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이미 활짝 열렸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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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이미 활짝 열렸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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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이미 활짝 열렸는데요?
2023.03.07.
재인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팀장님…….”
저도 같은 마음이에요.
드디어 때가 왔구나!
재인은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매달리듯 도혁의 가슴에 기댔다.
자, 이번에야말로 못 이기는 척 넘어가 볼까?
재인은 그의 품 안에서 바르르 떨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웬걸?
갑자기 도혁의 몸이 움찔하는가 싶더니, 빛의 속도로 손을 풀고 뒤로 물러섰다.
그 바람에 재인은 황망히 그의 품에서 튕겨 나갔다.
응?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야?
재인은 튕겨 나간 몸을 어정쩡하게 세우며 멀뚱멀뚱 도혁을 쳐다봤다.
도혁이 멋쩍게 웃으며 사과했다.
“아, 미안. 내가 괜한 얘기를 했네. 기다리겠다고 큰소리쳐 놓고.”
“아……!”
재인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 안 기다리셔도 되는데요?
도혁은 재인의 속도 모르고 그녀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놀란 표정 짓긴. 절대 아무것도 안 할 테니 걱정 마.”
“절대요?”
“응.”
도혁이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재인의 어깨를 짚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난 한다면 하는 남자야.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서재인 씨 마음이 활짝 열릴 때까지 기다릴게.”
“팀장님, 전…….”
이미 활짝 열렸는데요?
팀장님만 눈치채면 되는데요?
부끄러워서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들이 재인의 가슴속에서 마구 내달렸다.
그런 줄 짐작조차 못 하는 도혁은 재인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씩 웃었다.
“그러니까, 날 믿고 마음 편히 있어. 도망치거나 하지 말라고.”
“…….”
재인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지자, 도혁은 벽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이런, 벌써 12시야? 서재인 씨, 많이 피곤해 보이네.”
“괘, 괜찮아요.”
“오늘 업무도 많았는데 병원까지 들렀던 데다 떡볶이집에서 유라 씨까지 만났으니 그럴 만도 하지. 어서 푹 쉬어.”
“진짜 괜찮은데…….”
도혁은 방문을 열고 우물쭈물 말을 잇지 못하는 재인을 매너 있게 들여보냈다.
어어?
엉겁결에 등 떠밀려 방 안으로 들어와 버린 재인은 다급히 뒤돌아 도혁을 쳐다봤다.
“서재인 씨, 잘 자.”
도혁은 늘 하던 굿나잇 뽀뽀도 생략한 채, 재인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문을 닫아버렸다.
기껏 재인이 굳은 결심을 한 보람도 없이.
또다시 매우 건전한 밤을 맞이하게 된 두 사람이었다.
‘차도혁 씨, 그냥 눈치 좀 채주지. 마음이 활짝 열렸다고 현수막이라도 걸어야 하는 거야?’
재인은 새빨개질 대로 새빨개진 얼굴을 감싸며 침대로 쓰러졌다.
.
.
.
‘진짜 위험했어.’
제 방으로 돌아온 도혁은 털썩 쓰러지듯 소파에 앉아 이마를 괴었다.
분출 직전의 화산처럼 가슴이 미친 듯이 들끓었다.
데일 듯 뜨거운 열기가 밤새 사그라지지 않을 듯했다.
조금 전.
도혁은 하마터면 그대로 재인의 방으로 밀고 들어갈 뻔했다.
‘이제 어쩔 거야? 서재인 씨를 겁먹게 했잖아!’
저도 모르게 밤새 같이 있고 싶다는 진심이 튀어나와 버렸을 때, 도혁은 느꼈다.
그 한마디에, 품에 안겨 있던 재인이 바들바들 떠는 것을.
덫에 걸린 사슴처럼 두려움으로 가득 찬 재인의 눈빛을 보자 곧장 후회가 밀려왔다.
이틀 전 회식 날 밤.
은근슬쩍 농담처럼 얘기를 꺼냈을 때도, 귀신이라도 본 듯 기겁하며 도망쳤던 재인이었다.
그런 그녀를 또 놀라게 하고 말았다.
‘몹시 곤란해하는 표정이었지. 하아, 내가 이 정도로 짐승은 아니었는데…….’
도혁은 자신이 밀어붙이다가, 행여 재인의 마음이 다시 닫히는 건 아닐지 덜컥 걱정이 되었다.
이제껏 다른 여자들과 있을 때는 짐승은커녕 오히려 감정 없는 로봇에 가까웠던 그였다.
그런데 요즘은 재인과 함께 있을 때, 이성이 말을 듣지 않은 적이 수두룩했다.
덕분에 도혁은 재인과 있는 매 순간이 넘치게 행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파른 낭떠러지 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자칫하면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기꺼이 몸을 던져버릴 것만 같은 위태로운 상태랄까.
「서재인 씨 마음이 활짝 열리고, 내 얼굴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릴게. 괜찮아.」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잘도…….
입에 발린 약속으로 무마하긴 했지만, 재인의 어두운 표정으로 미루어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하긴. 그렇게 밤을 보내고 싶다고 티를 팍팍 냈으니, 나 같아도 믿지 못하겠다.’
도혁은 제가 한 말을 곱씹으며 코웃음을 쳤다.
그나저나, 앞으로가 더 문제였다.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제 감정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아서.
‘이게 다 서재인 씨 탓이야. 너무 사랑스러우니까 나도 어쩔 수 없잖아?’
문득 물끄러미 자신을 올려다보던 재인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떠올랐다.
도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악 붉어졌다.
소파에서 일어난 도혁은 곧장 침실로 가 재인을 생각하며 침대로 쓰러졌다.
* * *
다음 날, 목요일 저녁 무렵.
진혁은 할아버지인 차대산 회장을 만나러 본가에 들렀다.
어젯밤 늦게까지 세정과 한잔하느라 피곤했지만, 오늘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간밤에 세정이 한 말 때문에.
「나 실은 결혼 그만두고 싶어요. 차도혁 씨한테 여자가 있는 것 같아서요. 오늘 한세병원에 갔다가 웬 여자랑 다정하게 있는 걸 봤거든요.」
「도혁이 형한테 여자?」
「네. 그래서 나랑 결혼 안 한다고 한 것 같은데, 어른들이 강경하게 밀어붙이시니 말도 못 하겠고……. 우리 아빠 성격 알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세정이 차마 나서지 못하겠다면, 진혁 자신이 나서기로 했다.
‘일단 도혁이 형한테 여자가 있다는 걸 빌미로 세정이와의 혼사를 파토 내야 해.’
진혁은 달콤한 혀처럼 감겨오던 세정의 손길을 상기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걸 계기로 서진물산과 척을 지게 되면 도혁이 형도 후계자로서 입지가 흔들릴 테고. 그러면 나도 굳이 MF파트너스 딸과 결혼으로 엮이지 않아도 되니까, 그 뒤에 세정이랑 결혼하면 되지. 이거야말로 1석 3조네!’
차 회장은 창가에 놓인 안락의자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오오, 진혁이 네가 이 시간에 어쩐 일이냐?”
“올해 마지막 날이니 새해 인사드리려고 들렀죠. 할아버지,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내일 다 같이 만날 건데 새삼스럽긴. 암튼 고맙구나. 너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차 회장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차 회장의 서재로 자리를 옮긴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아 차를 마셨다.
진혁은 차 회장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할아버지, 도혁이 형 결혼은 잘 진행되고 있나요?”
뜬금없는 질문에 차 회장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풀어졌다.
“뭐, 그럭저럭.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게냐?”
“아니, 어제저녁에 한세병원에 일이 있어서 들렀는데, 거기서 도혁이 형을 봤거든요.”
“도혁이를?”
차 회장이 한쪽 눈썹을 끌어 올렸다.
진혁은 옳다구나, 싶었다.
“네. 웬 여자랑 있던데요?”
“여자?”
“언뜻 보기에도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았어요. 그래서 혹시라도 결혼에 지장이 있으면 어쩌나 하고…….”
차 회장의 안색이 잠시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곧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도혁에게 여자가 있다는 걸 알면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차 회장의 뜻밖의 반응에 진혁은 어안이 벙벙했다.
“진혁아, 도혁이가 병문안 다녀오는 모습을 본 걸 게다. 한세병원 조 원장한테 들어서 도혁이가 병원에 들른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알고 계셨다고요? 그럼 옆에 있던 여자는요?”
진혁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우리 대산 직원이야. 그 직원이 도혁이랑 보육원에 같이 봉사 갔던 거니 병문안도 같이 갔겠지.”
“도혁이 형이 보육원 봉사를요?”
“그래. 웬일로 크리스마스이브에 회사 직원을 따라 광주에 있는 보육원엘 갔다더구나. 거기서 심장마비로 쓰러진 아이를 살리고, 조 원장의 도움으로 수술까지 받게 해줬다고 들었다. 어제가 그 아이의 수술 날이었고.”
“아…….”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진혁은 뒤통수를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차 회장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진혁아, 너 혹시 이 사실 다른 사람한테 얘기했냐?”
“아뇨, 저만 알고 있어요. 할아버지께는 말씀드려야겠다 싶어서 온 거고요.”
독단적으로 행동한 것이니, 세정에게 들은 얘기를 옮겼다고는 말할 수도 없었다.
차 회장이 진혁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잘했다, 잘했어. 행여 서진물산 쪽에 들어가면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 우리끼리 비밀로 하자구나. 기업 이미지에도 타격을 입을 수도 있으니까.”
“네, 근데…….”
진혁이 우물쭈물 말을 잇지 못하자, 차 회장이 물었다.
“뭐, 더 할 말이라도 있는 게냐?”
“할아버지, 도혁이 형이랑 윤세정, 정말 결혼시키실 건가요?”
“당연하지. 왜, 맘에 안 드냐?”
“둘이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요.”
차 회장이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얼빠진 소리는. 더 할 말 없으면 이만 가보려무나. 곧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거든.”
“오늘 손님이요? 아, 네…….”
진혁은 할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마침 똑똑 노크 소리가 나더니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회장님, 저 왔습니다. 들어가 봐도 되겠습니까?”
“들어오게.”
서재의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진혁에게도 낯이 익은 성준이었다.
* * *
한 면을 희귀한 고서로 가득 채운 중후한 분위기의 서재.
성준은 퇴근을 하고 유라를 만나러 가던 중, 갑작스레 차 회장의 호출을 받았다.
성준은 불러놓고도 도통 말이 없는 차 회장의 심중을 파악하느라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이윽고, 차 회장이 입을 열었다.
“김 실장, 올해 마지막 날이라 저녁에 일정도 있었을 텐데 불러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저야 언제든 회장님이 부르시면 오는 게 당연한데요.”
“내가 이 시간에 무슨 일로 불렀는지 궁금하지 않나?”
성준은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들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회장님, 혹시 무슨 일 있으십니까?”
“자네, 크리스마스이브에, 도혁이가 연말 파티에 참석하지 않고 어딜 갔었는지 정말 몰랐나?”
“아, 네. 몰랐습니다.”
“흠, 그렇단 말이지. 그럼 혹시 도혁이가 여자를 만나는 낌새는 없던가?”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성준은 뜨끔했다.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거지? 서재인 씨에 대해 뭔가 눈치채신 건가? 그렇다면 어디까지 알고 계신 거지?’
성준의 머릿속에서 생각들이 마구 뒤엉켰다.
일단은 잡아떼는 게 최선이었다.
“네, 특별히 못 느꼈습니다.”
갑자기 차 회장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 그새 거짓말이 늘었군. 하하!”
거짓말?
성준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아닙니다. 제가 회장님께 감히 어떻게 거짓말을…….”
차 회장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성준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김 실장, 긴말 필요 없고 앞장서.”
“어디를…… 말입니까?”
차 회장이 조소 띤 얼굴로 답했다.
“어디긴? 서재인 만나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