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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밤새 같이 있고 싶어 (79/129)


79화. 밤새 같이 있고 싶어
2023.03.04.


볼이 발그레하고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것이 유라도 그때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족히 30분 넘게 이어졌던 유라와의 첫 키스.

고맙게도 유라가 덮쳐줘서 면죄부는 받았다지만.

당한 거라고 하기에는 길어도 너무 긴 첫 키스였다.

‘술 취한 친구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지구상에서 가장 안전한 남자’는 무슨.

성준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속을 알 리 없는 재인은 생긋 웃으며 마무리 인사를 날렸다.


“김 실장님, 그럼 오늘도 유라 자알 부탁드립니다. 안전하게!”

혹시…….

지금 딴 맘 품지 말라고 경고하는 건가?


“……물론이죠. 안전하게!”

괜히 혼자 찔린 성준이 어색하게 맞장구를 치는데, 도혁과 눈이 딱 마주쳤다.

흐응.

가늘게 뜬 눈으로 성준을 유심히 쳐다보던 도혁이 이내 알겠다는 듯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순간 성준의 이마를 타고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나 지금, 들킨 거 맞지?’

 

* * *

그날 밤.

호텔 스카이라운지의 고급 다이닝바에서는 재벌가 자제들의 연말 파티가 한창이었다.

시끌벅적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한껏 멋을 부린 젊은이들이 군데군데 무리 지어 흥에 취해 있었다.

바 테이블에 앉은 세정은 잔뜩 굳은 얼굴로 연거푸 칵테일 잔을 비우고 있었다.

친구 민혜가 아슬아슬한 치맛단을 끄집어 내리며 비틀비틀 걸어왔다.


“세정아, 여기서 뭐 해? 같이 안 놀아?”

“난 됐어. 너희들끼리 놀아.”

“안 돼. 저쪽에서 너 빨리 데려오라고 난리란 말이야.”

세정은 민혜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쳐다보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나같이 별 볼 일 없는 녀석들뿐이네.’

세정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됐어. 민혜 너나 많이 놀아.”

“그러지 말고 가자아아, 응?”

“됐다니까!”

세정은 짜증이 솟구쳐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버렸다.

놀란 민혜가 주춤거리며 사과했다.


“미, 미안해.”

“아니야. 내가 머리가 너무 아파서. 미안, 나중에 얘기하자.”

세정은 주변에 보는 눈이 너무 많다는 걸 의식하며 민혜를 달래 보냈다.

머리가 아프다는 건 거짓이 아니었다.

다시 혼자가 된 세정은 몇 시간 전 한세병원에서 본 장면을 곱씹으며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차도혁, 결혼할 생각 없다고 큰소리치더니, 여자가 있는 거였어?’

연말 파티에 오기 전, 세정은 VIP실에 입원한 할머니의 병문안을 위해 한세병원에 갔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도혁을 보고, 황급히 몸을 숨겼다.

자신에게는 얼음장처럼 차갑기만 했던 도혁이 다른 여자에게는 환하게 웃어 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분함을 넘어서 수치심마저 일었다.


‘차도혁 옆에 있던 여자…… 분명 저번에 휴게소에서 본 그 여자였지?’

차도혁과 같이 출장 갔던 회사 직원.

너무 수수해서 기억에 남지도 않았던 존재.

세정 자신보다 뭐 하나 잘난 게 없어 보였는데도.

그런데도 은근히 신경이 쓰였던 그 여자.


‘출장이란 건 핑계였어? 그럼 크리스마스이브에 출장 갔다며 파티에 오지 않은 것도?’

육감이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잔이 깨져라, 술잔을 쥐고 있는 세정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차도혁, 감히 그런 여자 때문에 날 마다해?’

세정의 고고한 자존심에 깊은 스크래치가 났다.

도혁이 냉랭하긴 했지만, 집안끼리 혼사가 진행되고 있으니만큼 그도 별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게 오산이었다.

결혼 전인 데다 세정 역시 가끔 만나는 남자들이 있으니, 즐기는 여자 하나쯤은 눈감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도혁과 같이 있던 여자의 분위기는 누가 봐도 서로에게 푹 빠진 연인의 모습이었다.


‘그런 거라면 곤란한데…….’

불현듯 휴게소에서 도혁을 만났을 때, 그 여자를 같이 봤던 민혜가 마음에 걸렸다.


「옆에 있던 여자는 누구래? 처음 봤을 때 다정해 보여서 둘이 사귀는 사인 줄 알았어.」

쓸데없는 말 하지 말라고 입단속을 시키긴 했지만, 분명 뒤에서 이 말 저 말 떠벌리고 다닐지도.

혼담이 무산된다면, 시시한 여자 때문에 차도혁한테 차였다고 비웃음을 사겠지?


‘이러다 망신만 당하고 끝나는 거 아니야? 젠장!’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서진물산 창립기념일 파티 때, 아버지 윤문식 회장이 도혁과 만나고 싶다는 의중을 내비쳤고.

그래서 다음 주말에는 세정의 가족 모두 차대산 회장의 자택을 방문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만약 그날 도혁이 다른 여자가 있다고 밝히면서 결혼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양가 어른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그런 수치스러운 일을 당한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최상의 시나리오는 그 여자를 도혁에게서 조용히 떼어내고, 예정대로 결혼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속이 탄 세정은 칵테일을 단숨에 비우고 탁, 소리가 나게 잔을 내려놨다.

그때 한 남자가 옆자리에 앉으며 말을 걸었다.


“이게 누구야? 도도하신 윤세정 아니야?”

세정은 눈길도 주지 않고 쌀쌀맞게 내쳤다.


“지금 말할 기분 아니니까 다른 데 가서 앉아.”

이미 익숙한 대답인지, 남자는 능글맞은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이거 섭섭한데? 한때는 매일 밤 같이 어울렸던 사이였잖아?”

“네가 안 가면 내가 갈게.”

“세정아, 잠깐만.”

남자는 자리를 떠나려는 세정의 팔을 덥석 잡아채며 물었다.


“너 도혁이 형이랑 혼담 오간다던데, 괜찮아?”

“뭐가?”

“형이 너랑 나랑 만났던 거 알고 있냐고.”

세정은 남자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말했다.


“차진혁, 헛소리 한 마디만 해봐. 이 바닥에 발도 못 붙이게 만들어버릴 테니까.”

“알았어, 알았어.”

남자가 항복의 표시로 두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남자는 현재 대산그룹 대표인 차정환의 아들이자 도혁의 사촌 동생인 차진혁이었다.

진혁과 세정은 유학 시절에 재벌가 자제들의 사교 모임에서 만나 사귀었던 사이였다.

똑같이 불같은 성격이라 서로 밑바닥까지 보이며 싸우다가, 결국 두 달도 못 가서 깨졌지만.

그러나 진혁은 그 뒤로도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세정의 주위를 계속 맴돌았다.


“윤세정 성질머리하고는. 뭐, 그게 매력이라 사귄 거였지만.”

“그땐 내가 아주 단단히 돌았었지. 다신 그럴 일 없을 거니까 나한테 신경 꺼.”

“근데 너, 정말 도혁이 형이랑 결혼할 셈이야?”

“네가 무슨 상관인데?”

“아주 상관있지.”

진혁이 세정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씩 웃었다.


“내 사촌한테 주기에는 세정이 네가 너무 아까워서 말이야. 우리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할까?”

또 시작이다.

헤어진 지 1년이 넘었는데 무슨 수작이야?

세정은 저만 보면 농담처럼 선 넘는 말을 툭툭 던지는 진혁이 내심 싫진 않았다.

아직도 자신을 잊지 못해 목을 매는 것 같아서.


“너도 MF파트너스 대표 딸이랑 약혼한다는 얘기가 들리던데 무슨 헛소리야?”

“아하, 그거? 비밀인데 어떻게 알았어?”

“이 바닥에 비밀이 어디 있어?”

“그렇긴 하지. 약혼은 아버지가 멋대로 밀어붙이는 것뿐이야.”

“알 게 뭐야. 남의 일에 신경 끄고 각자 잘 살자, 알았지?”

세정은 진혁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뒤로 돌아섰다.

갑자기 진혁이 세정의 손목을 붙들더니 홱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의 몸이 한 몸처럼 바짝 밀착이 되었다.

세정을 지그시 쳐다보며 진혁이 말했다.


“너만 오케이하면 지금이라도 그깟 약혼 깨버릴 수 있는데, 어때? 너도 도혁이 형보다는 나랑 사는 게 훨씬 편할걸?”

그건 그럴지도.

이미 바닥까지 본 사이니, 애써 얌전한 아가씨 행세를 할 필요가 없으니까.

세정은 얄궂게 웃는 진혁을 보며 그와 사귀게 된 이유를 떠올렸다.

차진혁은 윤세정이 어린 시절에 반했었던 차도혁과 많이 닮았다. 역시 사촌이라 그런지.

진혁의 인상이 더 날카롭긴 하지만.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 그건 대산그룹 후계 서열 2위라서.

순간.

세정의 머릿속에 반짝, 하고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제 손을 더럽히지 않고도 도혁의 여자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그리고 꽤 괜찮은 플랜 B까지.

세정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진혁의 팔을 거슬러 올라갔다.


“진혁 오빠, 혹시 아직도 내게 미련이 남아 있는 거예요?”

“오빠? 그 소리 다시 들으니 좋긴 한데…… 갑자기 존댓말까지……. 왜 이래?”

돌변한 세정의 태도에 진혁이 주춤하며 미심쩍은 눈빛을 보냈다.

세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유혹하듯 진혁에게 손짓했다.


“고개 좀 숙여봐요. 잠깐 귀 좀.”

몸을 숙인 진혁의 귓가에 세정이 무언가 속삭였다.

잠시 후, 잠자코 듣고만 있던 진혁의 눈이 번쩍 뜨였다.

* * *



“잠시만.”

그날 밤.

도혁은 재인의 방문 앞에서 못내 아쉬운 듯 그녀를 품에 꼬옥 끌어안았다.

놀라서 멈칫하던 재인도 이내 도혁의 등을 살포시 감싸 안았다.

두근두근.

심장의 고동 소리가 마구 뒤섞여 누구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서재인 씨, 나 말이야, 요즘 정말 큰일 났어. 현실 감각이 완전 제로야.”

“왜요?”

“너무 행복해서 매 순간이 꿈을 꾸는 것만 같아. 깰까 봐 두려울 정도라고.”

“팀장님…….”

도혁의 솔직한 고백에 재인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재인도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이대로 계속되기만 한다면.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함께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더 바랄 게 없을 정도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예전의 껄끄러움은 온데간데없고 서로를 맞춰가는 이 시간이 더없이 즐거웠다.

오늘 도혁은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떡볶이집에 같이 가줬다.

덕분에 우연히 성준과 유라도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거침없는 유라 때문에 간이 철렁하긴 했지만.

킥킥.

재인은 갑자기 맵디매운 떡볶이를 먹으며 땀을 뻘뻘 흘리던 도혁이 떠올라 웃음이 터졌다.

도혁은 이쯤이야, 라고 의연한 척하더니 달디단 음료 한 통을 한 번에 마셔버렸다.


‘매운 거 잘 못 드시면 말을 하지. 순대도 힘들게 참고 드시고, 괜히 미안하네.’

재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맞추려고 애쓰는 도혁이 사랑스럽고 고마웠다.

도혁이 자신의 뜻에 따라줄 때마다 그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 것만 같아 가슴이 설렜다.


“갑자기 왜 웃는 거야?”

도혁이 당황해하며 묻자 재인은 그의 품을 더 파고들며 말했다.


“팀장님이…… 좋아서요.”

“서재인 씨…….”

재인을 안은 도혁의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진짜 들여보내기 싫다.”

“팀장님…….”

 

.
.
.

하마터면 방에 들어오라고 할 뻔했네.

재인은 얼굴이 화르륵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동시에, 엊그제 밤 도혁이 했던 말들이 귓가에 맴돌았다.


「대체 날, 뭘로 보는 거야? 나 그렇게까지 욕구불만은 아니거든?」

「서재인 씨가 원한다면 기꺼이 응해 줄 의향이 있긴 한데…….」

그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미칠 듯이 일렁였다.

도혁의 소원을 핵폭탄급으로 착각한 그날 이후.

재인은 심경에 큰 변화가 생겼다.

한번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었을까?

아까 유라가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냐고 물었을 때는, 아직 열흘밖에 안 됐다고 펄쩍 뛰긴 했지만.

재인은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

이제는 자신도 더는 어찌할 수 없을 만큼 그의 전부를 원했다.

사실 어젯밤에도 도혁이 밀고 들어오면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오빠 타령은 계속해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는 도혁이었다.


‘하긴. 그렇게 밀치고 도망쳤으니, 나 같아도 또 그럴까 봐 말 안 하겠다.’

그렇다고 재인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내는 건…….

생각만으로도 너무나 부끄러웠다.

.
.
.

어찌해야 하나 고심하던 그때.

갑자기 도혁이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아주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숨이 끝나려는 때쯤,

도혁의 입에서 탄식에 가까운 말이 새어 나왔다.


“밤새 같이 있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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