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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이젠 아무래도 좋아! (77/129)


77화. 이젠 아무래도 좋아!
2023.02.25.


볼링 2차전.

자신만만하게 볼링공을 집어 든 도혁은 스트라이크를 무려 6번이나 날리며, 규민을 5점 차로 이겨버렸다.

정말로.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결과에 팀을 불문하고 너나없이 환호성을 질렀다.

선두를 빼앗긴 규민도 기가 막힌 듯 웃음을 터뜨렸다.

딱 한 사람, 뒷감당이 두려운 재인만 빼고.


‘비상구에서 들어가기 싫다고 주저하던 모습은 페이크였어?’

재인은 아무래도 당한 느낌을 지우지 못해 또다시 물었다.


“팀장님, 정말 오늘 볼링 처음 치신 거 맞아요?”

“몇 번을 물어? 난 누구랑 다르게 거짓말을 못 한다니까.”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요. 아무리 운동신경이 좋아도 그렇지, 어떻게 도랑에 빠지다 200점을 넘겨요?”

도혁이 한껏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물었다.


“왜? 내 실력을 보고 더 반하기라도 한 거야?”

그랬다. 인정하긴 싫지만.

심지어 지금 재인의 눈에는 소파에 앉아 있는 도혁의 주위로 눈부신 광채까지 보였다.

이렇게 멋진 남자가 내 남자친구라니!

도혁과 눈이 마주친 재인은 그제야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정신 차려, 서재인! 너 팀장님한테 제대로 낚인 거라고.’

내기하자고 했을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는데.

차도혁이 승산 없는 게임을 할 리가 없다는 걸 간과했다.

엄마를 생각해서 할머니 팔순 잔치에 잠깐 들러달라고 부탁하려다, 오히려 옴팡 뒤집어쓰게 생겼다.


“서재인 씨, 내기한 거 기억하지?”

“네?”

재인이 내적 갈등에 시달리는 사이.

언제 왔는지 재인의 옆자리에 바짝 붙어 앉은 도혁이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기면 소원 들어준다고 해서 영혼까지 불살랐단 말이야.”

“아…….”

뭘 그렇게까지. 부담스럽게.

도혁의 은근한 목소리에 재인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무슨 소원이신데요?”

“서재인 씨도 잘 알 텐데? 내가 뭘 원하는지.”

팀장님이 원하는데 내가 잘 아는 거라면?

집에 오는 동안 소원이 뭐냐고 물어봐도 도혁은 말없이 웃기만 했었다.

재력, 외모, 능력 어느 것 하나 아쉬울 것 없고, 원하면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는 차도혁이다.

그런 그가 뜻대로 되지 않아 굳이 소원을 빌면서까지 원하는 것이라면?

두둥.

순간 재인의 머릿속에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답이 힘차게 고개를 들었다.

바로, 재인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


‘에이, 설마…….’

무심코 도혁을 쳐다본 재인은 움찔하며 눈을 크게 떴다.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만 같은 깊은 눈동자가 그녀에게 못 박혀 있었다.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눈빛과 잔뜩 상기된 얼굴.

어린애도 아니고, 이쯤 되면 재인도 더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게 맞구나!’

소파 위에 놓인 재인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사귄 지 일주일째.

재인의 입장에서는 너무 빠르지만, 오래전부터 그녀를 좋아해 온 도혁으로서는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해 기다리는 것일 터였다.

매일 같은 집에서 밤을 보내니 더더욱.

재인도 잘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도혁을 기다리게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드디어 때가…… 온 건가?’

손끝에서 시작된 떨림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재인은 가파르게 빨라지는 심장의 고동을 느끼며 숨을 골랐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녀 자신도 자각은 하고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는 도혁을 원하고 있었다는 것을.


“서재인 씨,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

도혁이 발그스레 달아오른 재인의 볼을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손바닥의 온기가 그녀의 가슴에 따뜻하게 스며들었다.

재인은 고개를 들어 도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짙은 눈동자.

올곧게 자신만을 향한 그 눈동자를 마주하자 가슴이 일렁이다 못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아아, 이젠 아무래도 좋아!’

 

 
재인은 두 팔을 뻗어 도혁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새초롬하게 닫혀 있던 입술 사이로 가냘픈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팀장님…… 저 괘, 괜찮아요.”

“뭐가?”

“팀장님이 바라는 소원…….”

“정말?”

“……네.”

재인은 떨림을 주체할 수 없어 도혁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서재인 씨, 그럼…….”

도혁의 달뜬 목소리가 그녀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앞으로 둘이 있을 때는 ‘오빠’라고 불러줄래?”

“그럼요. 오빠라고 부를…….”

응?

잠깐만.

재인은 화들짝 놀라 도혁에게서 떨어졌다.


“오빠라고 부르라고요?”

밤새 같이 있자는 게 아니고?

재인은 어이가 없어 도혁을 빤히 쳐다봤다.


“저도 알 거라는 소원이…… 그거였어요?”

“응.”

도혁은 ‘달리 뭐가 있겠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거, 아주 잘 알긴 하지.

재인은 산타 역할을 부탁할 때 딱 한 번 ‘도혁 오빠’라고 불렀었다.

그 뒤로 도혁은 ‘시환에게는 오빠라고 하면서 왜 자기한테는 오빠라고 안 하냐’고 몇 번이나 투정 부리듯 얘기했었다.

생각만으로도 닭살이 돋아서 못 들은 척했었는데.

차도혁이 그걸 소원으로 빌 줄이야.


‘아우, 창피해! 내가 아주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었네.’

재인은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수증기처럼 증발해버리고 싶었다.

잔뜩 먹구름이 낀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도혁이 물었다.


“서재인 씨, 괜찮아?”

“……네.”

“대체 무슨 소원이라고 생각했길래 그래?”

“…….”

죽어도 말 못 해!

재인이 새빨개진 얼굴로 입술을 감쳐물자, 도혁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서재인 씨, 설마…… 내가 우리의 첫날밤을 그런 치사한 방법을 써서 요구할 거라고 생각한 거야?”

꺄아아아아아악!

도혁의 입에서 ‘첫날밤’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재인은 창피함이 백만 배 불어났다.

아니라고 딱 잡아뗐어야 했는데 당황한 나머지 그만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도혁이 쿡쿡 웃으며 재인의 코를 살짝 쥐었다 뗐다.


“대체 날, 뭘로 보는 거야? 나 그렇게까지 욕구불만은 아니거든?”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이미 늦었어. 쪽팔려 죽겠네.

재인은 눈을 질끈 감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런 그녀의 귓가에 뜨거운 숨결이 훅 끼쳤다.


“서재인 씨가 원한다면 기꺼이 응해 줄 의향이 있긴 한데…….”

“됐거든요!”

재인은 도혁을 밀치며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도혁에게 붙잡힐세라 냅다 뛰어가는 그녀의 등 뒤로 안타까운 외침이 날아들었다.


“서재인 씨, 그냥 가면 어떡해? 오빠라고 불러주고 가야지!”

“몰라요!”

“좀 전에 오빠라고 부른다고 약속했으면서, 너무하네.”

그놈의 오빠 타령은!

내가 부르나 봐라!

쾅!

재인은 도혁의 불만 가득한 말을 귓등으로 튕기며 방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곧장 침대 위에 철푸덕 엎어져 발버둥을 쳤다.

창피해서 죽을 것 같다는 게 무슨 뜻인지 뼈저리게 느끼며.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 하나.


‘정작 욕구불만인 건…… 혹시 나?’

미쳤어, 미쳤어!

재인은 머리 위에 베개를 뒤집어썼다.


‘아아, 생각 좀 안 하게 빨리 잠들어 버렸으면…….’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오늘 밤, 이불킥 하느라 날 밤을 새우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것을.

* * *

이틀 뒤인 수요일 저녁.

도혁과 재인은 퇴근길에 한세병원을 찾았다.

현아의 심장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소식에 한걸음에 달려온 것이었다.

병원 로비의 카페에 들어서자 별사랑보육원의 김성희 원장이 웃으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재인이 왔구나. 어머, 차 팀장님까지.”

“원장님, 고생 많으셨죠. 현아는 괜찮아요?”

“수술 잘됐고, 이틀 후에는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긴대. 고맙다, 재인아. 차 팀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덕분에 수술도 빨리 받고 무사히 잘 끝났어요. 현아 쓰러졌을 때도 그렇고. 정말이지, 차 팀장님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생각만으로도 끔찍한지 김 원장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혁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데요. 오는 길에 조 원장님께 연락받았는데, 한동안 지켜봐야겠지만, 앞으로는 현아 건강하게 잘 지낼 거라고 합니다.”

“정말요? 듣기만 해도 안심이 되네요. 감사합니다.”

김 원장은 연신 눈시울을 훔치며 환하게 웃었다.

재인도 김 원장의 손을 맞잡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잠시 후, 재인과 도혁은 현아에게 줄 선물을 김 원장에게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원 로비를 빠져나가면서 재인이 말했다.


“팀장님, 현아를 도와주신 거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뭘. 수술이 잘돼서 정말 다행이야.”

“현아가 다 나으면 네버랜드에 같이 갈 거예요.”

“외곽에 있는 놀이공원?”

“네. 현아가 몇 년 전부터 거기 가보는 게 소원이라고 노래를 불렀거든요. 바빠서 다음에, 라고 미루기만 했었는데…….”

순간 울컥했는지 재인의 목소리가 잠겼다.

도혁이 재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할 수 없군. 내가 같이 가주지.”

“팀장님이요?”

“응. 사람 많은 건 딱 질색이지만.”

“팀장님…….”

재인은 무심한 말 속에 담긴 따뜻한 배려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대체 이 남자의 매력이란, 끝이 있긴 한 거야?


“딱 질색인데도 가시려는 걸 보니, 놀이기구 타는 걸 엄청 좋아하시나 봐요?”

“뭐? 서재인 씨,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도혁의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가는 것을 본 재인은 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도혁이 스윽 몸을 기울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나저나 내 소원은 언제 들어줄 거야?”

“아…….”

「앞으로 둘이 있을 때는 ‘오빠’라고 불러줄래?」

그 소원, 아직도 포기를 못 하셨구나.

도혁은 재인이 모른 척하는데도 불구하고, 어제부터 벌써 몇 번이나 말을 꺼냈다.

재인은 잔뜩 기대에 부푼 부담스러운 눈빛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가, 갑자기 바꾸는 건 무리예요.”

“왜? 지난번엔 잘만 하더니?”

“그건 어쩔 수 없이…… 아무튼 무리예요. 그러다 회사에서 말실수라도 하면 어떡해요?”

“알 게 뭐야. 그렇다고 남자친구한테 계속 ‘팀장님’이라고 할 거야?”

연인 사이에는 당연히 ‘씨’나 ‘오빠’, ‘자기’ 같은 호칭을 써야겠지만.

생각만으로도 부끄러워서 입이 떨어지지 않는 재인이었다.


“알았어요. 대신, 회사 그만두고 나서요.”

“그렇게 오래 기다리라고? 너무하네.”

“이것도 백번 양보한 건데, 싫음 마시고요.”

“아, 아니야!”

도혁은 재빨리 재인과 새끼손가락을 걸며 다짐을 받았다.


“대신, 회사 그만두면 꼭 약속 지켜야 해. 알았지?”

“그럼요.”

에라, 모르겠다.

뒷일은 그때의 서재인에게 맡기자.

그나저나 서릿발 같은 차도혁이 이런다는 걸 누가 믿겠어?

서재인만 아는 차도혁.

도혁의 새로운 모습을 알아 갈수록 그에게 더 깊이 빠져들어 가는 재인이었다.


“팀장님, 저 배고파요.”

재인이 매달리듯 팔짱을 끼자 도혁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그, 그래? 그럼 스테이크 잘하는 곳이 있는데 거기 갈까?”

“아뇨. 오랜만에 아주 매운 떡볶이가 먹고 싶어요. 마침 요 근처에 유라랑 자주 가는 떡볶이집이 있거든요.”

“떡볶이?”

군침을 꿀꺽 넘기는 재인과 달리 도혁은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인은 혼자서 신이 났다.


“따끈한 어묵 국물이랑 튀김도 먹어야지. 아, 순대도!”

“그냥 스테이크 먹으러 가지? 순대는 생긴 것도 그렇고 냄새도 별로…….”

“팀장님?”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 재인이 사슴같은 눈망울로 도혁을 올려다봤다.

이런. 너무 사랑스럽잖아!

도혁은 훅,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


“……지만, 서재인 씨가 좋아하는 거면 한 트럭이라도 먹을 수 있어. 어서 가지!”

“네에.”

두 사람은 경쾌한 걸음으로 로비를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이가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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