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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밤에, 잠이 안 올 만도 하지 (78/129)


78화. 밤에, 잠이 안 올 만도 하지
2023.02.28.


재인이 도혁을 데려간 곳은 대학가 외진 골목에 있는 허름한 떡볶이집이었다.

‘20년 된 맛집’이라고 쓰여 있는 간판이 색도 바래고 너덜너덜한 것으로 보아 족히 30년은 된 듯싶었다.

그 앞에 선 도혁은 굳은 표정으로 선뜻 들어가지 못했다.

재인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한 트럭이라도 먹겠다고 큰소리치고 오긴 했지만.

이건 좀 너무했다.


“서재인 씨, 꼭 여기서 먹어야 하는 거야? 어디 다른 곳으로…….”

“보기는 이래도 맛은 끝내줘요. 배고픈데 어서 들어가요.”

재인이 꼬옥 팔짱을 끼고 잡아당기자 도혁은 마지못해 걸음을 뗐다.

가게 안에 들어간 재인은 앉을 자리를 둘러보다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어? 유라야!”

“재인이? 차 팀장님까지?”

유라도 놀랐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재인은 맨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는 유라에게 한달음에 달려갔다.


“저번에 통화했을 때 오늘 선약 있다더니 여기 오려는 거였어?”

“으응.”

며칠 전, 재인은 유라에게 도혁과 사귄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유라가 실연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괜스레 미안했는데, 유라는 재인의 걱정을 쿨하게 날려버렸다.


「당연히 사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새삼스럽긴. 같은 집에 살고, 고백하고, 키스까지 했는데. 사귀는 게 아니라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냐?」

그런 건가? 아무튼.

재인은 유라에게 도혁을 남자친구로서 정식으로 소개시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오늘 만나자고 했지만 선약이 있다기에 새해로 약속을 미룬 상태였다.

무엇보다 성지훈한테 차여서 고주망태가 된 날 이후 처음 유라를 만나는 거라, 재인은 그저 반갑기만 했다.


“어떻게 여기서 딱 만나? 통했나 보다.”

“……그러게.”

“근데 유라 넌 누구랑 왔어?”

“아, 그게…….”

유라가 평소답지 않게 우물쭈물했다.

그때, 가게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리면서 누군가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무심코 입구를 돌아본 재인과 도혁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김 실장님?”

“김 실장님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아……!”

성준이 문 앞에 동상처럼 굳어 있었다.

유라를 향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던 그 자세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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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테이블 위에 튀김, 순대 등이 차려지고 즉석떡볶이가 보글보글 맛있게 끓기 시작했다.

재인이 나란히 앉아 있는 유라와 성준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근데 오늘 어떻게 둘이 만나게 된 거예요?”

“아, 저번에 나 술 취했을 때 김 실장님이 데려다주셨잖아. 그때 고마워서…….”

“그런 민폐를 끼쳤는데 떡볶이로 때우려고? 너무했다. 그죠, 김 실장님?”

재인이 유라에게 핀잔을 주자 성준이 유라를 두둔했다.


“아닙니다. 제가 이래 봬도 떡볶이 마니아라서요. 유라 씨가 맛있는 곳이 있다길래 제가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어머, 김 실장님도 떡볶이 좋아하세요? 여기 말고 유라랑 자주 가는 떡볶이집이 또 있는데, 거긴 3대째 하는 데거든요. 다음에 다 같이 가요.”

“저는 괜찮습니다만, 도련님이 어떠실지?”

성준은 도혁을 넌지시 바라봤다.


“3대째면 대체 얼마나 오래된 가게야?”

도혁은 영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재인이 도혁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팀장님도 같이 가실 거죠, 당연히?”

 

 


“흠흠, 알았어.”

순식간에 고분고분해진 도혁의 모습에 성준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순한 양 같은 차도혁이라니.

사실 성준은 유라와 만나는 걸 들킨 것보다, 책상 위의 먼지 한 톨도 거슬려 할 만큼 깔끔한 도혁이 허름한 떡볶이집에 있다는 게 더 놀라웠다.

게다가 매운 걸 잘 못 먹어서 평소에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떡볶이를 먹겠다고.

그것뿐인가?

재인이 아, 하고 입에 넣어주니, 그간 쳐다보지도 않았던 순대를 순순히 받아먹기까지 하는 도혁이었다.

성준은 도혁의 이 모든 모습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이런 게 사랑의 힘인가? 천하의 차도혁을 좌지우지하다니, 서재인 씨야말로 진정한 능력자야.’

성준은 행복해 보이는 두 사람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나저나 둘 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것 같군.’

성준은 혹시라도 유라와 사귀는 걸 재인과 도혁이 눈치챘을까 봐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다행히 잘 넘어간 것 같아서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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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성지훈과 동일 인물이라는 걸 들켰던 그날.

자초지종을 들은 유라는 이렇게 말했다.


「커플 팔찌를 끊지 않은 게 가상해서 큰맘 먹고 넘어가는 건 줄 아세요.」

그렇게 팔찌 때문에 정체를 들키고, 팔찌 덕분에 간신히 위기를 넘긴 성준이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성준과 유라는 연인이 되었다.

단, 봄에 있을 도혁의 후계자 승계가 마무리될 때까지는 비밀로 삼기로 했다.

이 중요한 시기에, 자칫 도혁의 최측근인 성준이 연애에 빠져 일을 등한시한다고 누군가는 손가락질할지도 모르니까.

무엇보다 성준이 옥탑방에 살았던 성지훈이라는 걸 재인이 알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괜한 오해를 사기 십상이었다.

유라의 입장에서도 성지훈 때문에 그 난리를 쳤었기에.

성지훈과 똑 닮은 김 실장님과 잽싸게 환승연애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싫었다.

아니, 유라는 오히려 비밀 연애를 반겼다.


「잘됐어요! 저, 사실은 비밀 연애, 꼬옥 한 번 해보고 싶었거든요. 스릴 있을 것 같잖아요!」

오늘의 만남은 스릴이 넘치다 못해 간 떨어질 뻔했지만.

무사히 넘겨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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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준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슬쩍 유라를 곁눈질했다.

유라는 눈을 반짝이며 도혁과 재인을 관찰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근데요, 차 팀장님. 재인이의 어떤 부분이 좋으세요?”

유라의 질문에 도혁이 일말의 망설임 없이 답했다.


“전부 다요.”

“굳이 하나만 꼽자면?”

“예뻐서요. 딱 제 이상형입니다.”

꺅.

재인은 떡볶이 떡을 오물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는 둥, 얘기하면 즐겁다는 둥, 닿으면 미칠 것 같다는 둥.

도혁에게서 그보다 더한 말을 계속 들어오긴 했지만 예쁘다는 말은 오늘 처음이었다.

도혁의 대답이 매우 흡족한 듯 유라가 박수를 쳤다.


“서재인, 성공했네! 자리가 좀 그렇긴 하지만, 모솔 탈출 다시 한번 축하한다. 장하다, 장해!”

“야, 그만해! 창피하게.”

누가 듣기라도 한 건 아닌지, 재인이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라는 도혁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차 팀장님, 재인이 얘가 보통 철벽이 아닌데, 정말 큰일 해내셨어요.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도혁의 입꼬리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자, 유라의 눈빛이 의뭉스럽게 돌변했다.


“근데요, 철벽을 무너뜨린 결정타는 뭐였어요? 궁금하니까 자세히 얘기 좀…….”

“얘가 뭐래!”

재인은 새빨개진 얼굴로 황급히 유라의 입을 틀어막았다.

읍! 읍!

유라가 못다 한 말을 웅얼거리며 재인의 손을 떼어내려고 버둥거렸다.

성준은 그런 유라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성준을 지켜보던 도혁이 눈썹을 꿈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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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볶이집에서 나와 차에 오르기 전, 잠시 서서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그 잠깐 사이에 성준과 도혁은 금세 일 얘기에 빠져들었다.

정말 대단한 워커홀릭이시네.

재인이 혀를 내두르는데, 유라가 옷깃을 당기며 물었다.


“재인아, 그럼 내일모레 할머니 팔순 잔치는 차 팀장님이랑 같이 가는 거야?”

엄마랑 통화하고 심란해서 유라에게 얘기했던 걸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때 유라가 도혁과 같이 가라고 하는 걸 재인은 제풀에 찔려 펄쩍 뛰었었다.


“아니. 팀장님이 본가 가봐야 한다고 해서 말도 못 꺼냈어. 그리고 사귄 지 며칠 안 됐는데 그런 부탁을 어떻게 해. 우리 집안 분위기 알잖아.”

“알지. 너무 잘 아니까 걱정돼서 그러지.”

“바빠서 같이 못 왔다고 하면 돼. 사실이니까.”

“그나저나 속도 좋다, 넌. 반기지도 않는 자리에 뭐 하러 가니? 어차피 가나 안 가나 욕먹는 건 똑같은데.”

유라가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이미 익숙한 반응이라 재인은 가볍게 웃어넘겼다.


“그래도 할머니잖아.”

“으이그! 너한테 뭐 해준 것도 없이 구박만 하는데 할머니는 무슨.”

“내 얘긴 그만! 유라 넌 이제 좀 괜찮아진 거야?”

유라에게 실연의 상처 따위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지만, 재인은 노파심에 확인차 물어봤다.


“나? 요즘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지.”

“그래? 다행이다. 성지훈은 말끔히 털어냈구나?”

“성지훈이 누구야?”

유라가 딴청을 부리며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다시 예전의 씩씩한 모습으로 돌아온 친구의 모습을 보며 재인은 안심을 했다.

갑자기 유라가 재인의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다.


“그나저나 어디까지 나갔어?”

“응? 뭐가?”

“차 팀장님이랑 진도는 어디까지 뺐냐고.”

툭 던지는 게, 정말 수업 진도라도 묻는 듯한 말투였다.

재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모, 몰라!”

“흐응. 역시 아직이구나.”

유라가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재인아, 그러다 차 팀장님 몸에서 사리 나오겠다. 아마 환청으로 목탁 소리도 들릴걸?”

“뭐래, 아직 사귄 지 열흘밖에 안 됐거든?”

재인이 발끈하자 유라가 도혁을 안쓰럽게 쳐다보며 말했다.


“같은 집에 사는데, 무려 열흘씩이나 된 거지. 같이 산 지는 벌써 한 달이야. 너야 당연한 거겠지만, 혹시 차 팀장님한테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니니?”

“최유라, 너 진짜!”

그때 도혁이 재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쑥 내밀었다.


“제가 뭐요?”

히익!

재인은 간이 철렁했다.

원성이 가득한 재인의 눈빛을 슬쩍 피하며 유라가 넉살 좋게 둘러댔다.


“아, 차 팀장님이 전보다 피곤해 보이신다고요. 혹시 건, 강, 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요.”

“요즘 잠을 잘 못 자서 좀 피곤하긴 하죠.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라가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밤,에, 잠이 안 올 만도 하죠.”

“네?”

도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위험! 위험!

재인의 머릿속에서 긴급 대피 경보가 울려 퍼졌다.

최유라와 차도혁을 신속히 떼어놔라!

재인이 다급히 도혁의 팔을 붙들며 말했다.


“팀장님, 피곤한데 빨리 집에 가요.”

“음. 그러지.”

“유라, 너도 어서 집에 가야지?”

헛소리 그만하고.

재인은 눈으로 레이저를 쏘며 유라의 등을 떠밀었다.

하지만 유라는 아직도 할 말이 많이 남은 눈치였다.


“난 아직 시간 괜찮은데? 그러지 말고 차나 한잔 더 하자.”

“유라 씨, 차는 저랑 드시죠.”

성준이 유라를 막아서며 상황을 정리했다.

그 한마디에 불 꺼진 촛불처럼 유라가 잠잠해졌다.

성준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두 분 먼저 조심히 들어가세요.”

“김 실장님,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유라 씨는 제가 집 앞까지 모셔다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걱정은요, 무슨. 민폐라 죄송하죠.”

살았다.
재인은 시기적절하게 적재적소에 발휘되는 성준의 센스에 다시금 감탄했다.


“김 실장님, 다음에 제가 식사 대접 제대로 할게요. 저 아플 때도 도와주시고, 유라 술 취했을 때도 챙겨주시고, 여러모로 신세를 많이 졌어요.”

“괜찮습니다. 할 일을 한 것뿐인데요.”

“실은 저번에 유라랑 헤어지고 연락이 안 돼서 걱정했었거든요. 근데 차 팀장님이 ‘김 실장님은 술 취한 친구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지구상에서 가장 안전한 남자’라고 해서 마음 푹 놓고 잤어요.”

“하하, 그러셨군요.”

혹시…… 일부러 떠보는 건가?

성준은 그날 유라와 뜨거운 키스를 나눴던 장면이 떠올라 속으로 뜨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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