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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어쩜 이런 우연이 다 있어? (86/129)


86화. 어쩜 이런 우연이 다 있어?
2023.03.28.


두근.

재인은 하마터면 ‘네!’ 하고 외칠 뻔했다.

하지만.

서울이랑 광주가 무슨 옆 동네도 아니고.

재인은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다.


“네네, 그 얼굴 제가 차암 좋아하긴 하죠. 그래도 내일이면 보니까 꾹 참아볼게요.”

“그때까지 내가 못 참겠는데? 헬기 바로 띄울까?”

“됐거든요.”

차도혁 씨, 농담도 참 스케일이 크십니다.

재인이 어이없어하는 그때, 엄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인아, 잠깐 카운터 좀 봐줄래?”

때마침 밀려든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엄마가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팀장님, 저 바빠서 가봐야겠어요. 나중에 다시 통화해요!”

“응. 이따 연락할게.”

“네.”

재인은 황급히 전화를 끊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 * *



“오빠, 식사 중에 몰래 빠져나가더니 여기 있었어?”

언제 왔는지 연지가 팔짱을 낀 채 등 뒤에서 도혁을 지켜보고 있었다.

도혁은 서재 앞 중정이 보이는 창가에서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서 있었다.


“어. 잠깐 전화할 데가 있어서.”

“여자친구구나?”

“응.”

도혁은 대답해놓고도 쑥스러워 얼굴을 붉혔다.


“어머, 얼굴 빨개진 것 좀 봐. 재인 언니한테 아주 푹 빠지셨네.”

“시끄러워.”

“근데 재인 언니는? 지금 오빠 집에 혼자 있어?”

“부모님 댁에 내려갔어.”

“맞다, 언니 부모님 댁이 광주였지. 우리 오빠, 집이 텅 비어서 엄청 허전하겠네?”

“허전은 무슨. 내일이면 오는데.”

갑자기 연지가 실눈을 뜨고 도혁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근데 오빠, 오늘따라 얼굴이 환한데 어제 뭐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굉장한 일이 있긴 했지.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연지의 말에 도혁은 제풀에 찔려 헛기침을 했다.


“흠흠. 일은 무슨. 내 일에 신경 꺼.”

“일등공신을 이런 식으로 대접하다니 섭섭한데? 나 아니었으면 재인 언니랑 아직도 팀장과 주임 사이였을 거면서.”

도혁은 저도 모르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럴 확률이 99 퍼센트였을 테니.

그 모습에 연지가 박수까지 치며 킥킥 웃었다.


“와, 진짜 내가 아는 차도혁 맞아?”

“차도혁? 이제 대놓고 기어오르네, 이연지?”

“이런 게 사랑의 힘이구나. 놀랍다, 놀라워!”

아예 귀까지 새빨개진 도혁은 애써 침착한 척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상 주세요. 큰 거 안 바라고, 언제 재인 언니랑 같이 맛있는 거 사줘.”

“안 돼. 너 과거니 뭐니 또 이상한 소리 할 거잖아.”

“오빠 과거 뭐?”

연지가 고심하듯 눈동자를 굴리더니 줄줄이 읊기 시작했다.


“중2병 걸려서 가출했던 거? 아님 영화관에서 몰래 울다 나한테 걸린 거? 아, 학교 앞에서 기다리는 여자들 피하려고 담 넘다가 떨어져서 다리 깁스한 일도 있었지. 그리고…….”

“아, 알았어! 대신 서재인 씨한테 예전 얘긴 절대 하지 마.”

도혁이 기겁하며 뜯어말리자 연지가 생긋 웃었다.


“그거야 오빠 하기 나름이지. 출근하면 재인 언니랑 뭐 먹을지 상의해봐야지.”

“일할 때나 그렇게 열심히 하지 그래?”

“근데 할아버지 반대는 어떻게 할 거야? 아직도 세정 언니랑 결혼시키고 싶어 하시는 것 같은데.”

“걱정 마. 서재인 씨는 무조건 내가 지킬 거니까.”

“당연히 그러셔야죠. 나도 응원할게.”

“연지야.”

도혁은 잠시 뜸을 들이다 씩 웃으며 말했다.


“고맙다.”

연지는 얼굴에 웃음꽃이 가득 핀 도혁을 보자 가슴이 뭉클해졌다.

일에만 파묻혀 삭막하게 사는 도혁이 늘 안타까웠던 연지였다.

우리 오빠, 행복해져서 정말 다행이다.


“오빠, 그만 들어가자. 다들 찾으시겠어.”

연지는 눈시울을 슬쩍 닦으며 도혁의 팔을 잡아끌었다.

두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서재 문이 스윽 열렸다.

서재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바로 도혁의 사촌 동생인 진혁이었다.

조금 전, 화장실에 다녀오던 진혁은도혁이 통화하며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 급히 서재에 몸을 숨겼었다.


‘도혁이 형이 여자랑 동거를 한다고?’

사생활이 깨끗하다 못해 아무것도 캘 게 없기로 소문난 그 차도혁이?

이거야말로 특종 중의 특종이네.

진혁은 도혁과 연지의 대화를 천천히 곱씹었다.


‘정리하자면, 도혁이 형이 팀에 있는 주임이랑 비밀리에 사내 연애에 동거까지 한다는 건데……. 이름이 ‘서재인’이었지?’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보육원 봉사도 그 여자와 같이 간 게 분명했다.

도혁이 왜 생전 안 하던 짓을 하나, 싶었는데 비로소 의문이 풀렸다.


‘역시 세정이 말대로 여자가 있었어. 할아버지가 반대하신다는 걸 보면 할아버지도 이미 알고 계신다는 건데, 그러면서 시치미를 뚝 떼시다니…….’

어제 낮, 도혁에게 여자가 있다고 했을 때 차 회장이 펄쩍 뛰던 걸 생각하자, 진혁은 배신감마저 들었다.


‘도혁이 형을 감싸려고 그러시는 건가? 세정이랑 어떻게든 결혼시키려고?’

도혁에게 여자가 있다며 씁쓸해하던 세정이 마냥 안쓰럽게 느껴졌다.

진혁은 굳은 얼굴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누구 좀 알아봐 줘야겠어.”

 

* * *

재인은 엄마 아빠와 함께 팔순 잔치 20분 전에 프라자호텔 연회장에 도착했다.

고모와 함께 먼저 도착한 할머니는 이미 단장을 마치고 대기실에서 심기 불편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팔순의 나이에도 기세등등하고 정정한 모습이었다.

재인은 활짝 웃으며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할머니, 저 왔어요. 생신 축하드려요.”

“아니,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명색이 너희가 큰집인데, 젤 먼저 와서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지.”

“죄송해요. 가게 일 마무리 짓고 오니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그래도 안 늦어서 다행이에요.”

“됐어. 노인네를 기다리게 하고 말이야. 큰일 앞두고 있으면 일을 미리미리 끝냈어야…….”

잔소리를 시작하려는 할머니를 엄마가 막고 나섰다.


“손님이 너무 많아서요. 어머님, 동서는 왔어요?”

도둑도 제 말하면 온다고, 때마침 등 뒤에서 요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우리 어머님 어쩜 이렇게 고우세요?

작은엄마가 달려와 할머니를 와락 끌어안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렇게 꾸미고 계시니 10년은 젊어 보이세요. 이제 칠순이신 줄 알겠어요.”

“그래 보이냐? 돈 들인 보람이 있네. 우진 에미야,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다.”

할머니는 입이 찢어져라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또 시작됐구나.

재인과 엄마는 서로를 쳐다보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마음의 준비를 했다.


“어머, 아주버님이랑 형님도 계셨어요?”

작은엄마는 그제야 발견했다는 듯 재인 일행을 쳐다보며 인사했다.


“재인이도 오랜만이다?”

“안녕하세요.”

“형님, 그 잘나간다는 재인이 남자친구는 어디 있어요?”

작은엄마가 그럼 그렇지, 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바빠서 못 왔대.”

“아아, 그렇구나아아.”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는 것이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엄마가 발끈하며 받아쳤다.


“진짜야! 정초라 바쁠 만도 하지.”

“누가 뭐래요? 재인아, 내가 너어무 궁금해서 그러는데, 사진 좀 보여줄래?”

“네? 사진이요?”

갑작스러운 요청에 재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진이라면 몇 장 있긴 했다.

도혁이 사진 찍는 걸 좋아하지 않다 보니, 보육원 아이들과 찍은 사진들과 회식 때 다른 직원들이 찍어준 사진들이 대부분이지만.


‘제대로 나온 게 있으려나…….’

재인이 머뭇거리자 엄마가 옆구리를 찌르며 재촉했다.


“재인아, 뭐해? 어서 보여주지 않고.”

키도 엄청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친구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재인의 말을 들은 후, 이제 거칠 것이 없어진 엄마였다.

할머니도 미심쩍은 눈빛으로 재인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 잠깐만요.”

하긴. 차도혁 씨는 아무렇게나 찍어도 화보니까.

재인이 뒤늦게 허둥지둥 휴대전화 사진첩을 뒤적거리던 그때였다.

갑자기 할머니가 화색이 도는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이구, 우리 의사 선생님 오셨어요?”

“할머니, 생신 축하드려요.”

우진이 재인의 앞을 막아서며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그래, 그래. 환자들 돌보느라 바쁠 텐데 와줘서 고맙다.”

“할머니 팔순 잔치인데 당연히 제가 와야죠.”

“아무렴. 우리 집안 최고 인물인데 네가 빠지면 섭섭하지. 우리 우진이 보니까 내가 기운이 펄펄 나는 것 같구나!”

이미 재인의 남자친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할머니였다.


“아고, 우리 의사 양반 왔구나. 못 본 새에 얼굴이 더 좋아졌네?”

“우진아, 오랜만이다. 숙모 기억하지?”

재인은 우진을 반기는 친척들 등쌀에 떠밀려 멀리 뒷전으로 밀려났다.

재인에게는 늘 벌어지는 익숙한 일이었다.

우진은 집안 종손에 과학고를 거쳐 일류대를 나온 데다, 직업까지 의사라 어렸을 때부터 집안사람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아왔다.

반면, 재인은 학창시절 일등을 했을 때도, 일류대에 들어갔을 때도, 대산F&G에 입사했을 때도, 핏줄도 아니면서 잘난 척한다고 뒷말이 나오거나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오늘따라 새삼 서러움이 올라와 씁쓸함을 감출 수 없는 재인이었다.


“할머니, 소개할 사람이 있어요.”

우진이 뒤쪽을 돌아보며 손짓했다.

그러자 곱게 단장한 나희가 조신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제 여자친구예요.”

“할머님, 안녕하세요.”

“아이구, 와줘서 고마워요. 이렇게 예쁘고 참한 아가씨가 우리 우진이 짝이라니. 역시 보는 눈이 있구나.”

“별말씀을요.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나희가 다소곳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뒤늦게 서로를 발견한 재인과 나희가 소스라치게 놀라 동시에 소리쳤다.


 


“서 주임?”

“강 대리님?”

사색이 된 두 사람은 입을 쩍 벌린 채 건드리면 툭 튀어나올 것처럼 커진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럼 강나희가 그때 선봤다는 의사가 우진 오빠였어?’

말도 안 되는 일이 많이도 일어나는구나.

재인은 나희와 가족으로 엮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작은엄마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한데 강나희랑 쌍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나희는 나희대로 생각이 많아졌다.

가뜩이나 오고 싶지 않은 자리에 억지로 끌려왔는데 눈엣가시 같은 서재인이 우진의 사촌 동생이라니.

있는 내숭 없는 내숭 다 떨고 있는 마당에 재인이 제 실체를 까발리기라도 할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진짜 이 보험, 지금이라도 깨버려야 하는 거 아니야?’

갈등하는 나희의 속도 모르고 작은엄마가 재인과 나희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나희 씨, 재인이랑 같은 회사라고 하길래 설마설마했는데, 둘이 아는 사이였어요?”

“네. 서 주임이랑 같은 부서에서 일해요.”

“세상에! 어쩜 이런 우연이 다 있어? 나희 씨가 대리니까, 그럼 재인이가 나희 씨 부하 직원이라는 거네요?”

“그렇죠.”

호호호호.

작은엄마의 승리에 도취된 웃음소리가 천장을 때렸다.

작은엄마는 그동안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엄마를 이기려고 안달을 냈었다.


“형님, 세상 참 좁네요, 그죠?”

“대리나 주임이나 한 끗 차이인데, 별것 아닌 거 가지고 재긴.”

콧방귀를 뀌긴 했지만 씁쓸한 표정은 숨길 수 없는 엄마였다.

살벌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아빠와 작은아빠는 감히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지켜만 보고 있었다.

섣불리 개입했다가는 엄청난 불똥이 튄다는 걸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작은엄마의 불똥이 재인에게 튀었다.


“참, 재인이 너 남자친구 사진 보여준다고 하지 않았니?”

“서 주임, 남자친구 있었어요? 설마 팀장님?”

재인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말을 들은 나희가 엉겁결에 속내를 드러내 보이고 말았다.

간이 철렁 내려앉은 재인은 펄쩍 뛰었다.


“아니에요!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요.”

“그럼 누군데요?”

“아…….”

그러게. 누굴까?

말문이 막힌 재인의 이마에 식은땀이 주루룩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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