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제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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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제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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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제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2023.03.11.
“팀장님이 좀 늦으시네?”
재인이 벽시계를 보며 중얼거렸다.
7시를 넘긴 시각.
민우와 서연의 집에서 하는 홈파티에 늦지 않으려면 7시 반에는 출발해야 했다.
재인이 미리 만들어둔 과일타르트와 와인을 챙기고 홈파티에 갈 준비를 하는 동안, 도혁은 일을 마저 마무리하고 데리러 오기로 되어 있었다.
재인은 서연에게 처음으로 남자친구를 소개하는 날이라 그런지 괜스레 긴장이 되었다.
하물며 그 남자친구가, 재인이 그동안 서연을 붙잡고 ‘이러다 제명에 못 죽겠다’며 하소연했던 그 팀장님이라니.
서연은 도혁이 너무 궁금하다며 일찍 오라고 신신당부했었다.
‘이러다 늦겠네. 팀장님한테 다시 연락해봐야지.’
재인이 막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돌연 정적을 깨고 익숙한 인터폰 소리가 들려왔다.
도혁인가 싶어 달려가 인터폰 화면을 확인해보니 성준의 모습이 보였다.
‘마지막 날까지 김 실장님한테 일을 시키다니, 팀장님도 너무하시네.’
재인이 문을 열며 반갑게 성준을 맞았다.
“김 실장님, 어쩐 일이세요?”
재인을 보자마자 성준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대뜸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네? 뭐가요?”
영문을 몰라 되묻는 재인의 앞에 풍채 좋은 백발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뜻 보기에도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서재인 씨, 나 도혁이 할애비 되는 사람이오.”
“네?”
재인은 가슴이 철렁했다.
팀장님의 할아버지라면…….
바로 그, 차대산 회장님?
“아, 안녕하세요.”
재인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성준이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그 순간.
재인은 막연히 두려워했던 상황과 맞닥뜨리게 되었음을 직감했다.
올 게 왔구나.
서늘한 기운이 순식간에 재인의 온몸을 덮쳤다.
차 회장은 얼어 있는 재인을 스윽 지나치며 한마디 했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지.”
.
.
.
도혁이 나이 들면 이런 모습이겠구나, 싶을 만큼 똑 닮은 얼굴.
차 회장은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눈빛으로 재인을 뚫어지게 볼 뿐, 말이 없었다.
성준도 입을 꽉 다문 채 차 회장의 옆에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무거운 침묵에 재인은 가만히 숨을 죽였다.
이윽고 차 회장이 차분하게 말문을 열었다.
“서재인 씨, 내가 왜 왔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죠?”
“……네.”
재인은 목이 메어 간신히 답했다.
차 회장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내가 이번에 도혁이 놈한테 제대로 당했어요. 여자 문제로 신경 쓰게 한 적이 없어서 믿고 있었는데 아예 한집에서 같이 살고 있을 줄이야.”
“회장님, 그런 게 아니라…….”
재인은 사정을 설명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절대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계약 조항도 걸렸지만, 처음 도혁의 사무실에서 엿들을 때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차 대표를 막아야 해요. 회장님은 절대 아시면 안 됩니다. 할아버지 성격 아시잖아요. 대쪽 같아서 쓰러지실지도 모릅니다.」
도혁과 재인이 같이 살게 된 사정을 설명하려니 상황이 너무 복잡했다.
재인이 스파이로 오해받게 된 사연부터 차정환 대표가 벌이는 일에 관한 이야기까지.
그러다 괜한 말을 해서 차 회장님이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그거야말로 큰일이었다.
게다가 재인이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도혁의 ‘여자 문제’가 되어버린 건 사실이니 더 할 말이 없었다.
“다 알고 있으니 변명할 생각 마요.”
차 회장이 손짓하자 성준이 서류 가방에서 검은색 파일을 꺼내 재인에게 건넸다.
스치듯 마주친 성준의 눈에 미안함과 자책의 빛이 서려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파일을 펼친 재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건……!”
파일 안에는 재인과 도혁의 출퇴근과 볼링장은 물론, 어젯밤 병원과 떡볶이 가게에 들렀을 때까지.
두 사람의 일상을 몰래 염탐한 사진들이 상세한 보고서와 함께 시간 순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며칠 전, 크리스마스이브 날 밤.
차 회장은 한세병원 조 원장으로부터 도혁이 광주의 종합 병원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따로 뒷조사를 지시했었다.
그리고 오늘, 우려했던 결과를 받아 들고 성준을 호출한 것이었다.
재인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 차 회장의 서늘한 목소리가 귓가에 날아들었다.
“일밖에 모르던 녀석을 어떻게 꼬드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쯤에서 끝냅시다.”
꼬드겨?
끝내?
재인은 억울한 마음에 차 회장을 쳐다봤다.
“저기, 회장님 전…….”
차 회장은 재인의 말을 가로막으며 무언가를 테이블 위로 툭 던졌다.
두툼한 하얀 봉투였다.
“서재인 씨, 긴말하고 싶지 않으니, 지금 당장 이 집에서 나가요. 그 돈이면 살 만한 집을 구하고도 남을 거요.”
재인은 갑작스러운 통보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뒤이어 견디기 힘든 수치심이 온몸을 휘감았다.
시뻘게진 얼굴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재인을 보다 못한 성준이 끼어들었다.
“회장님, 서재인 씨는 당장 갈 곳이 없습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시죠.”
“자네는 가만히 있게. 어떻게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쉬쉬할 수가 있나? 정말 실망했네!”
“죄송합니다. 그래도 도련님과 먼저 얘기를 해보시는 게…….”
차 회장이 발끈하며 받아쳤다.
“그래서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 아닌가! 이제 내 방식대로 처리하겠네.”
“……죄송합니다.”
성준이 괴로운 얼굴로 물러섰다.
차 회장은 회유하듯 재인에게 말했다.
“보상은 섭섭지 않게 할 테니 회사도 그만둬요. 유학 가기 전까지는 도혁이 눈에 띄지 말고.”
‘차도혁 인생에서 꺼져라’라고.
차 회장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재인은 심장이 죄어드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애초부터 도혁의 집안에서 두 팔 벌려 환영할 거라는 기대 따위 없었다.
잘못한 것이 없어도 죄인 취급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쯤은 각오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도혁과 허무하게 헤어지는 것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재인은 마음을 다잡고 힘겹게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죄송하지만…… 그 말씀은 따를 수 없습니다.”
차 회장의 눈빛이 싸늘하게 돌변했다.
“서재인 씨, 설마 이 일로 도혁이 발목을 잡을 생각이요? 아니면 더 큰 걸 원하는 건가?”
“아닙니다. 그저 팀장님 곁에 있고 싶은 것뿐이에요. 저희 두 사람,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습니다.”
“진심?”
허허. 차 회장이 기가 막힌다는 듯 크게 웃었다.
“그깟 소꿉장난 같은 감정으로 도혁이 앞길을 막으려고?”
“제가 많이 부족하지만, 더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재인이 물러서지 않자, 차 회장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순진한 건지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건지.”
“네?”
“서재인 씨,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안 되는 일이란 게 있어. 도혁이는 대산그룹 후계자야. 서재인 씨와는 사는 세계가 달라.”
차 회장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내, 이런 말까진 꺼내고 싶지 않았는데, 고아 출신의 근본도 없는 서재인 씨가 대산그룹 안주인 자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
날카로운 말이 송곳처럼 재인의 심장을 후벼 팠다.
“괜한 고집 피워봤자 상처 입는 건 서재인 씨야. 도혁이는 곧 대산그룹에 걸맞은 상대와 결혼할 거니까.”
팀장님이 결혼을?
재인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지자, 차 회장이 씩 웃으며 덧붙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도혁이가 아직 말을 안 했나 보군. 봄에 후계자 승계가 마무리되면 바로 식을 올릴 거야. 서진물산 윤세정 양이라고, 도혁이에게 딱 어울리는 아가씨지.”
윤세정?
분명 도혁과 고흥 출장을 가는 길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마주쳤던 여자의 이름이었다.
도혁을 보고 이렇게 만난 건 운명이라고 한 청초한 꽃 같았던 그 여자.
‘오해일 거야. 팀장님이 일부러 날 속였을 리 없어.’
재인은 애써 부정하면서도 무릎 위로 맞잡은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동요하는 그녀의 모습에 차 회장은 한층 더 목소리를 높였다.
“도혁이가 세정 양과 결혼하게 되면 서진물산이라는 든든한 아군을 얻게 되지. 대산그룹의 발전을 위해서도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킬 거고. 서재인 씨는 도혁이한테 뭘 해줄 수 있지?”
재인은 말문이 막혔다.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도혁에게 재인이 줄 것이라고는 그를 향한 마음밖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 사실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재인이었다.
그녀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차 회장이 조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고작 빵집 하나도 제대로 건사 못하는 변변찮은 집안이 감히 대산을 넘봐? 분수를 알아야지. 서재인 씨, 이제라도 정신 차리고 자기 수준에 맞는 남자를 찾아봐.”
그때였다.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서 위태롭게 휘날리던 재인의 정신줄이 뚝, 끊겼다.
선 넘으셨네.
재인은 차 회장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회장님……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사과해주세요.”
“사과?”
“네. 저희 부모님, 누구보다 바르게 잘 살아오신 분들입니다. 회장님한테 그런 식으로 매도당할 이유 없습니다.”
“어른한테 눈 똑바로 뜨고 따박따박 말대답하는 건 집에서 배웠나? 이래서 근본이 중요하다니까.”
쯧. 차 회장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혀를 찼다.
재인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그럼 돈 없으면 막말하고 깔아뭉개는 게 대산 집안의 근본인가요?”
“뭐야? 어디서 버르장머리 없이!”
차 회장이 솟구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인도 지지 않고 따라 일어났다.
“그런 거라면 그깟 대산, 제 쪽에서 사양하겠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제가 꼬드긴 게 아니고 팀장님이 먼저 절 좋아한 겁니다. 끈질기게 따라다닌 거라고요.”
서재인, 너 미쳤구나.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재인은 제가 뱉어놓고도 놀라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차 회장은 입가에 거품을 물며 기함했다.
“그깟 대산? 누구 앞이라고 감히 함부로 지껄여! 긴말 필요 없고, 당장 나가!”
“그렇게는 못 하겠습니다.”
“내가 너 같은 부류 한두 번 겪는 줄 알아? 거머리처럼 물고 늘어져서 결혼이라도 할 속셈이라면 꿈 깨!”
차 회장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시뻘건 얼굴로 삿대질을 했다.
그러나 재인은 오히려 차분하게 응수했다.
“요새 누가 촌스럽게 사귄다고 결혼을 생각해요? 그냥 만나는 거지. 결혼 같은 거 할 생각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그럴 거면 당장 헤어져!”
“헤어지고 말고는 제가 결정합니다.”
“뭐, 뭐야? 너 지금 나랑 한번 해보자는 거야?”
차 회장은 제 화를 못 이겨 뒷목을 잡고 재인을 노려봤다.
그때였다.
“할아버지, 지금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언제 왔는지, 도혁이 현관 앞에서 세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날 선 도혁의 눈빛에 재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 들어버린 거야?
“너 잘 왔다. 지금 얘가 나한테 하는 말 똑똑히 들었지?”
차 회장이 재인을 가리키며 도혁에게 앓는 소리를 했다.
도혁은 성큼성큼 거실로 걸어 들어왔다.
테이블 위에 펼쳐진 사진들과 보고서를 본 도혁은 재인의 앞을 막아서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할아버지, 제 뒷조사를 하신 겁니까? 서재인 씨한테 대체 뭐라고 하셨어요?”
“네 놈이 하도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여서 몇 마디 했다, 왜? 너야말로 집에 여자를 끌어들이고, 이게 무슨 짓이냐!”
“미리 말씀 못 드린 건 죄송합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다짜고짜 쳐들어오시면 어떡합니까?”
“얼빠진 놈! 고작 이런 여자 때문에…….”
차 회장이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자, 도혁이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함부로 말씀하지 마세요. 서재인 씨, 제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 사랑? 아주 단단히 돌았구나!”
“네! 그러니 지금 당장 돌아가세요. 김 실장님도요.”
성준은 원망 섞인 도혁의 눈빛을 피하며 차 회장에게 말했다.
“회장님, 오늘은 이만 가시죠.”
“고얀 놈! 너 지금 여자 때문에 이 할애비를 내쫓는 게냐?”
도혁은 보란 듯이 현관으로 걸어가 중문을 홱 열어젖혔다.
“네. 아무리 할아버지라도 서재인 씨한테 함부로 대하시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이런 미친놈! 내, 두고 보자!”
차 회장은 재인과 도혁을 집어삼킬 듯 노려보다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뒤를 성준이 난처한 표정으로 황급히 뒤따라갔다.
폭풍이 지나간 뒤.
재인과 도혁은 고요히 서로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가슴을 부여잡고.
세상에 오로지 둘만 남겨진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