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오늘 아주 작정을 했구나 (85/129)


85화. 오늘 아주 작정을 했구나
2023.03.25.



 
재인은 흠칫 놀라 두 눈을 비비고 감았다 다시 떴다.

눈을 똑바로 뜨자, 언뜻 본 듯했던 나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아, 잘못 봤구나.’

회사에서 마주치는 것도 피곤한 강나희인데 하다 하다 환각까지?

재인은 피식 웃고는 코트를 목까지 끌어 올리고 다시 잠을 청했다.

* * *



‘아휴, 내가 왜 새해 첫날, 그것도 황금 같은 연휴에 얼굴도 모르는 노인네 팔순 잔치에 가야 하지?’

나희는 생각할수록 짜증이 났다.

게다가 우진이 당일치기는 피곤하다고, 내려온 김에 좋은 곳에 데려가겠다고 밀어붙여서 꼼짝없이 내일까지 광주에 묶여 있게 생겼다.


‘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 아니야?’

나희는 옆자리에서 싱글벙글 웃고 있는 우진을 슬쩍 쳐다봤다.

우진은 나희가 허락하기도 전에 팔순 잔치가 열리는 프라자호텔에 그녀가 묵을 방을 미리 예약해놨었다.

그러고 보니 방도 디럭스룸에 침대는 퀸사이즈였다.


‘오늘 아주 작정을 했구나.’

나희는 속으로 혀를 찼다.

상대가 차도혁이라면 얼마나 반가웠을까, 생각하면서.

샤프하면서도 남성미 넘치는 도혁의 수려한 이목구비가, 상대적으로 평범하기 짝이 없는 우진의 얼굴 위로 겹쳐 지나갔다.

그 갭이 너무 커서 속이 쓰렸다.

아직도 도혁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어 우진을 볼 때마다 저도 모르게 자꾸 비교하게 되는 나희였다.


‘팀장님이랑 서재인, 정말 뭔가 있는 건가?’

분위기가 그런 것 같긴 한데.

그러나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다.

게다가 재인은 옆 팀 나민우 팀장과 양다리를 걸친 데다, 다른 남자와 극장 데이트까지 즐겼다.

자신보다 뭐 하나 잘난 것 없어 보이는 서재인의 무엇에 남자들이 끌리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희 씨, 이것 좀 먹어봐요.”

그녀의 속도 모르고 우진이 불쑥 귤을 내밀었다.

나희는 귤을 받아들며 생긋 웃었다.


“고마워요.”

“같이 가줘서 내가 고맙죠. 나희 씨 보면 우리 할머니랑 친척들이 엄청 좋아하실 거예요.”

“근데 우진 씨 할머니는 어떤 분이세요?”

“엄청 따뜻하고 정이 넘치는 좋은 분이에요. 우리 엄마처럼요.”

“아…….”

나희는 싸늘했던 우진의 엄마 이정숙이 떠올라 말문이 막혔다.

이런 모지리가.

과학고에, 의대 차석에, 대학병원 레지던트라 똑똑한 줄로만 알았더니.

눈앞의 우진이 이렇게까지 눈치 없고 미련해 보일 수가 없었다.


‘이거, 그동안 넣은 거 다 포기하고 지금이라도 보험 해약해야 하는 거 아냐?’

나희는 오늘, 광주행 KTX 안에서 선택의 기로에 서고 말았다.

* * *

새해 첫날, 다 같이 모여 점심식사를 하는 것이 대산 일가의 전통이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라면 직계 가족 전원이 출석해야 했다.

도혁은 다른 이들보다 1시간 일찍 본가를 찾았다.

결혼에 관한 일로 차 회장과 담판을 짓기 위해서였다.

어제저녁 차 회장이 재인을 찾아와 난리를 치고 간 뒤로 벼르고 벼렸던 순간이었다.


“저 왔습니다.”

“왔냐.”

거실에서 마주친 차 회장과 도혁은 짧은 인사를 끝으로 묵묵히 서로를 쳐다봤다.

마치 결전을 앞둔 무사들처럼.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차 회장이었다.


“서재인에 대한 얘기라면 더 할 말 없다.”

“전 그 얘기가 아니면 할 말 없습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그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도혁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차 회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런 미친놈!”

“어떻게 아셨어요? 저 서재인한테 미쳐서 회복불능 상태입니다.”

이젠 말장난까지?

차 회장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지금 말하고 있는 게 무뚝뚝했던 그 도혁이가 맞나?


“흠흠, 그래, 얘기나 들어보자. 대체 그 아가씨 어디가 그렇게 좋냐?”

“전부 다요.”

“단단히 돌았군.”

쯧.

차 회장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도혁이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당황한 차 회장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할아버지, 저 지금까지 오로지 대산그룹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살아왔습니다.”

“그런 놈이 이런 짓을 벌여?”

“그러니까, 딱 한 가지만 제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세요.”

“그게 뭔데?”

“결혼만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고 싶습니다.”

사랑 같은 소리하고 있네.

차 회장의 눈에는 도혁이 감정놀음에 놀아난 유약하기 짝이 없는 풋내기로 비쳤다.

도혁을 대산그룹을 이끌 후계자로서 이성적이고 강인하게 키웠다고 자신해왔던 차 회장은 그간의 자부심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차 회장은 한발 물러나 도혁을 회유했다.


“이런, 내가 너무 결혼을 서둘렀구나. 그럼 세정 양과 천천히 연애부터 시작하자꾸나.”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전 서재인 씨 아니면 평생 결혼 안 하고 죽을 때까지 혼자 살 겁니다.”

“뭐? 그게 할애비 앞에서 할 소리냐?”

도혁은 차 회장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할아버지, 외람되지만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할아버지는 사랑하는 사람과 살아보셨습니까?”

“……!”

차 회장은 말문이 막혔다.

일찍 상처한 도혁의 할머니를 파트너로서 존중하긴 했지만, 사랑보다는 의리나 정에 가까웠다.

어차피 집안에서 맺어준 결혼이었고, 차 회장의 신경은 온통 대산그룹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아내가 먼저 가고 나서는 몇 명인가 애인을 두었지만 모두 오래가지 못했었다.

차 회장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자, 도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이해 못 하시는 겁니다. 제가 왜 이러는지.”

“이놈이! 암튼, 서재인은 안 된다!”

“이유가 뭡니까?”

“이미 잘 알고 있을 텐데? 근본도 모르는 고아 출신에 집안도 별 볼 일 없으니까. 그런 아내를 얻으면 주변에서 비웃음을 사고 대산그룹 얼굴에 먹칠을 할 거다.”

재인을 깔아뭉개는 말에 도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천박한 부류가 뭐라고 떠들든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제 인생이니까요.”

“서진물산은 우리 대산에 지분이 두 번째로 많은데, 혹시라도 나쁜 마음을 먹으면 어떻게 할 거냐? 대표 자리를 위협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죽고 나서도 도혁이 대산그룹을 안정적으로 이끌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두는 것.

그것이 차 회장의 숙원이었다.

그래서 도혁과 세정의 결혼을 어떻게든 밀어붙여서 서진물산을 붙잡아 두고 싶었다.


“다른 주주들을 꽉 잡으면 됩니다. 실력으로 증명해 보일 수 있습니다.”

“세정 양같이 참한 상대를 두고 대체 왜 그런…….”

“할아버지가 서재인 씨를 직접 겪어보시면 아실 걸요?”

“그럴 일 없다!”

순간, 도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좋습니다! 그럼 저랑 내기하시죠.”

“내기?”

“네. 딱 한 달만 서재인 씨를 받아들여 주세요. 한 달 뒤에도 안 된다고 하시면 서재인 씨 깨끗이 포기하겠습니다.”

“정말이냐?”

“네.”

차 회장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갑작스럽긴 하지만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한 달 뒤라고 서재인이 고아에 별 볼 일 없는 집안이라는 조건이 바뀌는 건 아닐 테니까.

게다가 이런 식으로 반대해봤자, 오히려 두 사람을 부채질하는 꼴이 될 것만 같았다.

그러다 도혁이 막 나가서 애라도 가지고 오면?

그거야말로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이윽고, 차 회장이 입을 열었다.


“좋다! 대신 공증을 받자. 뭐든 정확해야 하니까.”

“당연히 그러셔야죠.”

“그때 가서 딴말하지 마라.”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고얀 놈, 한 마디도 안 지네.”

“할아버지를 닮았으니까요.”

일가에서 차 회장을 가장 쏙 빼닮은 도혁이었다.

차 회장은 문득 아들 차인환이 사고로 죽고 며느리인 도혁의 어미가 떠났을 때.

그 텅 빈 집에 처음으로 어린 도혁과 둘만 남겨졌을 때가 생각났다.

도혁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울음을 꼭 참느라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그 눈물 많던 아이가 의젓하게 커서 자신의 의지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래, 넌 나랑 많이 닮았지.”

차 회장이 말에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 * *

재인이 부모님의 제과점에 도착한 건 점심때가 한참 지나서였다.


“엄마, 아빠, 저 왔어요.”

“재인이 왔어? 아우, 예쁜 우리 딸 오느라 고생했다.”

엄마가 한달음에 달려 나와 재인을 덥석 안았다.


“밥은?”

“그냥 기차에서 대충 먹었어요.”

“이그, 얼굴이 반쪽이 됐네. 아직 시간 좀 있으니까 옆에 식당 가서 든든하게 먹어 둬.”

“괜찮아요. 배 안 고파요.”

엄마가 재인의 뒤편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근데…… 너 혼자야?”

“네?”

“아니, 혹시나 해서…….”

엄마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왜 이래, 우리 재인이도 만나는 사람 있어! 키도 엄청 훤칠하고 잘생겨서 우진이는 그 사람 옆에 서면 보이지도 않을걸? 진짜 잘나가는 멋진 남자야! 부자에 직업도 좋아.」

이번 팔순 잔치에는 재인이가 어마어마한 스펙의 남자친구를 데려올 거라며 친척들 앞에서 큰소리를 쳤으니 뒷감당이 두려울 만도 했다.

풋. 재인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엄마, 저 남자친구 있어요.”

“정말?”

갑자기 엄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재인은 처음 생긴 남자친구이니만큼 엄마의 얼굴을 보고 직접 말씀드리고 싶어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네, 정말이에요.”

“얘는 그걸 왜 이제야 얘기하니?

“사귄 지 얼마 안 됐어요.”

“근데 왜 같이 안 왔어?”

“다른 일정이 있어서요.”

“그랬구나. 하긴, 새해 첫날이니. 뭐 하는 사람이야?”

“그게…… 회사원?”

팀장이니 회사원 맞지.

도혁에 대해 있는 그대로 말하자니 일이 커질 것 같아서 대충 둘러댔다.


“암튼 잘했다, 잘했어! 우리 예쁜 딸이 뭐가 부족해서 연애를 안 하나 했는데 드디어 애인이 생겼구나.”

“뭐, 애인?”

제빵실에서 뒤늦게 뛰쳐나온 아빠가 깜짝 놀라 외쳤다.

재인은 오랜만에 보는 아빠에게 달려가 안겼다.


“아빠, 보고 싶었어요.”

“여보, 우리 재인이 애인 생겼대요.”

“아아, 그렇구나…….”

아빠의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엄마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당신 왜 그래요?”

“갑자기 재인이를 뺏긴 기분이 들어서.”

“어이구, 덩치는 산만 해가지고. 그럼, 재인이 평생 끼고 살려고 했어요?”

“그건 아니지만……. 너무 빠르지 않나?”

“빠르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팔순 잔치 가려면 어여 정리해요. 이러다 늦겠어요.”

엄마가 핀잔을 주며 아빠의 등을 떠밀었다.

언제 봐도 다정한 부모님의 모습에 재인은 새삼 감사함을 느꼈다.

Rrrrrrr. Rrrrrrr.

그때, 재인의 가방 안에서 휴대전화 벨소리가 들려왔다.

[차도혁 팀장님]

재인은 반가운 마음에 냉큼 가게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팀장님, 어쩐 일이세요?”

―잘 내려갔어?

“네.”

―다행이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도혁의 목소리가 왠지 애틋하게 느껴졌다.


“팀장님은 할아버님이랑 얘기 잘하셨어요?”

―응. 만나면 얘기해줄게.

“다행이네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휴대전화에서 도혁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팀장님, 괜찮으세요?”

―어.

“지금 뭐 하세요?”

―서재인 씨 생각.

그 짧은 한마디가 재인의 가슴을 일렁이게 했다.


“어쩌죠?”

―뭐가?

“팀장님이 보고 싶어서요.”

쿡쿡.

저쪽에서 도혁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내 매력에 푹 빠졌군.

“그런가 봐요.”

도혁이 꿈을 꾸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얼굴 볼까? 서재인 씨가 좋아하는 내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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