서 우리 우진이 같은 신랑감을 만나겠어?”
“그러게요. 제가 사주에 복이 많다고 하더니, 그게 우진 씨 만나는 거였나 봐요.”
나희가 간드러지게 웃었다.
그걸 지켜보는 재인은 나희의 내숭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동안 선본 의사가 결혼하자면서 귀찮게 매달린다고 할 땐 언제고?
“아이고, 노래를 많이 해서 그런가 목이 자꾸 타네.”
할머니가 물 한 컵을 쭉 비우더니 또 물을 찾았다.
공교롭게도 물통이 텅 비어 있었다.
“어머,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아가씨는 손님이니 앉아 있어.”
할머니는 나희를 끌어 앉히더니, 막 식사를 시작하려는 재인에게 말했다.
“재인아, 네가 물 좀 가져와라.”
“네?”
“오는 길에 식혜도 인원수대로 챙겨 오고.”
“아, 네…….”
재인이 일어나려고 하자 엄마가 재인의 팔을 붙들었다.
“어머님, 그런 건 서빙하는 직원한테 부탁하면 되잖아요. 한두 번도 아니고 왜 매번 재인이한테 시키세요? 가뜩이나 행사 돕느라 쉬지도 못했는데.”
“그럼 내가 가리? 그깟 거 그냥 재인이가 갔다 오면 되지 뭘 번거롭게 바쁜 종업원을 오라 가라 해? 몸뚱이 아꼈다 뭐 하려고?”
“어머님!”
작은엄마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형님, 오늘 어머님 생신이신데 별것 아닌 거 가지고 꼭 토를 다셔야겠어요?”
“별것 아닌 거? 그럼 우진이 네가 다녀와.”
엄마가 찌릿 째려보자 우진의 얼굴에 귀찮은 기색이 스쳤다.
“저 지금 한창 먹고 있는 중인데요.”
“아니, 왜 가만있는 우진이한테 그래? 내가 재인이한테 시켰지, 우진이한테 시켰냐?”
할머니의 차별이 하루 이틀도 아닌데, 오늘따라 엄마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
“어머님, 진짜 너무하시네요. 재인이한테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엄마. 제가 다녀올게요.”
털썩.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수습하려고 재인이 자리에서 일어선 그때.
재인의 어깨에 묵직한 무언가가 얹히더니, 자력에 이끌리듯 재인은 다시 제자리에 안착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재인은 그만 심장이 멎을 뻔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도혁이 그녀의 어깨를 잡은 채 씩 웃고 있었다.
혼자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처럼 눈부신 모습으로.
도혁은 멍하니 저를 쳐다보고 있는 여자 직원을 향해 말했다.
“여기 뭐 필요하신 게 있는 것 같은데, 좀 도와주시겠어요?”
“아, 네네.”
직원이 볼을 붉히며 황급히 달려왔다.
설마 정말 헬기 타고 온 건 아니겠지?
재인은 눈앞에 있는 도혁을 보고도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팀장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재인 씨가 보고 싶다고 했잖아요.”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아셨고요?”
“재인 씨, 내가 누굽니까? 다 방법이 있죠.”
재인 씨?
닿으면 녹아버릴 것 같은 따스한 눈빛에 다정다감한 목소리.
도혁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자상남 그 자체로 탈바꿈해 있었다.
쿡. 쿡.
엄마가 재인의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다.
“이 사람이 네 남자친구니?”
재인이 대답하기도 전에 도혁이 부모님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어머님, 아버님, 처음 뵙겠습니다. 재인 씨와 만나고 있는 차도혁이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재인이 엄마예요.”
“어머님, 말씀 편히 낮추세요.”
“그, 그럴까……?”
엄마는 친척들 앞에서 본인이 지른 것보다 훨씬 멋진 도혁을 보고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엄마뿐만 아니라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도 인기 연예인을 본 것처럼 넋이 나가 있었다.
딱 한 사람, 강나희만 빼고.
도혁을 보자마자 새파랗게 질린 나희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서 주임 남자친구가 팀장님이었어요?”
아, 맞다! 강 대리가 있었지!
재인은 그제야 흠칫 놀라 도혁을 쳐다봤다.
회사에 도혁과의 비밀 사내 연애가 소문나는 건 이제 시간문제였다.
머릿속이 하얘진 재인과 달리 도혁은 당황한 기색은커녕 오히려 여유가 흘러넘쳤다.
이미 멀리서 나희가 남자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어떤 상황인지 대충 짐작한 도혁이었다.
나희가 거듭 물었다.
“서 주임, 조금 전에 조현준 씨랑 사귄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머릿속이 하얘진 재인 대신 도혁이 대답했다.
“이런. 아직 비밀 연애 중이라 재인 씨가 적당히 둘러댄 건데, 딱 들켜버렸네요.”
“그럼 팀장님이랑 서 주임이랑 정말 사귄다는 거예요?”
“맞아요. 재인 씨와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습니다.”
“결혼이요?”
나희는 몽둥이로 뒤통수를 후려 맞은 기분이었다.
“네. 그런데 강 대리는 여기 어쩐 일입니까?”
“저, 저요?”
“옆에 계신 분은 남자친구?”
“아니…….”
목이 메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했던 나희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젠장.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