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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방문이 활짝 열렸다 (82/129)


82화. 방문이 활짝 열렸다
2023.03.14.


단아한 블랙 원피스를 입은 재인의 얼굴이 오늘따라 유난히 새하얗게 빛났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들끓게 만드는 그 사랑스러운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도혁은 안타까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서재인 씨, 미안해. 어떻게 이런 일이…….”

재인이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은 눈망울을 보고 있으려니 도혁은 심장이 욱신거렸다.

천천히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재인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그녀의 상기된 볼을 어루만지며 도혁이 물었다.


“많이 놀랐지?”

“……괜찮아요.”

재인의 목소리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대체 뭐라고…… 아, 아니야.”

도혁은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듯 재인이 미간을 찌푸려서.

집 안에 들어섰을 때의 상황만 봐도 어느 정도였을지 가히 짐작이 갔다.


「요새 누가 촌스럽게 사귄다고 결혼을 생각해요? 그냥 만나는 거지. 결혼 같은 거 할 생각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그럴 거면 당장 헤어져!」

「헤어지고 말고는 제가 결정합니다.」

「뭐, 뭐야? 너 지금 나랑 한번 해보자는 거야?」

예의 바른 재인이 그렇게 나올 정도였으면 꾹 참던 게 터진 것이었으리라.

도혁은 힘든 상황을 그녀 혼자 감당하게 한 게 미안해져 울컥 목이 메었다.


‘할아버지 성격에 얼마나 심한 말을 하셨을까. 내가 좀 더 서둘렀어야 했는데…….’

할아버지와 담판 지을 날을 하루 앞두고 이렇게 허를 찔리다니.

자책하고 후회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지금은 재인의 마음을 다독이는 게 우선이었다.

도혁은 재인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 안아 제 품에 가뒀다.


“할아버지가 뭐라고 하셨든 다 잊어버려. 미안해. 내가 대신 사과할게.”

“…….”

“앞으로 닥칠 문제들은 내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재인은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서재인 씨만 있으면 돼. 정말…… 정말 그거면 돼.”

도혁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직이 읊조렸다.

제게 다짐하는 말이기도 했다.


“팀장님…….”

갑자기 재인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서재인 씨, 괜찮아?”

“아, 왜 이러지……?”

차 회장에게 대차게 대들 때부터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던 재인이었다.

긴장이 풀리자 갑자기 온몸에 힘이 쭉 빠져버린 것이었다.

도혁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재인의 안색을 살폈다.

창백한 얼굴에 핏기 없는 입술.

몰래 눈물을 훔쳤는지 촉촉하게 젖어 있는 눈동자.

손을 놓으면 그대로 픽 쓰러질 것만 같았다.


“안 되겠어. 잠시 눈 좀 붙여.”

“아니에요. 이러다 늦겠어요. 서연 언니한테 일찍 간다고 약속했는데…….”

그런 일을 겪고도 약속을 신경 쓰다니.

참, 서재인답다.

도혁은 남을 배려하느라 자신은 뒷전인 재인이 답답하기만 했다.


“지금 그게 중요해? 나중에 잘 설명하면 되잖아.”

“그래도……. 앗!”

더 들을 필요 없다는 듯 도혁이 재인을 번쩍 안아 들었다.

허공에 뜬 재인은 거슬러 흘러내리는 치맛자락을 붙들며 다급히 외쳤다.


“티, 팀장님, 내려주세요!”

“싫어.”

“이제 괜찮아요. 저 혼자서 걸어갈 수 있어요.”

“안 돼.”

도혁은 재인을 더욱 힘주어 안고 걷기 시작했다.

그새 자포자기했는지 재인도 잠잠해졌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고요한 가운데 도혁의 발걸음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재인의 방문 앞.

도혁은 그제야 그녀를 내려다봤다.

재인은 여전히 치맛자락을 꼬옥 붙든 채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작은 새처럼 웅크리고 있는 그녀를 보자 도혁의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뛰었다.


‘정신 차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가뜩이나 서재인 씨 마음이 힘들 텐데.’

짐승도 아니고, 진짜.

도혁은 입술을 감쳐물며 황급히 시선을 돌리고는, 천천히 방문을 열고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런 다음 재인을 조심스레 침대에 내려놓고 그 옆에 걸터앉았다.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도혁이 물었다.


“서재인 씨, 괜찮아?”

“……네.”

잔잔한 호수 같은 눈동자가 도혁을 똑바로 올려다봤다.

일순 도혁은 그 속으로 첨벙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거세게 일었다.

도혁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대로 좀 누워 있어. 조금 있다가 깨워줄게.”

그대로 일어나려는데 재인이 도혁의 옷깃을 살며시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미처 막을 새도 없이 도혁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하아.

도혁은 그만 참지 못하고 재인의 입술에 길게 입을 맞췄다.


 
정신없이 파고들려던 찰나, 맞닿아 있는 좁은 영역을 통해 그녀의 몸이 파르르 떨리는 게 전해졌다.

아!

뒤늦게 제가 한 짓을 깨달은 도혁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놀란 얼굴로 얼어붙어 있는 재인과 눈이 마주쳤다.

미쳤어.

도혁은 눈을 질끈 감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 미안! 난 이만 가볼게.”

“팀장님……?”

“푹 쉬어.”

도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재인의 방을 빠져나왔다.

하아. 하아.

벽에 머리를 박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지만 가슴이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도혁은 그제야 아직도 코트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상황이 정신없이 흘러가는 바람에 벗을 새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답답함이 가실까 싶어 코트와 재킷을 벗어 팔에 걸쳤다.

그래도 숨이 막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헤치고 와이셔츠 단추까지 끌렀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이 무색하게 티끌만큼도 갑갑함이 가시지 않았다.

도혁은 뒤돌아 벽에 등을 기댔다.

눈앞에 있는 재인의 방문이 높은 성벽처럼 느껴졌다.

좀처럼 식지 않는 열기를 길게 내뿜으며 그 문을 지그시 바라봤다.

이성은 빨리 가라고 하는데, 그 자리에 뿌리를 박은 듯 도혁의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급기야 문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헛된 기대마저 일렁였다.


‘단단히 정신이 나갔군. 이 상황에서…….’

할아버지와 담판 지을 생각을 하느라 머리가 깨질 듯 아파야 정상인데.

상처받았을 재인을 다독이지는 못할망정.

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나왔다.


‘하. 이러다 여기서 밤을 새우겠어.’

휴우.

도혁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바로 세웠다.

그래도 못내 아쉬워 넌지시 문을 쳐다보며 걸음을 옮기려는 그때였다.

벌컥.

굳게 닫혀 있던 재인의 방문이 활짝 열렸다.

.
.
.



“서재인 씨, 괜찮아?”

침대 위에 누운 재인은 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도혁의 손길에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네.”

괜찮지 않다. 괜찮을 수가 없다.


‘미쳤어. 어쩌자고 그런 말을…….’

재인은 차 회장에게 퍼부었던 말들을 곱씹으며 후회에 후회를 거듭했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도혁을 생각해서 이를 악물고 참았어야 했다.


「함부로 말씀하지 마세요. 서재인 씨, 제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도혁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는 너무 서글펐다.

처음 듣는 그 말에 가슴이 설레면서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는 게 실감이 나서.

아무리 밟고 또 밟아도 기어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던 불안이 현실이 되어버린 지금.


‘차도혁 씨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

재인은 덜컥 겁이 나 물끄러미 도혁을 올려다봤다.

시원스레 쭉 뻗은 눈매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눈동자.

섬세한 콧날 아래 차분하게 닫혀 있는 단정한 입술.

깎은 듯한 턱선을 타고 이어지는 다부진 어깨.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명치를 간지럽히는 도혁이었다.


‘자신 없어.’

그가 없다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텅 빈 것 같은 절망이 느껴졌다.

재인은 울컥 눈물이 솟구치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그러면서도 그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도혁의 속눈썹 한 올 한 올까지 가슴에 새겨두고 싶어서.


“……그대로 좀 누워 있어. 조금 있다가 깨워줄게.”

도혁이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 회장과 만난 탓일까.

재인은 이대로 보내면 그를 다시 못 만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가지 마세요.

재인은 도혁을 붙잡으려다 그늘진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도 앞으로 벌어질 일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하리라.

계속 제 옆에만 붙들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재인은 어서 가보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순간.

표정 없던 도혁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입술을 질끈 깨문 그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세게 입술을 부딪쳐왔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불안과 걱정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마치 마법처럼.

재인은 저도 모르게 눈을 꼭 감고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에 젖어들었다.

오로지 세상에 도혁과 자신 단둘만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른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부질없는 욕심이라고 비난받아도 상관없었다.

차도혁, 차도혁만 있으면 되었다.

정말 그거면 되었다.

그를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절대.

재인은 손을 뻗어 도혁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재인의 몸 위로 묵직한 무게가 실린 그때였다.

도혁의 몸이 움찔하더니 황급히 입술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미, 미안! 난 이만 가볼게.”

응?


“팀장님……?”

“푹 쉬어.”

도혁은 붙잡을 새도 없이 도망치듯 밖으로 나가버렸다.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재인은 침대 위에 누운 채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봤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심장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가슴을 두드려댔다.

재인은 가슴이 답답해서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도혁이 사라진 문을 원망스레 쳐다봤다.


‘또야?’

이쯤 되니, 도혁이 일부러 자신을 괴롭히려는 건가 싶기도 했다.

아직도 도혁의 열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아 손가락으로 가만히 입술을 매만졌다.

데일 듯 뜨거웠던 입술의 감촉을 떠올리자 재인의 가슴이 술렁였다.

그리고, 대책 없이 도혁이 보고 싶어졌다.


‘안 되겠어!’

재인은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장 문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재인의 방이 활짝 열렸다.

뜻밖에도 문 앞에는 방금 전까지 함께 있었어도 그새 그리워진 그 차도혁이 서 있었다.

몹시 당황한 얼굴로.


“팀장님?”

“서재인 씨?”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재인은 반가운 마음에 도혁에게 다가갔다.


“팀장님, 아직도 여기 계셨어요?”

도혁은 뒤로 물러서며 떠듬떠듬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 서재인 씨, 내가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고……. 옷은 덥고, 그래서 어쩌다 보니…….”

“다른 뜻?”

뜨끔.

도혁은 제 속을 죄다 들킨 것만 같아 식은땀만 주루룩 흘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서재인 씨는 왜 안 쉬고 나왔어?”

“그게…….”

막상 그를 보니 낯이 뜨거워 말문이 막힌 재인이었다.

도혁은 그런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아직도 피곤해 보이는데. 약속 시간 때문에 그래? 좀 전에 나민우 팀장님께 늦는다고 연락해놨으니까 걱정 말고 좀 더 쉬어.”

“이제 괜찮은데…….”

“안 돼. 나도 지금 쉬러 가려는 참이었어. 그럼.”

도혁은 애써 태연한 척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앗!”

짧은 탄성과 함께 도혁의 몸이 뒤로 살짝 당겨졌다.

도혁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얼굴을 붉히며 그의 넥타이를 팽팽하게 붙잡고 있는 재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서재인 씨……?”

도혁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재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지 마세요.”

“……!”

도혁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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