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이번엔 정말 멈추지 않을 거야 (83/129)


83화. 이번엔 정말 멈추지 않을 거야
2023.03.18.



‘미쳤나 봐. 이제 어쩔 거야?’

재인은 자신의 행동이 믿기지 않았다.

오로지 도혁을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명백한 사고였다.

덕분에 재인의 머릿속도 그야말로 백지상태였다.

대담하게 넥타이를 잡아채긴 했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손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재인의 손바닥이 땀으로 금세 눅눅해졌다.

도혁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없이, 재인을 바라볼 뿐이었다.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눈빛으로.

재인은 그의 눈빛에 몸 둘 바를 몰랐지만 그럼에도 눈길만은 피하지 않았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후.

도혁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장난 그만해.”

“장난…… 아닌데요.”

분명 장난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자는 건지 재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도혁의 눈이 커졌다.


“서재인 씨.”

재인의 이름을 불러놓고도 말이 없는 도혁이었다.

그저 차분한 눈빛으로 재인을 바라볼 뿐.

굳게 다물린 입가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이윽고,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 지금 서재인 씨 방에 들어가면, 아침까지 나가지 않을 거야.”

“……!”

“그래도 괜찮겠어?”

재촉하듯 묻는 그의 목소리 끝이 갈라져 있었다.

일순간 재인은 모든 사고가 정지된 듯 머리가 멍해졌다.

뭐든 대답을 해야 하는데 그 어떤 말도 찾을 수 없었다.

아무런 답이 없자, 도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씩 웃었다.


“농담이야. 놀라긴. 이제 그만 놔줘.”

도혁은 넥타이를 빼내려 재인의 손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

하나씩 하나씩 그녀의 손가락을 떼어내던 때였다.

돌연 재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응?

도혁은 깜짝 놀라 재인을 쳐다봤다.


“뭐 하는 거야?”

 

 
재인은 넥타이를 손에 쥔 채 아무 말 없이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그녀 자신도 뭘 하고 있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저 본능이 이끄는 대로 도혁을 이끌 뿐이었다.


“이러면…….”

주저하는 도혁을 재인이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투둑.

도혁의 팔에 걸쳐져 있던 옷가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다음 순간, 우뚝 버티고 서있던 도혁의 발이 드디어 재인의 방문 문턱을 넘었다.

그의 입에서 컬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젠 나도 몰라.”

도혁은 솟구치는 욕망을 주체할 수 없어 재인을 와락 끌어안았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멎어버릴 것처럼 폭주했다.

얄팍한 이성 따위는 방에 들어선 순간 우주 멀리 집어 던져버렸다.

남아 있는 그의 온 감각은 오로지 품에 안은 사랑스러운 존재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인가.

언젠가, 라는 기대는 했지만 그게 오늘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혹시 지금 꿈을 꾸는 건 아닌지 착각이 들 만큼 믿어지지 않는 도혁이었다.

도혁은 재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흐으으음.

달콤한 체향이 폐부 깊숙이 스며들자 미칠 것만 같았다.

도혁은 더는 참을 수 없어 재인의 가녀린 하얀 목덜미에 깊게 입을 맞췄다.


“아, 잠깐……!”

처음 느낀 야릇한 감각에 재인은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타는 듯한 도혁의 열기가 맞닿은 피부로 전해지며 삽시간에 재인의 온몸으로 퍼졌다.

견디기 힘들만큼 가슴 한복판이 간질간질하고 갑갑했다.

손으로 세게 움켜쥐어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팀장님, 잠깐만요!”

재인은 어깨를 움츠리며 제 목에 키스를 퍼붓고 있는 도혁을 밀어냈다.

고개를 든 도혁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재인을 내려다봤다.

반쯤 감긴 그의 눈동자가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왜, 라고 묻고 있었다.


“……너무 간지러워서요.”

“흠. 이 정도 가지고 놀라면 밤새 어쩌려고 그래?”

밤새?

도혁이 무심히 던진 말에 재인은 비로소 제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실감이 났다.

부끄러움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굳게 결심한 보람도 없이 어디라도 좋으니 숨고만 싶었다.


“그, 그냥 밤새 얘기만 하면……?”

이제 와서?

도혁의 눈썹이 꿈틀, 했다.

재인은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뜨거운 눈빛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안 되겠죠.”

하.

기가 막힌 지 도혁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재인은 얼굴이 화끈거리다 못해 귀까지 새빨개졌다.

나 같아도 어이없겠다.

그만 놓아달라는 걸 잡아당긴 게 누구더라, 서재인?

재인이 그렇게 자조하고 있을 때.

갑자기 도혁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그건 곤란한데?”

“네?”

재인은 숨이 턱 막혔다.

그의 얼굴에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고 쓰여 있었다.

도혁은 그녀에게 바짝 다가서며 말했다.


“하여간, 서재인 씨한테는 생각할 틈을 주면 안 된다니까.”

“저기, 팀장님? 아아…….”

재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조금 전 도혁의 넥타이를 잡아끌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탁.

뒷걸음질 치던 그녀의 다리가 침대 발치에 부딪혔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재인은 그대로 침대에 주저앉고 말았다.

도혁이 나직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서재인.”

온전히 이름만 불리는 건 처음이라 재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부드럽게 재인의 목덜미를 감싸 쥔 도혁은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턱 끝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수정처럼 맑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이번엔 정말 멈추지 않을 거야.”

“……!”

도혁은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재인의 앙증맞은 입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하아.

숨이 막힐 듯한 열기가 순식간에 재인의 입안을 가득 채웠다.

깊숙한 곳까지 거침없이 밀고 들어오는 도혁 때문에 재인은 그만 정신이 아찔해졌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데일 듯 뜨거운 도혁의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파고들었다.

뒤이어 그의 성마른 숨소리가 귓속을 마구 휘저었다.

눈을 감은 채 제게 몰두해 있는 도혁을 보자 재인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세포가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지독한 가뭄 끝에 내린 단비처럼, 도혁의 몸짓 하나하나가 잠자고 있던 그녀의 감각들을 깨우고 있었다.

턱을 감싸고 있던 도혁의 손이 재인의 목 뒤로 미끄러졌다.

자그마한 지퍼를 잡고 천천히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등줄기에 서늘한 공기가 닿자 재인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황급히 도혁의 팔을 붙잡으며 재인이 말했다.


“저기…… 너무 밝아서…….”

도혁은 씨익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딸깍.

스위치를 바꾸자 은은한 붉은빛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

어스름 불빛 아래 넌지시 재인을 바라보던 도혁은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헤쳤다.

한 손으로 와이셔츠 단추를 풀어 내리는 그의 시선은 오직 한곳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재인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셔츠 틈 사이로 잘게 쪼개진 근육이 서서히 자태를 드러낼 때마다 그녀의 심장 박동도 점점 더 빨라졌다.

이윽고 와이셔츠가 확 젖혀지고,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멎을 것 같은 관능적인 도혁의 상체가 재인의 눈동자를 가득 채웠다.

재인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보는 남자의 몸이었다.

재인은 창피함도 잊은 채 도혁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자 도혁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얼굴만 취향인 게 아닌가 봐?”

“아……!”

재인은 얼굴이 화끈거려 홱 고개를 돌렸다.

다음 순간, 돌연 그녀의 상체가 기울어지더니 털썩 침대 위에 눕혀졌다.

놀랄 새도 없이 도혁이 몰아치듯 입술을 부딪쳐 왔다.

재인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을 감은 채 달콤한 손길에 자신을 내맡길 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도혁이 황홀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멀리 바닥에 떨어져 있는 블랙 원피스가 재인의 눈에 들어왔다.

아아아!

화악 붉어진 얼굴로 이불을 끌어안으려는 재인을 도혁이 붙잡았다.

도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속삭였다.


“아름다워. 미쳐버릴 만큼.”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음성.

자신만을 향한 그의 올곧은 시선.

맞닿은 피부를 통해 전해지는 그의 온기.

그 하나하나가 재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재인은 이끌리듯 고개를 들어 도혁에게 입을 맞췄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도혁이 뜨거운 숨을 내쉬며 지체 없이 그녀에게 파고들었다.

타버릴 듯한 열기가 금세 온몸으로 전해졌다.

갈구하는 듯한 거친 손길이 조금씩 조금씩 영역을 넓혀갔다.

어느새 빈틈없이 맞닿은 두 사람은 이성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고삐가 풀려 버린 몸짓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빨라졌다.

이윽고 마구 뒤섞여 날뛰던 호흡이 딱 맞아떨어진 순간, 그가 잔잔한 파도처럼 물결치기 시작했다.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과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뒤섞여 재인은 숨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가슴 한복판에서 헤아릴 수 없는 무언가가 솟구쳤다.

재인은 도혁의 목을 힘껏 끌어안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기분에 그의 머리카락을 마구 휘저었다.

이대로 파도에 휩쓸려 산산이 부서지고 싶었다.

그의 안으로 깊숙이 녹아들고 싶었다.

오로지 그 생각 하나뿐이었다.

재인은 점점 아득해지는 의식을 간신히 붙잡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팀장님, 사랑해요.”

 

* * *

새해 아침이 밝았다.

재인은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났다.

미처 닫지 못한 커튼 틈 사이로 쏟아진 아침 햇살이 침대 위에 길게 드리워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아침이었다.

하지만, 분명 어제의 아침과는 다른 아침이었다.

재인은 몸을 돌려 제 옆에 누워 있는 도혁을 바라봤다.

새벽까지 재인을 놓아주지 않았던 그가 어린아이처럼 곤히 잠들어 있었다.

기분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재인은 혹시라도 도혁이 깰까 봐 숨소리마저 죽였다.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떨려왔다.

그와 밤새 맞닿아 있었다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는 재인이었다.


“아침에 보니까 더 잘생겼지?”

언제부터 일어나 있었는지 도혁이 눈을 감은 채 입꼬리를 올렸다.

그게 또 멋져서 재인은 가슴이 콩닥거렸다.


“일어나 있었어요?”

“응. 누가 쳐다보는 눈빛이 하도 따가워서 말이지.”

“……안 봤는데요.”

재인은 부끄러워서 아닌 척했다.

훗. 도혁이 코웃음을 쳤다.


“거짓말.”

도혁의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열리고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짙은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흠칫 놀란 재인이 피할 새도 없이 도혁은 그대로 선홍빛 입술을 찾아 길게 입을 맞췄다.


“이건 거짓말한 벌.”

“……아침부터, 참…….”

“이걸로는 너무 약한데? 안 되겠다!”

말이 끝나자마자 도혁은 재빨리 몸을 일으켜 위에서 재인을 내려다봤다.

지난밤 몇 번이고 봤던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며.

재인은 또다시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정말이지, 시도 때도 없이.


“자, 잠깐만요!”

“왜?”

“오늘 일찍 본가에 가셔야 한다면서요?”

“안 가.”

도혁은 그새 야수로 돌변해 있었다.


“안 돼요!”

“돼.”

“할아버님과 하실 얘기가 있잖아요.”

“흐음.”

차 회장의 얘기가 나오자 찬물을 끼얹은 장작처럼 도혁의 기세가 팍 꺾였다.

달콤한 꿈에 젖어 있느라, 어제 차 회장과 부딪쳤던 일을 의식 저편에 묻어두고 있었던 도혁이었다.

이제 날이 밝았으니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도혁은 침대 머리맡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긴 그를 걱정스레 바라보며 재인이 말했다.


“회장님 화가 많이 나셨겠죠? 뭐라 하시든 일단 잘못했다고 사과부터 하세요. 저도 버릇없이 굴어서 정말 죄송하다고 전해주시고요.”

“서재인 씨가 뭘. 할아버지가 심하게 말했으니 그랬겠지.”

“차 회장님을 속인 꼴이 된 건 사실이니까요. 결혼도 안 한 손자가 여자랑 같이 살고 있으니 얼마나 기가 막히셨겠어요.”

“그거야 내가 서재인 씨 잡겠다고 벌인 일인데?”

축하드려요. 제대로 성공하셨습니다, 차도혁 씨.

재인은 그간의 일들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어찌 됐든요.”

“……서재인 씨는 괜찮아?”

지금 이 순간, 도혁에게 재인보다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네. 차 회장님 입장도 이해해요. 제가 맘에 안 드시는 게 당연하죠.”

“내 인생이야. 그리고 난, 서재인 씨가 아니면 안 돼.”

“팀장님…….”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도혁의 말에 재인은 울컥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때, 갑자기 도혁이 재인의 두 어깨를 잡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재인 씨, 한 가지 부탁이 있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