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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나랑 가볍게 즐기는 거였어? (84/129)


84화. 나랑 가볍게 즐기는 거였어?
2023.03.21.


부탁?

도혁의 눈빛이 사뭇 진지했다.


“뭔데요?”

“내게 조금만 더 시간을 줘.”

“무슨 시간이요?”

“할아버지를 설득할 시간. 서재인 씨를 받아들이게 만들 거야.”

“쉽지 않을 걸요. 할아버님은 서진물산 윤세정 씨를 마음에 두고 계신 것 같던데…….”

재인은 줄곧 마음에 걸렸던 이름을 드디어 입 밖으로 꺼냈다.

세정의 이름을 듣자 도혁의 얼굴이 굳었다.


“역시 할아버지가 그것까지 얘기하셨군. 할아버지가 멋대로 그러시는 것뿐이니까 신경 쓰지 마.”

“그래도…….”

“무슨 일이 있어도 할아버지를 설득할 테니까, 그때까지만 기다려줘.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네, 그럴게요.”

불안했던 재인의 마음 한구석에 비로소 평온이 찾아왔다.

도혁이 다독이듯 재인의 볼을 어루만졌다.


“서재인 씨, 괜한 걱정을 했구나. 어제 무슨 말을 들었든 우리 할아버지 너무 미워하지 말아줘. 부모님 대신 날 키워주신 분이니까.”

그 짧은 몇 마디 말에서 할아버지에 대한 도혁의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재인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도혁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도 서재인 씨를 제대로 알면 분명 마음에 들어하실 거야. 좀 많이 괴팍하고 심한 말을 하실 때도 있지만, 우리 할아버지 알고 보면 꽤 좋은 분이거든.”

부디 그런 날이 오기를 재인은 마음속 깊이 간절히 바랐다.


“잠깐. 그러고 보니 어제 한 말 진심이야?”

“무슨 말이요?”

“어제 할아버지한테 결혼 생각 없다고 한 말.”

아, 그거.

다시 생각해도 너무 화끈하게 질러버렸네.

재인은 나중에 어떻게 수습해야 할 지 난감했다.


“난 보수적이라 결혼할 여자 아니면 안 만나는데?”

“결혼이요? 아직 사귄 지 보름도 안 됐는데 무슨…….”

그의 입에서 ‘결혼’이라는 말이 나오자 재인은 심장이 벌렁거렸다.

도혁이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리며 물었다.


“서재인 씨, 나랑 가볍게 즐기는 거였어?”

“아, 아니요!”

“그럼 결혼할 거야?”

“네?”

“바로 대답 못 하는 걸 보니 역시, 그냥 내 얼굴이 마음에 들어서 가볍게 즐기는 거였군.”

 

 
어떻게 선택지가 ‘결혼한다’ 아니면 ‘가볍게 즐긴다’뿐이야?


“팀장님, 그냥 평범하게 사귀다가 괜찮으면 결혼한다는 선택지는 없어요?”

“없어. 난 확실하지 않은 곳엔 투자하지 않거든.”

그거야말로 비즈니스 결혼이네.

재인을 할 말을 잃었다.

차도혁을 누가 말려.


“네네, 부디 좋은 곳에 투자하시길 바라요.”

“어딜 내빼려고?”

“네?”

“어제 밤새 도장 쾅쾅쾅 찍었으니까 서재인 씨가 날 책임져야지. 아니면 나, 늙어서까지 독거노인으로 혼자 지낼 거야.”

도혁은 일부러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아, 정말이지!

재인은 달뜬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도혁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가만히 귓가에 속삭였다.


“책임……질게요.”

“그래야지.”

도혁은 그제야 만족스럽게 웃으며 재인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

그때, 갑자기 재인이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더니 손뼉을 부딪쳤다.


“아, 참! 깜박 잊고 있었어요.”

“뭘?”

어리둥절해하는 도혁에게 재인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팀장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아…….”

귀여워 죽겠네.

도혁은 재인의 팔을 홱 당겨 제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의 입에서 행복에 겨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미 넘치게 받았어.”

 

* * *

같은 날, 새해 첫날 아침.

성준은 차대산 회장의 자택을 찾았다.

집사의 안내에 따라 차 회장의 서재에 들어선 성준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해 눈이 퀭했다.

어제저녁, 성준은 차 회장의 지시에 어쩔 수 없이 따르기는 했지만, 힘들어하는 재인을 지켜보는 게 너무 괴로웠었다.

가뜩이나 재인은 사랑하는 유라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몹쓸 짓을 한 것 같은 죄책감이 도무지 떨쳐지지 않았다.

성준은 서재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차 회장을 마주 보고 섰다.


“그래, 할 말이 뭔가?”

성준은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말했다.


“회장님, 본의 아니게 회장님을 속여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사과라면 어제 지겹게 들었으니 됐네.”

아직도 화가 단단히 난 목소리였다.

성준은 차 회장의 책상 위에 하얀 봉투를 내려놓았다.


“회장님, 이걸 드리려고 왔습니다.”

“이게 뭔가?”

“사직서입니다.”

차 회장이 놀란 눈으로 성준을 쳐다봤다.


“자네, 내가 어제 뭐라고 좀 했다고 시위하는 겐가?”

“아닙니다. 그동안의 불미스러운 일로 심려를 끼쳐드린 것에 대해 책임을 지려는 겁니다.”

“허, 참. 됐네. 내 이번엔 큰맘 먹고 용서해줄 테니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 없게 하겠다고 약속하게.”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런 약속은 드릴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도혁의 이번 일만 제외하면 그동안 차 회장의 뜻을 충실히 따랐던 성준이었다.

차 회장은 성준의 단호한 태도에 적잖게 놀랐다.


“자네, 지금 뭐 하자는 게야?”

“도련님께는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후임 구하고 인수인계가 끝나는 대로 물러나겠습니다. 그동안 회장님께 받은 은혜를 이렇게 갚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그건 안 돼! 괘씸하기는 하지만 자네만큼 믿을 만한 사람이 어디 있나. 사람이 한 번은 실수할 수도 있지.”

“한 번 무너진 신뢰는 원래대로 회복할 수 없다는 것, 누구보다 제가 잘 압니다. 그래서 밤새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이니 받아주십시오.”

성준이 물러서지 않자, 차 회장은 회유하듯 웃으며 물었다.


“자네, 내가 괜찮다는데 그만두려는 이유가 뭔가?”

“도련님이 행복하시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럼 더 도혁이 옆에서 도와야지. 그만두면 쓰나?”

“회장님이 바라시는 대로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밖에서 도련님을 마음껏 응원하기로 했습니다.”

“뭐야?”

차 회장의 눈빛이 날카롭게 돌변했다.

성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제가 도련님을 옆에서 지켜본 지 올해로 20년입니다. 요즘처럼 행복해 보이는 모습은 처음입니다. 이게 다 서재인 씨 덕분입니다.”

재인의 이름이 나오자 차 회장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회장님, 도련님을 정말 위하신다면, 서재인 씨를 받아들여 주십시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겐가? 어디 그런 볼품없는 여자를 도혁이한테 갖다 대!”

차 회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회장님, 지난해 통틀어 도련님이 웃는 걸 몇 번이나 보셨습니까?”

“…….”

갑작스러운 질문에 차 회장은 말문이 막혔다.

생각해보니 도혁은 평소에도 웃은 적이 거의 없었다. 손에 꼽을 정도로.

워낙 무뚝뚝한 성격에 일 얘기 외에는 거의 말이 없는 도혁이라 그러려니 했었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서재인 씨랑 있으면 도련님의 웃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혼자 있을 때도 웃으십니다.”

“바보 같은 놈. 그깟 여자 하나 때문에.”

차 회장은 성준의 말에 놀랐으면서도 재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성준은 차 회장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힘주어 말했다.


“외람되지만, 제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합니다. 서재인 씨는 인품이 바르고 심성도 고운 사람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도련님을 행복하게 해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서재인 씨와 도련님 서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도혁이는 후계자야. 그런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려서야 어떻게 대산그룹을 이끌 수 있겠나?”

“후계자이기에 앞서 한 남자입니다.”

차 회장은 더는 듣고 싶지 않아 손사래를 쳤다.


“그런 소리는 됐네. 서진물산과의 혼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자네도 알지 않은가? 입장 바꿔 생각해보게. 세정 양처럼 참한 아가씨를 두고 내가 태생도 모르는 고아를 손주 며느리로 맞고 싶겠나?”

“…….”

“고아 출신이라고 손가락질받을 게 뻔한데. 집안도 별 볼 일 없고,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어야지.”

그 뒤로도 차 회장의 불평은 한참을 이어졌다.

이윽고 성준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제가 그만둘 수밖에 없는 겁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성준은 깊숙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홀로 남겨진 차 회장은 멍하니 성준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다.

뒤이어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서재인이 뭐 그리 특출 나길래 이렇게까지?’

 

* * *

그즈음 재인은 광주행 KTX를 타기 위해 기차역 플랫폼에 서 있었다.

새해 첫날에 주말까지 이어지는 연휴라 그런지 여기저기 치일 정도로 여행객들이 많았다.

유라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재인이 막 광주행 KTX에 올랐을 때였다.


“어, 유라야.”

―재인아, 괜찮아?

대뜸 유라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차 팀장님네 할아버지가 들이닥쳤다며? 심한 말도 하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았어?”

재인은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김 실장님한테 들었지.

“뭐? 너 김 실장님이랑 자주 연락하는 사이야?”

―아…… 우리 그냥 친구 같은 사이야. 저얼대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유라가 정색을 하자 재인은 콧방귀를 뀌었다.


“뭐래. 그런 생각 전혀 안 했거든.”

―아, 아무튼. 너 괜찮은 거야?

“괜찮아. 반대야 당연한 거지, 뭐. 그 정도 각오는 했었어.”

말은 그렇게 했어도 현실적인 벽을 생각하자 재인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좀 높아야지.


―대산그룹 별거 아니야! 서재인, 자신감을 가져! 홧팅!

맞아.

고작 계열사가 십여 개에 연매출이 수십 조인 대기업 나부랭이일 뿐이지.

남의 일이라고 참 쉽게 얘기한다.


“암튼, 응원 고맙다.”

―근데 그 난리를 치르고 모임에 또 간 거야?

“응?”

―너 차 팀장님이랑 동아리 선배 홈파티 간다고 했잖아.

“아…….”

서연 언니와 민우 선배의 홈파티에는 결국,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다.

아쉬워하는 두 사람에게 미안해서 혼났다.


“피곤해서 그냥 집에서 쉬었어.”

―그럴 만도 하지. 연말 기분도 안 났겠다.

“그랬지, 뭐.”

갑자기 유라가 킥킥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에구, 우리 불쌍한 차 팀장님은 또 밤새 목탁 소리만 들었겠구나? 서재인이가 너무했네.

뜨끔.

그런 걸로.

재인은 황급히 말을 돌렸다.


“유라야, 나 기차 안이라 통화 오래 못 해.”

―아, 팔순 잔치 내려가는 길이겠구나. 호텔에서 한다고 했었지?

“응. 프라자호텔.”

―무사히 잘 다녀와. 너무 참지 말고. 너 그러다 화병 생긴다?

“알아서 잘할 테니까 걱정 마.”

유라가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말은 잘하지. 친척들 만나고 오면 맨날 얹히면서. 내가 언제 한번 가서 신나게 뒤집어 버릴까 보다.

“됐네요. 다녀와서 연락할게.”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해!

“알았어.”

재인은 전화를 끊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오늘은 별일 없이 지나가기를.

역시 친척들 모임에 가는 건 큰맘을 먹어야 하는 일이었다.

도혁에게는 그냥 부모님을 만나러 집에 다녀온다고만 해뒀다.

팔순 잔치라고 하면 신경 쓸 게 뻔하니까.


‘팀장님이 진짜로 일이 있어서 같이 못 가는 건데, 차라리 다행이야.’

친척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아직은 도혁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재인이었다.

재인은 앉은 자리에서 크게 기지개를 켰다.

지난밤, 당연하게도 제대로 못 잔 탓에 견디기 힘들 만큼 졸음이 몰려왔다.

재인이 코트를 벗어 덮고 잠을 청하려는 그때였다.

반쯤 닫힌 시야에 익숙한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강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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